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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자명이 신채호와 함께 작성한 조선혁명선언 (출처_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조선혁명선언 서두와 말미  류자명이 신채호와 함께 작성한 조선혁명선언 (출처_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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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류자명의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가. 류자명은 일제 치하의 훈도(訓導), 독립운동가, 아나키스트, 농업학 교수 등의 다양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또한 90여 년의 인생 중에 한국, 조선이라는 땅에서 25년만을 살았음에도 마지막까지 조선인으로 영면한 인물이다.

그의 생전 1984년에 중국 농학회는 그간의 성과로 인한 원로 농업 과학자 표창장을 수여하며 1985년 3월에 중국 부총리 방의(方毅)가 저술한 '중국 현대 농학가'에서는 3번째 위인으로 배열되었다. 그리고 류자명 사후, 1996년 후난성 정부는 '과학기술의 별(科技之星)'이라는 칭호를 내린다. 물론 시기는 다르지만 한국과 북한 정부도 각각의 서훈으로 항일 독립운동가 류자명에 대한 예우를 하였다.

한국, 중국, 북한, 3국에서 수여한 상훈(賞勳)은 세계적으로 유일한 사례이다. 하지만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념과 국가를 초월하여 활약한 화합의 중재자로서 류자명의 면모이다. 동아시아 현대 역사의 주요 변곡점에서 류자명은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이 소탈한 아나키스트는 일제 패전 후 정치인이나 권력자의 노선을 걷지 않고 조용히 본연의 농업 연구자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수 십년을 침묵하다가 구순(九旬)이 다가오는 시점에서 치열했던 삶을 회고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한다. 건국대 한상도 교수를 포함한 많은 역사 연구자들이 이 기록을 고증하며 일부 노쇠한 기억력에 따른 오기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사실임을 입증하였다.

류자명의 '중재와 연결'... 신채호에게 김원봉 소개하고 '조선혁명선언' 완성

류자명은 중국에서 임시정부의 의원에 선출되고 여러 민족 지도자들과 교류를 하며 시야를 넓히게 된다. 특히 신채호와는 막역한 관계로 발전하며 사상과 지식을 나누며 아나키즘에 심취한다. 그러던 중 류자명은 1922년, 텐진에서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고 같은 해에 그를 신채호에게 소개해준다.

류자명과 신채호는 아직 명확한 이념이 없는 의열단을 위해 '조선 혁명선언'을 완성한다. 그리고 의열단은 비로소 사상과 정체성을 정립할 수 있게 된다. '조선혁명선언'은 동경 한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그리고 '3.1독립선언'과 더불어 3대 독립선언서의 하나로 꼽히며 의열단원뿐만 아니라 모든 독립운동가들과 한민족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단재 선생에게 상해로 와서 '조선 의열단 선언(조선 혁명 선언)'을 기초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 류자명 저, <어느 혁명자의 회억록> 중에서
 
김구, 김원봉과 함께 장제스 만나고 최전선에 참전

항일 독립운동 계열에는 여러 단체와 사상이 존재하였다. 그 중 김구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사회주의 계열의 김원봉과는 절대 연결될 수 없는 관계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 중재자로서 류자명이 있었던 것은 한인 독립운동 계열에서는 큰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류자명은 의열단의 중추적인 역할하기도 하였지만, 임시정부 의정원의 의원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며 류자명은 김구, 김원봉과 함께 장시성(江西省) 루산(庐山)에서 장제스를 만난다. 그리고 장제스에게 한·중 합작 항일전선의 구축과 이를 위한 재정지원을 약속 받는다. 물론 1932년, 윤봉길의 폭탄 투척 의거이후 국민당은 임시정부에게 암암리에 재정 지원을 하였지만 장시성 루산 회담에서부터는 지원이 더 확대 되었다. 공식적으로 발발한 일본과의 전쟁에서 장제스는 통일된 한인 항일 세력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당시 김원봉 계열은 수많은 실전과 함께 신흥무관학교, 황포군관학교를 거치며 체계적인 현대 군사 교육을 받은 집단이었고, 이들은 류자명과 함께 1938년 우한 한커우에서 '조선의용대'를 창설한다. '조선의용대'는 '국공합작' 항일 전선을 펼치던 중국 군대와 함께 최전선에서 전투에 참여한다. 당시, 이들의 직속 상관은 저언라이로 초대 중화인민공화국 총리가 되었다.

류자명은 조선의용대의 일원으로 참전을 하며 우한에서 퇴각하여, 후난의 창사, 헝양을 거치며 갖은 고생을 하며 구이린까지 도착하게 된다. 류자명은 최전선의 전투에서 일본은 막강한 화력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와 조선의용대의 주요 임원으로서 이러한 경험은 대한민국 독립운동 계열이 통합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게 하였을 것이다.

1939년부터 김원봉과 김구는 통일된 항전태세를 갖고자 연락을 취하고 이는 곧 광복군의 합류로 이어지는데, 이것은 류자명이 양측에 대한 중재와 연결을 노력한 결과였다.

국제 우호 인사 류자명의 소통

류자명은 중국에 도착하면서부터 중국어 학습에 열을 올린다. 한학을 기반으로 하였기 때문에 그의 중국어는 빠르게 진보하였다. 그리고 정치 이념을 떠나 중국 지식인들과 교류하게 되며 깊은 우정을 나눈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국제우인国际友人' 류자명이라는 기록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쾅후셩(匡互生)은 중국의 저명한 교육자이며 5.4 학생 운동을 이끈 핵심 인물이다. 그는 베이징사범학교(현재의 베이징사범대학)를 졸업하고 1919년, 자신의 고향인 후난에 도착하면서 제일사범학교(현재의 후난 제일사범대학)의 교무주임으로 근무한다. 제일사범학교의 총장은 그를 믿고 모든 업무를 맡기게 되는데, 여기서 그는 수완이 좋은 말단 직원인 마오쩌둥을 발견하고 주위의 만류에도 그를 쾌속 승진을 시킨다.
 
중국의 저명한 교육가, 민족지도자 쾅후셩과 관련한 고서 표지
▲ 쾅후셩과 입달학원 책표지  중국의 저명한 교육가, 민족지도자 쾅후셩과 관련한 고서 표지
ⓒ 孔夫子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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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은 이를 발판으로 후난성 민족지도자의 일원이 되어 1921년 창사(长沙)를 방문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우민 등과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결성하는데 참석한다. 이러한 쾅후셩은 이후 사립학교로는 자신의 교육관 실현에 한계를 느끼며 상하이에 입달학원(立达学园)이라는 대학을 설립한다. 이 입달학원에 류자명은 농업 교수로 부임하게 된다.

류자명이 쾅후셩과 연결된 것은 그의 해박한 지식과 중국어 소통능력도 있었지만 베이징에서부터 아나키스트 지식인들과의 교류가 큰 영향을 미쳤다. 입달학원에서 류자명은 유능한 교수로 소문이 나며, 국민당과 공산당이라는 이념을 초월하여 중국 지도층들과 인맥을 형성한다. 이러한 인맥은 몇 년 후 장제스와 루산회담으로도 연계가 되며 류자명이 대만 농림처에서 근무하는데도 큰 영향을 끼친다.

대문호 바진(巴金)과 나눈 우정이라는 소통
 
말년의 류자명(왼쪽부터 3번째)을 방문한 중국 대문호 바진(왼쪽서 2번째).
 말년의 류자명(왼쪽부터 3번째)을 방문한 중국 대문호 바진(왼쪽서 2번째).
ⓒ 공훈전자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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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진은 현대 중국사에서 루쉰과 함께 양대 대문호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류자명은 입달학원에서 그를 처음 접하는데, 이 둘은 아나키즘이라는 사상으로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류자명과 사상적 교류를 하던 바진은 그의 항일 행적을 알게 되었고 백발白髮의 류자명을 주인공으로 한 '머리칼 이이야기(髮的故事)'를 쓰게 된다. 이후 구이린에서 일본군의 폭격에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바진과 류자명은 '호형호제'를 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이러한 우정은 훗날, 문화대혁명으로 고초를 겪는 바진에게 류자명이 위험을 무릅쓰고 변론을 하기도 하고 바진이 류자명의 회고록을 수정해주기까지 하는 인연으로 깊어진다. 류자명과 바진의 일화는 그가 어떠한 사람이라도 진정성 있고, 책임감있게 교류하는 사람임을 말해주고 있다. 바진은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난징에서 상하이로 돌아오며, 從南京回上海', '민부도상(民富渡上)', '불에 관하여(關於火)' 등의 여러 종류의 글에 류자명을 등장시킨다.
 
류자명이 자신의 회고록을 초기에 쓴것으로, 중국 대문호 바진도 감수를 해주었다.
▲ 류자명 자필 회억록_중문판_출처_독립기념관 류자명이 자신의 회고록을 초기에 쓴것으로, 중국 대문호 바진도 감수를 해주었다.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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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자명을 국제우호인사로 널리 알려준 청싱링(程星齡)

청싱링은 후난성 출신으로서 베이징대학을 졸업하고 장제스 휘하 국민당 요직을 두루 섭렵한 인물이다. 입달학원의 중국인 아나키스트들이 류자명의 농업에 대한 조예를 청싱링에게 소개하여 연결된다. 류자명이 구이린에서 영조농장을 건립하고 운영하던 중 일제가 구이린을 점령하게 된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청싱링은 푸젠(福建)은행의 마지막 피난 화물차에 꼭 류자명 일가를 승차시키라는 명령을 내린다.

류자명 또한 대만 농림처에서 근무하던 중 청싱링이 공산주의 혐의로 투옥되어 대만에 오자 그를 걱정하며 면회를 하였다. 그리고 위기의 순간을 벗어난 청싱링은 후난성 부성장이 되어 류자명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 준다. 그는 류자명이 후난 농업대학에 정착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농업 연구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류자명이 북한에서 강제적으로 몇 번의 부름을 받았을 때마다 암암리에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중국 중앙방송국(CCTV)이 취재한 1983년 류자명의 구순연(九旬宴)에서 청싱링은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로서 인도주의 정신으로 중국을 사랑하였고 중국인민의 가장 친밀한 벗이며 국제우호인사'라고 소개하였다. 

일본인과 소통하는 항일 독립운동가, 농업 연구자
 
류자명은 대만 농림처에서 근무하던 중 한인들과 교류가 많았다.
▲ 대만 농림처에서 근무하며 신석우 대사 환영식에 참석한 류자명과 아들 류전휘, 우하단6 류자명은 대만 농림처에서 근무하던 중 한인들과 교류가 많았다.
ⓒ 홍소연 임정기념관건립추진위 자료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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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자명은 오파괴(五破壞) 칠가살(七可殺)을 신조로 하는 의열단이자 항일 독립 운동가이다. 하지만, 일본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배척하는 성품이 아니었다. 일본의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가에大杉榮와 도쿄대 교수인 모리도 다츠오森户辰男의 글을 읽고 감명을 받고, 일본인 아나키스트들과도 교류를 하였다. 그리고, 일제 패전 후 대만 농림처에서 근무하면서 대만척식회사의 일본인 농산림 연구자들과 교류를 하였다. 일본어가 유창했던 것도 이유였고 종전 후 농업이라는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기 위해서였다.

류자명은 본래 수원농림학교(현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를 졸업하고 충주에서 농업 교사로 재직하였다. 이러한 경력으로 중국 여명중학교, 입달학원에서 농업 학자로서 교편을 잡고 집단농장, 협동농장 등의 지도자로서 근무하였다.

그리고 류자명은 후난 농업대학에 교수로 초빙되어 근무하면서도 많은 일본인 연구자들과 교류를 한다. 그 중 류자명의 '재배 벼의 기원 및 발전'이라는 논문은 교토 대학의 저명한 농업학 교수 와타나베 타다요 渡部忠世의 논문에 인용되었다. 와타나베 타다요 교수는 1977년에 출판한 자신의 저서 '벼의 길(稻之路)'을 류자명에게 보낸다. 그는 이 책의 8장에서 류자명의 논문을 인용하였다고 밝혔다.

류자명은 한때, 항일을 주창하면서도 옳은 길을 걷고 있는 이들에게 마음을 열수 있는 풍모를 지닌 사람으로 특히, 농업 방면에서 일본인들과 교류하며 많은 성과를 이루었다. 그는 농업 연구 발전으로서 '인류의 풍요'라는 대의를 볼 수 있는 '국제우호인사'로서 혜안을 지닌 사람인 것이다.

21세기 동아시아 평화의 열쇠, 류자명

류자명은 항일 독립운동가, 아나키스트, 농업학 교수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러한 업적으로 한국, 중국, 북한의 동아시아 3국은 각각 애국장, 국기훈장, 과학 기술의 별(科技之星)이라는 상훈을 수여했다.

그는 아나키스트로서 어느 한 국가나 민족, 정파에 얽매이지 않고 진정성 있는 행보를 펼쳤다. 또한 그에게 있어 항일은 일본을 파멸하고 공격하는 것이 아닌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이 목적이었고 농업은 인류의 공동 발전을 위한 협력의 도구였다.

류자명의 인도주의, 국제주의는 현재의 동아시아의 정세에 반드시 필요하다. 그의 굵직한 현대 역사 속 발자취는 온통 화합과 소통이었다. 단지, 중국 대륙과 대만성에서 활동 하였다고 하여 '중국인이 사랑한 한국인', '한․중 연대' 등의 어느 한 부분의 상징으로만 묶어 두기에는 그가 남긴 행보가 너무 거대하다.

류자명은 투옥과 지명 수배, 항전, 환국의 실패와 대만의 2.28사건, 중국의 문화대혁명이라는 격동의 시기를 겪었다. 우리는 그러한 난세에서 그가 초지일관 지켜온 정신을 깊숙이 들여다봐야 하는 시기에 당도했다.

현재, 동아시아의 한국․북한․중국․대만․일본 간의 갈등은 극에 달하고 있다. 동아시아 평화의 열쇠로서, 해결사로서 류자명이라는 문화자산이 필요한 시점이다. 지금이라도 여러 연구자들과 관계자들이 나서서 지나간 역사의 한 인물이 아닌 '새로운 시대의 가치'로 재조명되어야 한다.

한편, 독립운동가 류자명의 정신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그가 마지막까지 중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것이 편협한 관념이 아닌, 어느 한순간이라도 고향에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대만에 거주하면서 중국 남경 호적을 취소하고 한국 여권을 받기 위해 장장 반년 간을 고생한 그는 구순이 넘어서도 사무치게 고향 '충주'를 그리워했던 것이다. 67년간 만나지 못한 '충주'의 식솔이 너무나도 보고 싶었던 것이다.

태그:#류자명, #유자명,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의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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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후난에 거주하면서 한국과 관련된 역사 문화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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