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2.27 06:01최종 업데이트 21.12.27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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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다가오는 것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의 것이다."

가수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의 위 말은 연말마다 되새김질하듯 떠오른다. 2021년에 무엇을 들었고 이는 2022년과 어떻게 이어질까, 잠시 멈추고 반추할 시간이 올해도 어김없이 왔다.  


활시위가 팽팽해지는 느낌이다. 일상으로 돌아가는가 싶더니 오미크론으로 긴장감이 다시 올라가고 있다. 노동력 부족으로 에너지 및 식품 국제 공급망이 삐걱거린다.

사회적 갈등도 두드러졌다. 경제 불평등, 공정성, 주택 문제로 전 세계가 끙끙 앓고 세대·성별 갈등도 아슬아슬하다. 국제 관계도 시원스럽지 않다. 기후 위기 해결을 위한 충분한 합의점을 찾지 못한 것은 물론, 머리를 맞대야 할 탄소 배출국 1, 2, 4위 중국, 미국, 러시아의 대립은 선명해지고 있다.
  

지난 2일(현지시간)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가 열린 영국 글래스고의 스코티시 이벤트 캠퍼스(SEC) 밖 보안 철조망 주변에서 붉은색 옷을 입은 환경단체 활동가들이 기후변화 대응을 촉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2021.11.2 ⓒ 연합뉴스

 
2021년 불안 지수는 우리가 딛고 있는 질서,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를 겨냥한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을 통한 자유 경쟁과 개인을 중시한다. 현실에서는 세 가지 축을 중심으로 작동했다. 정치 영역에서 국가는 시장 견제보다 시장을 지지 및 보조했다. 다음은 자본주의의 한 형태로 상품·노동·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원칙으로 하는 세계화를 추구했다. 마지막 사회적 가치라는 측면에서 신자유주의는 개인을 경제인(homo economicus)으로 접근했다. 이는 개인이 경쟁의 주체이고 개인을 판단하는 잣대가 경제적 가치임을 뜻한다.

신자유주의의 기원은 1930년대다. 당시는 고전 자유주의가 대공황을 기점으로 저무는 시기였다. 이때 등장한 케인스주의와 미국의 뉴딜, 영국의 사회 민주주의를 가리키는 복지 국가 모델은 1970년대까지 서구 사회, 특히 유럽의 뼈대로 기능했다.

이에 반대하는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는 비주류였지만 몽 펠르랭 소사이어티(Mont Pelerin Society, 1947)를 중심으로 서서히 목소리를 키웠다. 미국의 레이건과 영국의 대처가 이를 수용하는 1980년대를 기점으로 케인스주의를 대체, 냉전 이후 주류 질서가 되었다.

분명히 희망적이었다. 창의적인 개인들의 자유 경쟁을 보장하는 시장 경제가 경제 성장을 이끌 원동력이 되리라 믿었다. 이데올로기 갈등과 민족주의의 배타성을 낮추고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 반 인종주의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2021년, 세계가 품었던 이상은 희미해지고 있다.

고장난 시장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

신자유주의 시대를 가장 명료하게 설명하는 표현이다.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빌 클린턴 민주당 후보의 참모 제임스 카빌(James Carville)의 말로, 사회 문제의 핵심이 경제에 있다는 표현이다. 여타 사회적 불만은 경제 성장으로 해결할 수 있고, 시장 경제가 계층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낙수 효과는 궁극적으로 모든 이를 이롭게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2021년은 사뭇 다르다. '손실은 사회화되고 이익은 사유화된다(socialize loss, privatize profits)'라는 말이 힘을 얻고 있다. 시장에서의 성공은 개인의 성취로 간주되어 이윤을 사적 영역이 가져가지만, 거대 시장이 실패할 경우 사회 전체가 부담하는 현실을 가리킨다. 힘 있는 이들이 사회적 안전망을 더 갖는 이 현상을 두고 '부자들에게는 사회주의, 가난한 이들에게는 자본주의(socialism for the rich, capitalism for the poor)' 원칙이 적용된다는 1960년대 정치경제학 문구까지 소환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금융시장이다. 2008년 금융위기는 사적 영역인 금융권의 실패였지만 엄청난 공적 자금이 투입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이들이 몰락할 경우 사회적 피해가 너무 크다는 방어 논리가 있었다. 공적 자금으로 구제된 이후 이익은 다시 '뛰어난' 개인에게 돌아갔다.

'금융시장은 구제된다'는 2008년의 교훈은 코로나 상황에 적용되었다. 2020~21년 실물 경제와 중산층 이하가 치명적인 경제적 타격을 입었으나, 2008년의 교훈을 거울삼아 자금은 주식 시장으로 유입되었고 주가는 사상 최고치에 달했다. 반대로 경제 불평등 지수는 1930년대와 맞먹는 상태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Thomas L. Friedman)은 이 비정상적 상황을 "코끼리가 날고 있다"(주식과 실물경제의 격차를 뜻하는 말, 상위 10%를 뜻하기도 한다)라고 표현한다. 미국 상위 10%가 전체 주식의 80%를 가지고 있는 현 상황에서 젊은 세대가 자본주의에 등을 돌리고 사회주의를 선호하는 현상은 전혀 놀랍지 않다고 진단한다. 코끼리가 얼마나 날 수 있을까 라고 묻는다.

2021년, 하늘을 나는 코끼리에 대한 반발, 반시장적 움직임이 곳곳에서 보였다. 5월, 영국 웨일스 의회 과반을 확보한 노동당은 "용감한 생각이 필요할 때"라며 스코틀랜드에 이어 기본소득제를 검토하겠다고 했다.
 

2021년 5월 23일 베를린에서 열린 미친 임대료 항의 및 부동산 회사 '도이체보넨' 몰수 요구 시위 ⓒ 이유진


9월, 독일 베를린 시민들은 부동산 기업들의 주택 소유권을 3천 채로 제한하고 그 이상은 모두 국유화할 것을 투표로 통과시켰다. 3천 채도 상당한 숫자지만 베를린 최대 부동산 회사는 10만 채 이상의 주택을 소유하고 있다. 이 골리앗 회사는 1990년대 베를린 시가 임대주택을 민영화할 때 싼 가격으로 주택을 매입한 후 몸집을 불렸다.

11월과 12월, 유럽에 비해 전통적으로 노조가 약한 미국이지만 스타벅스 노조가 조직되었다는 소식도 들린다.

국가도 시장 보조에서 시장 규제로 발을 떼고 있다. 다국적 기업 세금을 최하 15%로 정한 G7안은 G20에서도 확정되었다. 영국은 현재 보수당이 집권하고 있는데도 법인세율을 25%까지 올렸다. 미국 바이든 대통령도 법인세를 28%까지 올리겠다며 '노동자'를 위하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아직 경제 정책 방향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12월에 취임한 올라프 숄츠(Olaf Scholz) 독일 총리는 다국적 기업 세금 개혁을 이끌어낸 핵심 인물이다.

흔들리는 세계화

세계화의 위태로움은 지난 6월 G7에서 감지되었다. 미국과 영국은 신대서양 선언으로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명문화하며, 국제질서가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의 대결로 재편될 것임을 예고했다. 당시 EU는 확답을 하지 않았지만 가치는 공유했다.

세계화가 등장한 1990년대와 대조적이다. 당시 세계는 중국의 자본주의 수용이 정치적 민주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자신감으로 신자유주의 경제 논리에 맞게 싼 노동력을 찾아 중국으로 몰려들었다. 그 결과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 되었다.

러시아도 마찬가지로 유럽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고 시장 경제로 방향을 틀었다. 보리스 옐친 대통령 재임 기간인 1997년, G7은 러시아를 포함하는 G8으로 변경했다.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크림 반도를 점령한 2014년까지 러시아는 G8 지위를 유지했다.

2021년 하반기 세계화는 뒤집혔다. G7에서 예고한 대로 바이든은 9월 영국·미국·호주의 오커스(AUKUS) 동맹을 출범시키며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바이든은 11월에 대만과 인권문제로 시진핑과 통화했으나 의견 차이 확인으로 끝났고, 미국은 베이징 동계 올림픽 외교적 보이콧을 선언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5일(현지시간)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와 화상 공동 기자회견을 통해 3국의 새로운 안보 파트너십인 '오커스'(AUKUS) 발족을 발표하고 있다. 오커스는 이들 세 국가명을 딴 이름이다. 2021.9.15 ⓒ 연합뉴스

 
11월과 12월을 기점으로 러시아와의 대립 전선도 선명해졌다. 러시아군을 우크라이나 쪽으로 이동시키는 푸틴의 도발에 12월 초 바이든과 푸틴이 통화를 했지만 소득 없이 끝났다. 12월 중순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을 금지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등 동유럽에 주둔한 NATO 병력을 1997년 수준으로 철수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예전 소비에트 연방 지역의 주도권을 되찾겠다는 의도다.    

EU는 사정이 복잡하다. G7에서는 경제와 인권 문제를 분리하며 미-중 대립 구도에 말려들지 않으려 했다. 현재 이탈리아와 헝가리 등 중국 경제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과 오커스에서 '뒤통수' 맞은 프랑스는 미국의 올림픽 보이콧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했다. 문제는 러시아다. 8월 아프가니스탄 철수 사태 여파로 EU군 창설을 만지작거리고 있지만, 당장 푸틴이 군사 행동을 취할 경우 미국이 주도하는 NATO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다. EU가 경제 제재 카드를 내놓고 있지만 러시아는 에너지(가스) 차단이라는 보복 카드가 있다.  

<오징어게임> 일남의 불행

12월 14일 영국 하원은 보수당 내각의 백신 확인서 사용안을 통과시켰다. 놀랍게도 야당인 노동당의 지지로 가능했다. 무려 99명의 보수당 일반 의원이 반대표를 던졌고 10여 명 이상은 불출석했다.

보수당 총리가 내놓은 안을 노동당이 지지하고 보수당이 반발한 이 사건은 철학적 차이에서 기인한다. 백신 확인서는 공공성을 중시하는 노동당과 일맥상통하고 개인성을 중시하는 보수당과 어긋난다. 보수당에 백신 확인서는 국가 권력이 개인의 자유를 억제하는, 궁극적으로 독재로 가는 관문이다. 

이는 1940년대 영국과 묘하게 겹친다. 영국이 사회민주주의로 거의 기울어진 시기로, 경제학자 윌리엄 베버리지(William Beveridge)는 1942년 사회 보장과 완전 고용을 주장하는 정부 보고서를 발표해 이 흐름에 쐐기를 박았다. 이에 대한 반박이 신자유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농노로의 길>(Road to serfdom, 1944)이다. 그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포기는 독재와 개인의 예속으로 이어질 것이라 주장했다.  

신자유주의자 하이에크에게 개인이란 선택의 자유가 있고 판단에 대한 위험도 책임지는 존재이다. 사회 속 인간관계의 기본은 경쟁이고 경쟁을 막는 것은 개인의 자유 실현을 방해하는 것이 된다. 이에 충실했던 이가 1980년대 대처 영국 총리로, 개인의 자유 경쟁을 막는 요소들을 제거했다. 국영기업을 민영화했고 세금과 정부의 규제는 최소화하고 시장과 노동 시장의 유연성을 막는 노조를 약화시켰다. 
  

<오징어게임>의 기훈과 일남(오른쪽) ⓒ 넷플릭스

 
장애물이 상당히 없어진 2021년, 무한 경쟁에서의 승패와 관계없이 더 이상 행복하지 않은 개인이 늘어나고 있다. 영화 <오징어 게임>은 이 부분을 정확히 지적한다.

게임을 기획한 일남은 신자유주의에 완벽히 적응한 인간형으로 '돈을 굴려' 성공했다. 하지만 그는 그가 추구한 '재미'의 양면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에게 재미란 경쟁이다. 이는 인간관계의 본질을 경쟁으로 바라보는 신자유주의 개인관이다. 이 관념에 막혀 그는 그가 "친구들과 무엇을 해도 재미있었"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유가 파편화된 개인이 갖는 외로움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죽는 순간까지 "아직도 사람을 믿나?"라며 인간과의 유대보다는 오로지 개인의 생존력을 믿는 것은 그의 불행이다.

게임 참가자들은 신자유주의에서 실패한 개인들이다. 성공에 거의 도달했던 자부터 애초부터 '가능성이 없었던' 자들까지 망라되어 있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이들은 자유에 비례해 위험도도 같이 올라가는 신자유주의 경쟁 법칙을 정확히 인지한다. 그리고 자유 의지로 참가한다. 이기면 456억 원, 위험도는 죽음이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두 사람에게서 거의 다 왔다는 안도감이나 살아남았다는 성취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악에 받치거나 두려운 모습이다.

새로 올라오는 것들

일남의 대사 "아직도 사람을 믿나"를 다르게 표현하면 "사회가 있는가"이다. 이것이 2021년의 주제라면, 2022년은 "있다면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필요하지 않다면 현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인가?"라고 물을 시점이다.  
  
위의 질문과 관련해 2021년에 새롭게 올라오는 것들도 보였다. 하나는 그린 뉴딜이다.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 극복책을 기후 위기에 놓인 21세기에 맞게 응용한 정책이다. 미국 바이든의 '더 나은 재건'(Build Back Better)과 영국의 '그린 산업 혁명을 위한 10가지 계획'이 가장 구체화된 상태다. 독일의 경우 녹색당이 연정에 참여한 만큼 빠르게 치고 나갈 가능성이 크다. EU 역시 유럽식 그린 뉴딜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다른 하나는 문화 전쟁(culture war)이다. 정책이 아닌 문화적 가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전쟁이다. 합의에 이르기 어려운 가치의 영역, 즉 낙태권·역사·인종·종교 등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뜻한다. 계층 갈등이 심각한 미국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으로, 학계는 파시즘 초기 현상, 민주주의의 위기란 표현을 꺼내기 시작했다. 
  

왼쪽부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 ⓒ 오마이뉴스

 
역사는 예측 불가능하다. 각 사회가 매순간 하나씩 선택해 가는 과정이다. 한국의 대선은 몇 십 년 만에 다가온 전환기와 맞물려 있다. 한국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바보야, 문제는 OO이야."

각자 OO을 채워 넣어 보면 어떨까. 먼지를 털어내고 잔가지도 쳐내 핵심을 바라보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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