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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망한 23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신촌장례식장에 빈소가 마련돼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망한 23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신촌장례식장에 빈소가 마련돼 있다.
ⓒ 연합뉴스 [공동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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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23일 아침, 전직 대통령을 지냈으며 12.12 군사 반란과 광주 학살의 주범인 전두환씨가 사망했다. 올해로 향년 90세다. 군사 반란의 동조자인 노태우씨가 세상을 떠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다. 동시에 그가 1988년 백담사로 '유배'를 떠난 날로부터 정확히 33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 모두 조문을 하지 않기로 했다. 정의당 심상정 대선후보는 '성찰없는 죽음은 유죄'라며 날을 세웠다. 더불어민주당 공식 소셜 네트워크 계정에서는 '고인의 명복을 빌며 애도를 표한다'는 표현을 썼다가 누리꾼들의 비난을 받고 이 표현을 철회했다. 이어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민주당은 조화, 조문, 국가장 모두 불가'라며 당의 방침을 확실히 했다. 전두환씨의 고향인 경남 합천에서도 분향소를 설치할 계획이 없다고 한다. 장세동 등 하나회의 일원과 같은 공범 외에는 누구도 추모하지 않는 쓸쓸한 죽음이다.

드라마, 인터넷, 그리고 영화

1993년생인 나는 1931년생인 전두환씨의 통치 기간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전두환씨는 오랫동안 '나쁜 사람'의 상징 같은 것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얕게나마 정치나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MBC 드라마< 제 5공화국 >에서 명배우 이덕화가 연기한 전두환 중장의 모습이 나에게는 '첫 번째 전두환'이었다. 1995년 내란 혐의 재판 과정에서 화제가 된 발언인 "왜 나만 갖고 그래"는 드라마 대사로 부활했다. 그때 어렴풋이 경험한 전두환은, 공포의 독재자라기보다는 패러디의 대상 정도로 여겨질 뿐이었다.

그리고 우연히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광주에 대한 글이 올라온 것을 보았다. 학교에서 광주의 역사를 배우기도 전,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학살 피해자들의 모습을 먼저 접하게 된 것이다.

참혹하게 훼손된 시신이 이어진 모습을 보고 밤을 설칠 만큼 충격을 받았다. 아마 80년대 대학가 대자보에서 광주의 진실을 알게 된 학생들도, 경북 김천에서 목사와 시민운동가로 활동하시다가 광주의 진실이 담긴 비디오를 접한 나의 외할아버지도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두 번째로 따라온 것은 분노였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에게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을까?', '나라를 지키라고 있는 군인이 왜 시민을 죽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 때는 만화가 강풀 작가의 작품 <26년>을 흥미롭게 보았다. 훗날 <29년>이라는 이름으로 영화화된 이 작품은, 5.18 광주의 자손들이 학살의 총책임자에게 사적 복수를 행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만화 속에서 '그 사람'으로 표현된 전씨는 계엄군의 죄책감을 품고 살아온 주인공 김갑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그날 발포가 되었는지 어쨌는지도 몰랐어."

그는 기회를 영영 잃어버렸다

이것은 만화적 과장이 아니라 현실 속의 그와 정확히 맞닿아 있었다. 그는 2016년 6월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사실 광주사태하고 나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다"며 학살의 책임을 부정했고,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거짓말쟁이라고 불렀다. 또, 같은 인터뷰에서 "군인으로서 나라가 어렵고, 대통령이 안 될 수가 없어서 했을 뿐"이라며 군사 반란을 합리화하기도 했다. 2년 전 골프장에서 임한솔 당시 정의당 부대표에게 1000억 원가량의 추징금 납부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는 "네가 대신 내주라"라고 답했다.

그 어떤 대선 주자도 그의 빈소를 찾지 않는다는 사실이 보여주듯, 전씨에 대한 역사의 판단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 그러나 당사자인 전씨는 언제나 이 역사의 무게 앞에서 비겁하게 도망칠 뿐이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만회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린 채 세상을 떠났다. 어린 시절, '나쁜 사람'으로 기억되었던 그는 앞으로도 반면교사의 표본으로 기록될 것이다. 

나의 어머니는 80년대 당시 모든 언론과 방송사에서 광주 민주화운동을 너무나 당연히 '광주 사태'라고 부르던 시절을 기억한다. 1980년 5월, 불순분자와 폭동, 용공분자라는 이름으로 고립되었던 광주는 그 이후 수십 년 동안 망국적인 지역감정의 한 가운데에서 고립되었다. 전두환은 이 일그러진 야만의 역사를 상징하는 이름이다.

미국 뉴욕 타임스는 전씨의 죽음을 '전 군부 독재자(Ex-Military Dictator)의 죽음'이라고 보도했다. 천수를 누린 그의 죽음보다 안타까운 일은 많이 있다. 학살 당사자의 죽음으로 인해 사과받을 기회를 영영 잃어버린 광주의 영령, '사회정화'라는 이름 아래 벌어진 국가폭력으로 고통받았던 삼청교육대, 형제복지원의 피해자들이 있다. 군부 독재자의 죽음을 접한 오늘, 나는 그들의 존재를 조금이라도 더 떠올리려고 한다.

때로는 추모 자체가 가해가 된다. 2021년의 우리가 누리는 정치적 사회적 민주주의는 광주의 피로부터 피어난 것이며, 피해자들의 고통도 현재진행형이다. 우리에게는 군부 독재자를 추모할 자격이 없다.

태그:#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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