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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대통령 노태우씨가 26일 사망했다. 사진은 1990년 1월 당시 김영삼 민주당 총재(오른쪽), 김종필 공화당 총재(왼쪽)와 청와대에서 긴급 3자 회동을 갖고 민정, 민주, 공화 3당을 주축으로 신당 창당에 합의했음을 발표한 뒤 청와대를 나서는 모습.
▲ 3당 합당 발표한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전직 대통령 노태우씨가 26일 사망했다. 사진은 1990년 1월 당시 김영삼 민주당 총재(오른쪽), 김종필 공화당 총재(왼쪽)와 청와대에서 긴급 3자 회동을 갖고 민정, 민주, 공화 3당을 주축으로 신당 창당에 합의했음을 발표한 뒤 청와대를 나서는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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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당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5공청산과 악법개폐투쟁을 전개해나가자 1990년 초 돌연 노태우(민정), 김영삼(민주), 김종필(공화)이 3당합당을 선언, 여소야대 국회가 거여소야의 정국으로 바꾸었다.

인위적인 정계개편을 반대해 온 평민당은 제1야당에서 왜소야당으로 전락했다. 제49호에서 "인위적 여대야소 획책은 쿠데타적 도전"이라고 3당야합을 비판했다. 이상신 고대 교수의 "보수연합 정계개편, 반역사적 야합"이란 기고문도 실었다.

1990년 1월 24일에는 특보를 제작하여 3당야합을 "선거제 국민주권 유린한 국헌문란정변, 인위적 여대야소 획책한 반민주적 반란, 지역감정 심화조장한 반민족적인 폭력, 유신ㆍ5공핵심 사이비야당 제2유신쿠데타"라고 규탄했다.

이어서 "내각제개헌 필요하다면 노태우씨는 즉각 물러나라, 야당간판 팔아넘긴 김영삼씨는 국민앞에 사죄하라, 쿠데타와 정보정치 장본인 김종필씨는 국민 우롱말라."는 제목을 달아 이들의 야합을 신랄하게 규탄했다.
야당 총재시절의 이기택
▲ 야당 총재시절의 이기택 야당 총재시절의 이기택
ⓒ 이광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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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신문>은 다시 특보를 발행하여 "양심 민주세력이냐, 보수위장 독재냐!!" - 맘모스적 반민주야합 민주국민연대로 저지하자."는 김총재의 긴급 기자회견 내용을 실었다. 김총재의 경남도지부대회에서 행한 연설 요지도 게재했다. 또 "제2의 유신쿠데타를 막아내자"는 대국민 호소문도 실었다.

평민당은 3당 야합의 정국을 돌파하고자 지자제실시, 민생문제 해결 등의 현안을 내걸고 평화적 1천만 명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평민신문>은 제52호부터 이를 크게 보도하고, 지구당별 국정보고대회에 호외를 발행하여 3당 야합 내막과 민생해결 방안 등을 집중적으로 제시했다. 

<평민신문>은 7월 14일 국군조직법ㆍ방송관계법ㆍ추경예산ㆍ5공특위 해체를 위한 법안 등을 노태우정권이 국회에서 날치기로 처리하자 "노태우ㆍ김영삼ㆍ김종필씨에 묻는다 - 날치기ㆍ변칙이 신사고인가"라고 따졌다. 이들은 그동안 3당 합당을 '신사고 정치'라고 호도해 왔었다. 

국회 문공위의 방송법 날치기에 항의하여 민자당 신하철 의원의 폭력으로 입원 중인 조홍규 의원의 사진을 싣고, 노정권의 방송장악음모 분쇄투쟁을 선언했다.
 
1992년 14대 총선 당시 통합야당이었던 민주당의 '위탁관리자 이기택' '실질적 오너 김대중'과 함께 찍은 김민석의 선거 포스터
 1992년 14대 총선 당시 통합야당이었던 민주당의 "위탁관리자 이기택" "실질적 오너 김대중"과 함께 찍은 김민석의 선거 포스터
ⓒ 김민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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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정권의 반민주적 행태에 야권통합 움직임이 가시화되었다. 통일민주당 중에서 김영삼의 3당 합당에 반대하고 남은 '꼬마민주당'의 이기택 등과 대여 공동투쟁이 전격 합의되었다. 

김대중과 이기택은 재야대표와 3자회담을 갖고 수권야당을 위한 통합을 결행하기로 합의했다. 이와 함께 대규모 옥외 집회를 갖기로 했다.

<평민신문>은 7월 19일자 특보를 발행, "날치기 정권 보라매공원서 심판하자 - 겨레여! 마침내 평민ㆍ민주ㆍ재야가 한데 뭉쳤습니다!" 라는 표제 아래 연사 김대중ㆍ이기택ㆍ김관석의 사진을 실었다. '민자당 독재규탄 의원직사퇴선언 및 총선촉구결의대회'에 많은 시민의 참여를 호소하는 특별당보였다.

통합을 위해 평민당은 수임기구를 구성하는 임시전당대회를 열었다. <평민신문> 제51호는 '범민주통합수권정당 건설에 대한 특별결의문'을 비롯, '국민에게 보내는 메시지', '결의문' 등을 실었다. 2면과 3면은 보라매공원의 성공적인 군중집회의 사진과 평민당 의원들이 여당의 날치기 사태에 항의하여 의원직을 사퇴하는 내용, 평민당 3년의 업적과 민자당정권의 죄악상을 대비ㆍ분석했다. 

김총재는 노태우 정권의 날치기와 내각제개헌음모 중단을 요구하며 13일 동안 단식에 돌입했다. 소속의원, 지구당위원장, 사무처 직원들도 동조 단식에 들어가 평민당중앙당은 종교사원처럼 엄숙한, 그러나 처절한 진지가 되었다. 

<평민신문>> 제60호는 이런 사정을 자세히 싣고, 김총재가 단식 후 "내각제 관련 어떤 협상도 배제한다"는 첫 기자회견 내용을 게재했다.

전남 함평ㆍ영광의 보궐선거가 실시되었다. 평민당은 '지역타파'의 상징으로 영남출신 이수인 교수를 공천했다. <평민신문>은 특보를 발행하여 "김대중과 이수인에게 힘을 주어 영호남 화해 물꼬트자"는 제호의 기사를 실었다. 이후보는 압도적으로 당선되었다.

평민당의 줄기찬 투쟁으로 정부가 지자제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5.16 쿠데타로 사라진 지자제가 우선 기초의회 의원부터 실시하게 되었다.

<평민신문>은 제62호에서 지자체 회복과 내각제 분쇄의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30년만의 지자제 위대한 민주혁명"이라고 선전했다. 박권상ㆍ구종서ㆍ조창현 등 명사들의 지자제 실시 의의에 대한 기고문을 실었다. 이즈음 수서지구 택지특혜분양사건이 터졌다. 평민당은 이 사건이 청와대와 민자당이 거액의 정치자금을 마련키 위해 조직적으로 저지른 권력형 비리로 보고 당력을 동원해 진상규명에 나섰다.

<평민신문>은 제64호에서 노태우 대통령이 해명하고 사과할 것을 요구하는 특집을 꾸몄다. 이어서 제65호는 특보를 제작하여 '수서진실'을 밝히라고 촉구했다.

지자제 실시를 맞아 <평민신문>은 민자당의 날치기와 노정권의 각종 비리를 들어 국민의 힘으로 풀뿌리 민주주의를 살리자는 내용의 지면을 만들었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평화민주당 연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평화민주당, #평화민주당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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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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