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은평구 구파발역의 오른편, 불광동과 북한산에서 발원한 창릉천 사이에 위치한 이말산(莉茉山)은 해발 높이가 겨우 133미터에 불과한 작은 동산이다. 이 일대는 도성의 관문이기에 조선시대부터 파발역참이 들어서서 중요한 문서를 전달했으며, 근현대에 이르러서는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들어선 군사시설이 곳곳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은평구에 따르면 이말산은 말리화(재스민)에서 따 온 이름이라고 한다. 전통 있는 짜장면 집에 가면 보리차 같은 찻물을 따라 주는데 이것이 바로 말리화차다. 재스민 꽃을 잎차에 넣은 것으로서 맛과 향이 무척이나 좋다.

이번 산책 경로는 구파발역에서 시작하여 이말산을 둘러보고 은평한옥마을로 나와 진관사에 이르는 길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산책 코스를 정리하면 아래 그림과 같다. 인공폭포 옆 계단을 오르면 주민들을 위한 각종 운동기구와 벤치, 정자, 야자 매트가 길을 안내한다. 폐포 속으로 피톤치드를 한껏 들이마시며 걸음을 내딛는다.
 
구파발역에서 시작하여 은평한옥마을로 나와 진관사까지 가는 길.
▲ 이말산에서 진관사까지 산책 루트 구파발역에서 시작하여 은평한옥마을로 나와 진관사까지 가는 길.
ⓒ 이상헌

관련사진보기

 
이말산 일대는 서울의 외곽 지역이었기에 도봉구 초안산 비석골처럼 내관 및 궁녀, 중인과 사대부의 묘역이 흩어져 있다. 확인된 무덤과 석물 등이 2천여 기를 넘었다고 하는데 도굴과 훼손 때문에 지금은 몇몇 자취만 남아 있을 뿐이다.

조선의 헌법인 경국대전에는 '성저십리 금장 금송(城底十里 禁葬 禁松)'이란 규정이 있다. 도성 십리 안에는 매장과 벌목을 금한다는 뜻이다. 요즘 말로 치자면 개발제한구역이므로 도읍의 주변부에는 묘역이 자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으로 은평구에서 궁녀를 주제로 한 여성테마길을 만들었다. 이말산에는 내명부 여인으로서 정1품 후궁에 오른 숙빈(영조의 어머니) 최씨의 부모(최효원, 남양 홍씨) 묘가 있다. 지금까지 비문을 갖춘 궁녀의 묘는 3기가 발견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여기에 있었다. 바로 상궁 임씨의 비석이며 인조-효종-현종-숙종까지 네 명의 임금을 모셨다.
 
▲ 왕을 보실핀 궁녀길에서 왕을 구한 도량까지 #25
ⓒ 이상헌

관련영상보기

 
숙종은 임상궁을 이모라 불렀는데 명선, 명혜, 명안 공주까지 4남매를 보살폈기 때문이다. 사후에 비문을 세웠는데 원본은 현재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초안산에는 박상궁(선조 1599년)의 묘비가 남아 있다. 참고로 글쓴이의 연재 8화(배롱나무와 벚꽃이 화사한 북서울꿈의숲)에 초안산 분묘군에 대해 기술되어 있다.

인경왕후가 요절한 뒤 숙종은 인현왕후를 계비로 맞이하지만 후사를 얻지 못했다. 이때 나인이었던 장옥정(장희빈)을 총애하여 훗날의 경종을 얻는다. 숙종은 장희빈을 왕비에 앉히려고 인현왕후를 폐비 시키고 궁 밖으로 내쫓는다. 그러나 국모로서의 품격이 부족한 장희빈에게서 마음이 떠난 숙종은 인현왕후의 시녀였던 숙빈 최씨로부터 아들을 얻으니 그가 경종의 뒤를 이은 영조다.

복잡다단한 정치에 의해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장희빈은 궁녀로 격하되어 사약을 받고 죽는다. 시간이 흘러 인현왕후가 병사하고 두 번째 계비인 인원왕후를 얻었으나 역시 후사는 없었다. 결국 경종이 즉위하나 4년 후에 세상을 떠나고 영조가 등극하여 탕평책을 펼친다. 

고려의 기반을 다진 현종과 인헌공 강감찬

휘휘 둘러 하나고 옆으로 나와 길을 건너면 은평한옥마을이 나온다. 2012년부터 현대식 한옥마을로 조성되기 시작하여 현재에도 건물이 세워지고 있다. 최근에 조성되었기에 옛스러운 맛은 부족하지만 나름대로 구색을 갖춰서 둘러보는 재미가 있다. 한옥마을 한켠에 은평역사한옥박물관이 있으니 시간이 허락하면 들어갈 볼 일이다.
 
전통 한옥이 현대식 느낌을 가미하여 재탄생했다.
▲ 은평한옥마을 전통 한옥이 현대식 느낌을 가미하여 재탄생했다.
ⓒ 이상헌

관련사진보기

 
길을 따라 조금 걷다보면 진관사에 다다른다. 신라 때 원효대사가 세운 사찰로서 당시 이름은 신혈사였다. 고려 현종이 즉위하기 전에 승려로 머물렀는데 암살 기도로 부터 자신을 지켜준 진관(津寬)대사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이곳에 절을 세우고 진관사라 칭했다. 조선 세조 때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성종에 이르러 중건하였으며 한국전쟁 때 또다시 불탔으나 1964년에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고려사를 잠깐 들여다 보자. 당시에는 혈통을 중시하던 때라 친인척 간에 혼인으로 맺어지는 일이 지극히 당연했다. 경종의 3번째 왕비인 헌애왕후(천추태후)에게서 7대 임금이 되는 목종이 태어난다. 천추태후의 자매이자 4번째 왕비인 헌정왕후는, 경종 사후에 숙부였던 왕욱(사후 안종으로 추대)과의 사이에서 대량원군(8대 현종)을 얻는다.
 
비구니의 수행 도량 진관사 경내를 걷고 있는 시민들.
▲ 장독대가 있는 진관사 풍경 비구니의 수행 도량 진관사 경내를 걷고 있는 시민들.
ⓒ 이상헌

관련사진보기

 
훗날의 목종을 대신하여, 경종의 사촌 동생이며 매제이자 처남인 성종이 6대 임금으로 즉위한다. 성종은 서희 장군을 파견하여 요나라(거란)와의 담판을 이끌어내니 우리가 역사 교과서에서 배운 강동 6주의 탈환이다.

노년에 몸져누운 성종은 군왕의 자리를 목종에게 넘겨주었으나 어머니 헌애왕후가 섭정하였다. 목종에게 후사가 없었기에 헌애왕후는 김치양과 통정하여 얻은 배다른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고 한다.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2층 누각 아래에 형형색색 연등이 피었다.
▲ 진관사 홍제루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2층 누각 아래에 형형색색 연등이 피었다.
ⓒ 이상헌

관련사진보기

 
이때 걸림돌이었던 현종을 중으로 만들고 신혈사에 머물게 하면서 암살을 시도한다. 때를 맞춰 정변이 일어나 목종은 폐위되며 현종이 주상의 자리에 오르고, 거란과의 전쟁에서 강감찬을 중용하여 귀주대첩(요나라 10만 대군을 섬멸)을 승리로 이끈다. 

인헌공 강감찬의 활약과 현종의 치세로 고려는 기반이 더욱 튼튼해지고 요나라-금나라-송나라 간의 삼국체제가 동아시아에 펼쳐진다. 참고로 강감찬 장군에 대해서는 연재 11화(낙성대 빌라촌 사이, 강감찬 장군의 생가터가 있다)에서 소개했다.
 
진관사 앞을 흐르는 계곡물이 청량하다.
▲ 진관사 계곡 진관사 앞을 흐르는 계곡물이 청량하다.
ⓒ 이상헌

관련사진보기

 
진관사 옆으로 계곡물이 시원스럽게 흘러내려간다. 길을 따라 산을 오르면 이전 기사에서 소개했던 관봉-비봉-승가사가 나온다. 산길이 제법 험하므로 산책코스로는 추천하지 않는다. 다만 계곡 초입의 자그마한 전망대까지는 무리없이 갈 수 있다. 물놀이는 할 수 없지만 움푹 파인 암릉을 따라 시원한 계곡물이 흘러 시선을 잡아끈다.

태그:#진관사, #이말산, #상궁 임씨, #강감찬, #서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