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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사리의 박경리 문학관. 단층으로 기와 목구조다. 2016년 5월에 문을 열었지만, 붐비는 최참판댁에 비기면 한적하기 짝이 없다.
 평사리의 박경리 문학관. 단층으로 기와 목구조다. 2016년 5월에 문을 열었지만, 붐비는 최참판댁에 비기면 한적하기 짝이 없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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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기사] 그냥 한번 와봤는데... 진주 시민들이 진심 부럽습니다

피아골 단풍을 만난 뒤 진주로 가는 길에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 들렀다. 알아듣기 좋게 '최참판댁'에 간다고 했지만, 박경리 문학관에 간다고 말해야 옳다. 문을 연 순서로 치면 문학관이 늦지만, 최참판댁은 실재하는 집안이 아니라 <토지>를 바탕으로 짜인 허구의 집이고, 그 작가가 박경리 선생이니 말이다. 

평사리, 박경리의 거대 서사에 편입된 역사적 공간

그간 남도를 다녀오는 길에는 늘 평사리(平沙里)에 들르곤 했다. 경상도에서 남도를 오가는 길목에 하동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다, 길목이기 때문이 아니라, 거기에 평사리가 있어서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악양면의 한 동리에 불과하지만, 평사리는 작가 박경리(1926~2008)의 거대 서사에 호명되면서 이 땅의 근현대사 속으로 편입된 역사적 공간인 까닭이다. 

원고지 4만여 장, 등장인물만 600여 명에 이르는 5부작 장편소설 <토지(土地)>는 1897년 한가위를 맞은 평사리의 모습을 그리며 대서사의 막을 올린다. 이후 반세기 동안 일제의 식민지가 된 조선과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국인의 장대한 삶의 파노라마를 다룬 이 대하소설은 1945년 8월 15일 최참판댁 별당에서 해방 소식을 들은 서희가 자리에 주저앉으면서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최참판댁 별당. 이 별당의 주인이었던 서희의 어머니는 시동생과 사랑에 빠져 도주했고, 뒷날 서희는 여기서 해방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2019년 10월.
 최참판댁 별당. 이 별당의 주인이었던 서희의 어머니는 시동생과 사랑에 빠져 도주했고, 뒷날 서희는 여기서 해방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2019년 10월.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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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토지>는 1969년 1부를 쓰기 시작했을 때 마흔둘이었던 작가가 예순일곱이 된 1994년, 25년 만에 그 위대한 여정을 마치고 완간됐다. 한민족의 '원형'인 토지를 중심으로 교직(交織)한 이 위대한 서사는 한국 현대문학의 가장 뛰어난 성취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가 선생의 <토지>를 처음 읽은 것은 고교 시절, 형이 읽고 있던 <문학사상>에 연재 중인 제1부에서였다. 그때 토막글로 읽은 <토지>의 감동이 이후 한 부씩 출판될 때마다 이 책을 사 모은 힘이 되었다. 격동의 한국 근대사를 살아간 사람들의 삶의 흔적들을 통해 내가 이해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쉼 없는 모색과 투쟁이었고, 한국인의 삶의 원형을 바라보는 이 위대한 작가의 따뜻하면서도 냉정한 시선이었다. 

한국 현대문학의 위대한 성취, 네 번 완독한 <토지>

나는 <토지>를 통틀어 네 번쯤 완독했고, 부별로 읽은 것까지 포함하면 여섯 번쯤 읽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미처 생각지 못한 새로운 이해와 깨달음을 새록새록 되새기는 '다시 읽기'의 시간은 행복했다. 내가 토지의 주요 인물들의 계보를 막히지 않고 설명할 수 있는 정도가 된 것은 그 서사에 흔연히 이입하였기 때문이었다. 

진주성 이야기에서 썼듯, 처음 평사리를 찾은 것은 1988년이다. 고교생 제자 둘을 데리고, 버스를 갈아타 가면서 평사리에 내리니 마을 앞에는 나지막한 농막 하나가 서 있을 뿐이었다. 거기 앉아 동네 사람들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들은 <토지>도 박경리도 잘 몰랐고 나는 내 흥에 겨워 마을을 찾았다는 걸 눈치채고 평사리를 떠났었다. 

내가 다시 평사리를 찾은 것은 2007년 1월, 아내와 보길도를 다녀오는 길에서였다. 이미 평사리는 '최참판댁'으로 바뀌어 있었는데, 나는 마을을 한 바퀴 돌면서 마을 사람들의 삶과 운명을 하나씩 복기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오마이뉴스>에 그 답사기를 썼다(관련 기사 : 평사리, 그 '허구와 현실의 경계'에 서다).

그리고 이태 전 10월에 이어 이번에 다시 평사리를 찾았으니 네 번째 방문이다. 2019년에 평사리를 찾았을 땐 2016년 5월에 문을 연 박경리 문학관을 반갑게 둘러보았었다. 해마다 수십만 명이 넘게 찾는 관광지가 되면서 최참판댁은 <토지>와 무관한, 거기 있음직한 마을이 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최참판댁. 오른쪽 끝 솟을대문으로 들어서면 오른쪽은 고방, 왼쪽은 하인들의 거처인 행랑채다.
 최참판댁. 오른쪽 끝 솟을대문으로 들어서면 오른쪽은 고방, 왼쪽은 하인들의 거처인 행랑채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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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참판댁의 행랑채(솟을대문 오른쪽). <토지>는 최참판댁이 대표하는 양반, 그리고 하인과 소작인들 같은 양인 등 다른 신분의 인물들을 축으로 진행된다. 2019년 10월.
 최참판댁의 행랑채(솟을대문 오른쪽). <토지>는 최참판댁이 대표하는 양반, 그리고 하인과 소작인들 같은 양인 등 다른 신분의 인물들을 축으로 진행된다. 2019년 10월.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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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참판댁 사랑채. 행랑채가 하인들 등 피지배계급의 거처라면, 사랑채는 상전들, 남자들의 공간이다. 2019년 10월.
 최참판댁 사랑채. 행랑채가 하인들 등 피지배계급의 거처라면, 사랑채는 상전들, 남자들의 공간이다. 2019년 10월.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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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에서 서사적 생명을 얻고 있는 최참판댁

비록 소설 문학을 바탕으로 하지만, 최참판댁이 소설과 무관한 서사적 생명력을 갖추는 걸 고까워할 일만은 아니다. 그것은 문학이 창조한 허구가 현실의 경계를 허물고 사람들의 삶과 일상으로 녹아든 흔치 않은 사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사리와 최참판댁은 작가 박경리가 창조한 <토지>를 떠나서 생각하기 어렵다. 한 작가가 창조한 서사가 마을을 만들고, 거기 살았던 사람들의 운명과 삶을 독자들의 기억 속에서 재구성하게 하는 '문학의 힘'을 부정할 순 없기 때문이다. 

통영 출신으로 진주에서 여학교를 나와 서울과 원주에서 살았던 작가 박경리는 평사리를 자기 작품의 무대로 삼았다. 그는 한 번도 평사리를 찾지 않고도 거기서 전개된 파란 많은 삶과 사건을 세밀화처럼 그려냈다. 작가는 평사리와 간도의 이미지를 축소한 지도만 보고 완벽하게 이 마을과 간도를 그려냈는데 탈고 후 현지에 가보고 상상력과 현실이 닮은 부분이 많아 놀랐다고 했다.     

생전에 작가는 평사리를 무대로 선택한 것은 세 가지 이유에서였다고 밝혔다. 무대는 만석지기를 주인공으로 설정해 드넓은 평야가 있으며, 지리산이 안고 있는 우리 민족의 비극적인 역사가 뒷받침이 되는 곳이어야 했다. 그리고 주인공들이 쓸 토속적인 언어, 경상도 방언을 쓰고 싶어서 섬진강을 낀 경남의 끝자락, 평사리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작가는 <토지>를 완간한 지 7년 뒤에 평사리를 찾았고, 2004년 평사리문학관 개관식에서 최참판댁의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바라보며 자기 작품으로 말미암아 지리산이 훼손된 것 같아 가슴이 아프고, 지리산에 미안하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그것은 생전의 인터뷰에서 한 "모든 생명을 거둬들이는 모신(母神)과도 같은 지리산의 포용력" 덕분에 글쓰기를 마칠 수 있었다는 회고와 이어지는 것이었다. 
 
<토지>의 서막이 된 만추의 평사리를 배경으로 집필을 시작했던 사십 대 초반의 작가를 재현한 박경리 초상(이제, 2020)
 <토지>의 서막이 된 만추의 평사리를 배경으로 집필을 시작했던 사십 대 초반의 작가를 재현한 박경리 초상(이제, 2020)
ⓒ 문학관 전시물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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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민호가 그린 토지 인물도. 앞줄 중앙의 정자관을 쓴 최치수 오른쪽이 최서희와 김길상이다. 뒷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봉순이, 맨 앞줄에 앉은 여인이 공월선이다.
 권민호가 그린 토지 인물도. 앞줄 중앙의 정자관을 쓴 최치수 오른쪽이 최서희와 김길상이다. 뒷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봉순이, 맨 앞줄에 앉은 여인이 공월선이다.
ⓒ 문학관 전시물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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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문학관에는 작가의 유품 41점이 전시되어 있다. 그가 쓰던 재봉틀, 국어사전, 나무 문패, 필기구, 그릇, 소액자 등이다. 2019년10월.
 박경리 문학관에는 작가의 유품 41점이 전시되어 있다. 그가 쓰던 재봉틀, 국어사전, 나무 문패, 필기구, 그릇, 소액자 등이다. 2019년10월.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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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과 최참판댁, 혹은 서사의 생명력

박경리 문학관은 단층으로 된 기와 한식 목구조 건물이다. 기역 자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90도 비튼 형태인데, 세로 두 줄로 쓴 '박경리 문학관' 현판이 인상적이었다. 문학관에는 선생의 유품 41점, 출판사가 발간한 소설 <토지> 전질, 초상화, 영상물, 소설 속 인물 지도 등을 전시했다. 

유품은 육필 원고와 재봉틀과 국어사전, 책상, 원피스와 재킷 등 의류, 안경과 돋보기, 만년필과 볼펜 등 필기구와 주소를 돋을새김한 나무 문패 등이다. 전시관 오른쪽 벽에는 2년 전에는 없던 대형 부조가 걸렸다. 선생의 초상화를 판화로 제작한 김봉준 작가의 흙 부조 '흙으로 춤추다'이다. 

그 밖에도 선생의 주요 문학작품 관련 자료, 평사리를 배경으로 한 사진, 이미지, 평사리 공간지도 등도 전시했다. 2년 전 전시에 비해 훨씬 깔끔해진 듯한데, 옛 전시 품목이 빠진 것 같지는 않았다. 토지가 연재되던 <현대문학>과 <문학사상> 같은 50년 전 낡은 잡지를 바라보면서 나는 최서희를 처음 만나던 내 고교 시절을 생각하고 있었다. 

문학관 오른쪽 뜰에 조성한 박경리 선생의 동상이 멀리 평사리 들판을 비스듬히 바라보고 서 있다. 선생의 동상은 거대한 크기에 높다란 대에 올린 위압적인 규모가 아니라, 어깨동무를 할 수 있을 만큼 조그맣다. 유족의 뜻에 따라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만든 결과다. 

뜰 아래 나란히 서서 우리도 평사리 들판을 내려다보았다. 바둑판처럼 정돈된 평사리 들판은 274만여 ㎡(약 83만 평). 여장부 윤씨 부인이 최참판댁을 당대의 만석지기로 만든 기반이다. 이 동네가 <토지>의 무대로 낙점받은 이유로 그것은 충분해 보였다. 
 
문학관 앞뜰의 박경리 동상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으며 어깨동무를 할 수 있을 만큼 낮고 조그맣다. 답사객의 눈높이를 고려한 유족의 뜻을 반영했다고 한다.
 문학관 앞뜰의 박경리 동상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으며 어깨동무를 할 수 있을 만큼 낮고 조그맣다. 답사객의 눈높이를 고려한 유족의 뜻을 반영했다고 한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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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에서 내려다본 평사리 들판. 바둑판처럼 정돈된 274만여 ㎡(약 83만 평). 여장부 윤 씨 부인이 최참판댁을 당대의 만석지기로 만든 기반이다. 이 들판이 있어 평사리가 <토지>의 무대로 낙점받을 수 있었다.
 문학관에서 내려다본 평사리 들판. 바둑판처럼 정돈된 274만여 ㎡(약 83만 평). 여장부 윤 씨 부인이 최참판댁을 당대의 만석지기로 만든 기반이다. 이 들판이 있어 평사리가 <토지>의 무대로 낙점받을 수 있었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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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은 마을 가장자리라, 사람들이 발길이 뜸하다. 작가의 대하소설 <토지>를 읽은 이들이 주로 이곳을 찾는다. 젊은 여성 몇이 작가의 동상 주변에서 사진을 찍는데, 이들은 가슴에 <토지>를 1권씩 가슴에 안고 있었다. 그건 최참판댁이 단순 관광지가 아니라, 한 작가의 소설에서 비롯한 서사를 재현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환기하는 풍경이었다. 

그러나 최참판댁 문전에 붐비는 관광객에게 그 집이 박경리의 소설에서 비롯했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의 펜 끝에서 태어났지만, 이 만석지기의 저택은 집의 곳곳에 묻은 손때와 함께 원전으로부터 서사의 생명력을 하나씩 얻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작가와 무관하게 최참판댁을 찾아 집을 둘러보고 그 일가를 비롯하여 평사리 소작인들의 삶과 운명을 귀담아듣고 그걸 이 마을의 이야기로 알고 떠난다 한들 어떠하랴. 작가의 손을 떠나면서 그가 창조한 허구는 사람들 기억 속에서 숙성되면서 새록새록 새로운 이야기의 자양으로 자라나도 좋은 것을. 그게 '이야기의 운명'이라는 걸 13년 전에 통영 미륵도에 잠든 박경리 선생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 ‘이 풍진 세상에’(https://qq9447.tistory.com/)에도 싣습니다.


태그:#박경리 문학관, #평사리, #최참판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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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이 넘어 입문한 <오마이뉴스> 뉴스 게릴라로 16년, 그 자취로 이미 절판된 단행본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이 남았다. 몸과 마음의 부조화로 이어지는 노화의 길목에서 젖어 오는 투명한 슬픔으로 자신의 남루한 생애, 그 심연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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