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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전마을 아래 계곡에서 만난 단풍. 피아골에서 이렇게 선명한 단풍을 만나긴 쉽지 않다.
 직전마을 아래 계곡에서 만난 단풍. 피아골에서 이렇게 선명한 단풍을 만나긴 쉽지 않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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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아래 계곡의 노란 단풍. 단풍은 계곡에 흐르는 물과 돌빛 때문에 짙어지기도 흐려지기도 한다.
 마을 아래 계곡의 노란 단풍. 단풍은 계곡에 흐르는 물과 돌빛 때문에 짙어지기도 흐려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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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10월 30일) 가족들과 함께 지리산 피아골을 찾았다. 2019년 10월 31일에 이어 꼭 2년 만이었다. 그때도 아내와 나는 단풍을 보겠다고 피아골을 찾았었다. 우리는 연곡사를 거쳐 직전마을에 이르는 길을 오르면서 길 옆 계곡의 단풍을 구경했었다. 

'화염'으로까지 비유되는 지리산 단풍을 상상해 온 내게 이제 막 단풍으로 물드는 계곡의 가을은 좀 심심했다. 아직도 푸른빛을 마저 벗지 못한 채 드문드문 눈에 띄는 단풍나무들이 연출하는 붉은 점경(點景)을 투덜대면서 아쉽게 발길을 돌려야 했다.

2년 만의 피아골, '부부여행'에서 '가족여행'으로

아내와 함께 피아골을 다시 찾기로 하고 지난 10월 중순부터 공을 들였다. 어려운 건 날을 받는 일이었다. 이태 전처럼 낭패하지 않으려면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날을 골라야 했다. 나는 피아골의 펜션 예약을 알아보면서 그 골짜기의 단풍 상황을 점검했다. 

경상도 말씨의 펜션 주인은 오늘 노고단에 다녀왔는데, 단풍이 하나도 안 들었더라고 했고, 피아골 대피소지기도 단풍은 '아직'이라고 짧게 대꾸했다. 가을 늦더위 때문에 단풍은 예측 불허였다. 10월 말은 이르다 싶어서 출발 날짜를 11월 초순으로 미루었다.

계획이 어그러진 것은 내외의 계획에 아이들이 끼어들고, 녀석들이 10월 말을 맞춤한 날짜로 박으면서다. 단출하게 떠나려던 여행이 가족여행으로 바뀌긴 했지만, 그게 불만스러울 리는 없다. 아이들과 하룻밤을 묵고 오는 여행에 손사래를 칠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올해도 단풍은 실패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목적지 피아골은 바꾸지 않았다. 지리산이 처음인 아이들이 피아골이라도 밟고 오는 게 어딘가 싶어서다. 편안히 하룻밤을 묵자며 딸애가 진주의 호텔을 예약해 진주가 여정에 들어오자, 나는 '진주도 좋은 도시'라고 말하고 그걸 추인해 주었다.
 
계곡의 하얗게 흘러내리는 물과 소에 고인 푸른빛의 냇물도 단풍의 풍경을 조금씩 바꾸어낸다.
 계곡의 하얗게 흘러내리는 물과 소에 고인 푸른빛의 냇물도 단풍의 풍경을 조금씩 바꾸어낸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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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교 너머 험한 돌길을 오르는 등산객들. 노랗고 푸른 단풍이 밝고 아름다웠다.
 선유교 너머 험한 돌길을 오르는 등산객들. 노랗고 푸른 단풍이 밝고 아름다웠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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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돌길과 단풍 숲 주변에는 산죽(조릿대)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다.
 거친 돌길과 단풍 숲 주변에는 산죽(조릿대)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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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길은 사람들의 모습이 금방 꺼지듯 사라졌다가 저만큼에서 다시 떠오를 만큼 굴곡과 경사가 심했다. 단풍 아래로 산죽이 우거졌다.
 돌길은 사람들의 모습이 금방 꺼지듯 사라졌다가 저만큼에서 다시 떠오를 만큼 굴곡과 경사가 심했다. 단풍 아래로 산죽이 우거졌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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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8시에 출발한 우리가 피아골 직전마을에 도착한 건 정오쯤이었다. 단풍철 주말, 직전마을 주변은 원색 등산복 차림의 등산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마을 아래 계곡의 단풍은 2년 전과 비슷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거로도 단풍은 충분히 즐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젊을 때 천왕봉을 몇 차례 오르긴 했지만, 나는 지리산을 잘 모른다. 날을 받으려고 피아골 대피소를 알아보면서 이태 전에 다녀간 피아골이 직전마을 앞 계곡이었을 뿐, 정작 피아골 계곡은 마을 위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혀를 찼다.

지리산 주봉인 반야봉에서 연곡사에 이르는 계곡인 피아골은 오곡의 하나인 피[직(稷)]를 많이 재배하던 곳이라 '피밭골'이었는데 발음이 바뀌어 '피아골'이 됐다. 계곡 아래 '직전(稷田)마을'은 '피밭 마을'을 한자로 쓴 것이다.

정류장 위 식당 주차장에 차를 대고 이른 점심을 먹었다. 1시간 반가량 걸으면 대피소에 이른다니까, 아내와 아이들은 가는 데까지 가보자면서 따라나섰다. 계곡 옆 제법 넓은 등산로를 어깨를 부딪혀 가며 오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등산복과 등산화, 배낭 일습을 제대로 갖추고 있었다. 

나는 바람막이 등산점퍼를 하나 걸쳤으나, 가족들은 면바지에 운동화를 신은 맨몸이었다. 딸애가 우리나라에는 산이 많고 등산하는 이들이 많아서 저절로 등산복 차림이 일반화되었다는 얘길 했는데, 듣고 보니 그렇다. 세상에 집만 나서면 산이 가로막는 나라에서 산 타기는 기본이 되고, 등산복의 실용성에 푹 빠진 이들이 국외 여행에서 그 복장을 즐기게 된 것이니 그걸 굳이 나무랄 일이 없다. 
 
선유교 다리 위에서 등산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맨 앞의 노란 단풍은 생강나무다.
 선유교 다리 위에서 등산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맨 앞의 노란 단풍은 생강나무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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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에서 떨어지는 냇물을 하얗게, 바위 틈에 고인 물은 푸른빛이다. 물은 주변 나무들의 색감에 적지 않은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벼랑에서 떨어지는 냇물을 하얗게, 바위 틈에 고인 물은 푸른빛이다. 물은 주변 나무들의 색감에 적지 않은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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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골의 단풍은 마을 아래 단풍에 비기면 조금 더 든 듯했다. 그러나 전국의 등산객을 끌어모으는 내장산 단풍(관련 기사 : 늦지 않았다, 때를 지난 단풍조차 아름다우므로)이나 팔공산 단풍길의 그것(관련 기사 : 이토록 비현실적인 단풍 터널, 딱 이번 주까지입니다)과 비교하기 어렵다. 

내장산과 팔공산 단풍길의 단풍은 당단풍나무와 청단풍 일색의 가로수와 숲에서 뿜어내는 붉은빛에다 아직 덜 든 단풍의 푸른빛이 깁는 황홀한 색감이다. 소설가 정비석이 <산정무한>에서 "만산의 색소는 홍(紅)!"이라고 한 영탄이 가리키는.

홍·녹·황·갈 4색의 피아골 단풍이 보여주는 '천의 얼굴'

그러나 피아골 단풍은 홍, 녹, 황, 갈(葛) 4색이 연출하는 스펙트럼이다. 단풍나뭇과에 해당하는 나무, 즉 단풍·복자기·신나무·붉나무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아직 물들지 않은 녹색, 느티·생강·계수·상수리나무 등의 황, 참나뭇과에서 연출하는 갈색 등이 어우러지는데, 그 빛을 흩트리는 건 계곡을 흐르는 물이다. 

흐르는 물은 하얗게, 고인 물은 검거나 푸른빛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비탈에 선 나무들의 색감을 더 진하게 보이게 하거나, 또는 더 투명하게 보이게 해 준다. 가을 산의 단풍이 모두 하나같으면서도 제각각 천, 만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은 그래서다.

어디든 렌즈를 들이대기만 하면 뷰파인더에 뜨는 이미지는 그것 자체로 하나의 완벽하고 독립적인 풍경이다. 조금만 더 진하게 단풍이 들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풍경이 그윽하게 전해주는 느낌이 반드시 더 짙은 단풍으로만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평탄한 등산로는 선유교 앞에서 끝나고, 다리를 건너니 험하고 좁은 오르막 산길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의 모습이 금방 꺼지듯 사라졌다가 저만큼에서 다시 솟아오를 만큼 돌길은 굴곡이 심했는데 오른쪽 비탈에는 단풍 숲이 이어졌다. 

피아골은 빨치산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임란 때는 연곡사를 근거로 활동한 승병들이, 구한말에는 동학교도들이 죽어간 이 골짜기에서 6·25전쟁 전후에는 빨치산들이 총을 맞아, 얼어서, 혹은 굶어서 죽어갔다. 

돌길 좌우에는 키 작은 산죽(조릿대)이 이어졌다. 산에 들면 인간은 절로 말이 없어지는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없이 산을 오르며 사람들은 이 산에서 숨진 이들의 아픈 역사를 떠올릴까. 
 
가을 산의 단풍은 모두 하나같으면서도 제각각 천과 만의 얼굴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풍경은 스스로 독립적이다.
 가을 산의 단풍은 모두 하나같으면서도 제각각 천과 만의 얼굴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풍경은 스스로 독립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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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물게 만나게 된 빨간 단풍. 빨간 색감은 나무의 검은빛과 어우러져 더 강하고 짙어 보인다.
 드물게 만나게 된 빨간 단풍. 빨간 색감은 나무의 검은빛과 어우러져 더 강하고 짙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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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명한 당단풍(아기단풍)의 색감. 주변의 노란 단풍에 둘러싸여 그 선도를 더한다.
 선명한 당단풍(아기단풍)의 색감. 주변의 노란 단풍에 둘러싸여 그 선도를 더한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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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길의 가파른 오르막 앞에서 우리는 발길을 돌렸다. 땀이 나 바람막이 겉옷을 벗어 허리에 동여맸는데 출발지로 돌아왔을 때 뭔가 허전한 느낌에 내려다보니 허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감악산 아스타 꽃밭에서 렌즈 뚜껑을 잃어버린 것처럼 나는 지리산 피아골에서 값싼 바람막이 점퍼를 잃었다. 그러나 그게 무어 문젠가. 피아골에 깊어가는 가을과 단풍을 누린 대가로 그건 약소하지 않은가. (관련 기사 : 보랏빛 아스타 꽃밭에 풍차까지… 여기 진짜 한국 맞아?)

덧붙이는 글 | 지리산 피아골의 단풍은 11월 첫째 주에 절정에 이를 듯합니다.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 ‘이 풍진 세상에’(https://qq9447.tistory.com/)에도 싣습니다.


태그:#지리산 피아골 단풍, #하나같으면서도 다른 천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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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이 넘어 입문한 <오마이뉴스> 뉴스 게릴라로 16년, 그 자취로 이미 절판된 단행본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이 남았다. 몸과 마음의 부조화로 이어지는 노화의 길목에서 젖어 오는 투명한 슬픔으로 자신의 남루한 생애, 그 심연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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