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북위 38도선 푯말
 북위 38도선 푯말
ⓒ NARA

관련사진보기

 
학교를 다니면서
10년 가까이 영어를 배웠다.
하지만 나는
"뒷간이 어디입니까?"라는 말도
영어로 할 줄 모르는 '영맹'이다.

평생 우리말을 배우고 가르쳤던 토종 훈장이
남의 나라 말 영어를 말할 줄 모른다하여
그제나 이제나 부끄러움은 전혀 없다.

그런 내가 2004년 누리꾼들의 성원으로
천만 뜻밖에도 미국 수도 워싱턴 D. C. 근교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 깊은 숲속에 있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갔다.

거기 5층 사진자료실에서
한국 현대사 관련 자료를 볼 수 있었다. 
그 가운데 6.25전쟁 사진을 보자 잠재된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나는 여섯 살 때 
6.25 전쟁을 겪었다. 
그때 피란 간 기억은
아직도 아득한 악몽처럼 남아 있다.

1950년 여름 어느 날,
내 고향 경북 구미 북쪽인
김천 쪽에서 검은 연기와 고약한 화약 냄새
그리고 '뚜뚜 뚜' '따따 따' 하는 다발 총소리,
'쿵쿵 쿵' 천지를 진동케 하는 대포소리 등이
천둥처럼 울려왔다. 

마을 사람들과 우리 가족은
그 소리와 화약냄새로 공포에 질려
허급지급 가재도구를 지게에 지거나 머리애 이고
무작정 남쪽으로 피란을 떠났다.

그때 대한민국 정부는
백성들에게는 피란을 가라는 말도 않고
고위 관리들만 줄행랑치기 바빴다.
그래서 대부분 지역 백성들은
인민군이 마을에 진주한 뒤에야
파란 길에 나서는 일들이 많았다.

우리 가족은 낙동강을 건너고자 왜관까지
뙤약볕 속에 비지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 갔지만
그곳 강변에는
이미 인민군들이 진주하여 피란민들에게
고래고래 소리쳤다.

"남조선 인민들!
승냥이 같은 미제 놈들이
그새 낙동강 다리를 모조리 폭파시켜 건널 수 없으니
어서 살던 곳으로 돌아가라."
 
 1950. 8. B-29 전투기들이 낙동강 일대를 융탄 폭격하고 있다.
  1950. 8. B-29 전투기들이 낙동강 일대를 융탄 폭격하고 있다.
ⓒ NARA

관련사진보기

 

우리 가족은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려
구미 광평동 평야 사과밭 곁은 지나는데
그때 남쪽에서 갑자기 날아온 B-29 폭격기 편대가
하늘을 까마득히 덮은 채 
마치 염소가 똥을 싸듯이,
물뿌리개로 상추밭에 물을 주듯이,
숱한 폭탄을 주르르 마구잡이로 쏟았다.

나중에야 문헌을 통해
그것이 낙동강전선의
무차별 '융단폭격'임을 알았다.

우리 가족은
머리와 지게에 이고 진 가재도구를 팽개친 채
모두 과수원으로 급히 몸을 숨겼다.
남자 어른들은 사과나무에 매미처럼 달라붙었고,
여자들과 조무라기 아이들은
사과나무 그루터기 사이 콩밭에
두더지처럼 숨어 폭격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때 나는 B-29 폭격기가
무서운 줄 까마득히 모른 채
미 공군 B-29 폭격기가 여기저기 폭탄을 떨어뜨린 장면이
신기하고 볼만한 구경거리였다.

그 폭탄이 떨어진 곳에 흙더미가
불쑥 솟아오르거나 물보라가 일어나는 게
어린 눈에 여간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밭고랑에서 일어나
무서움도 모른 채 고개를 쳐들고
그걸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 나를 
할머니는 불호령과 함께 뒤통수를 쥐어 박았다. 
그러자 나는 울면서 밭이랑에 머리를 박았던 그런 기억들이
아직도 아련히 남아 있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뒤
미국 국립문서관리청 5층 사진자료실에서
그 시절 기록 사진들을 보자
그 기억들이 어제 일처럼 되살아났다.

그 순간 거기 소장된 사진들은 
나만 봐서는 안 될 것 같아
그리하여 삼짓돈을 헐어 세 차례 더 미국에 가서
NARA 수장고에 비치된
수많은 사진자료를 검색한 뒤
2천5백여 컷을 수집해 왔다.
  
미국 메릴랜 주 소재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미국 메릴랜 주 소재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 박도

관련사진보기

 
그런 가운데 2차 방미 중인 2005. 11. 30. 
NARA 문서상자 사진 속에서
6.25전쟁 발발 직전 도화선이 된
'북위 38도' 군사분계선 푯말 사진을 볼 수 있었다.
그 사진 영문 설명에는 '북위 38도'라는
말밖에 없었다.

나는 그것이 한반도 허리를 자른
분단의 증거물 같아 골똘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거기에는
소련어, 영어, 한자로 '북위 38도'라는 말만 있었지
정작 이 땅의 백성들의 문자인
한글은 그 어디에도 한 자 볼 수 없었다.

이제나 그제나 이 땅의 바지저고리들은
그네들이 세워놓은 푯말의 양말, 한자말이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른 채 
잔뜩 주눅이 들어 그 푯말만 보면 오금이 저리게 살았다.

70년이 지난 지금도
약아빠진, 좌고우면하는 사대주의 무리들은
휴전선 철조망을 
더 두텁게 둘러야 한다는, 
우리는 계속 강대국 보호 아래
그네들 호구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백성들이 혀 빠지게 일한 댓가로
얻은 돈을 그네들 주둔비와 무기구입으로
한 입에 톡 털어 바치는 호구로.

왜 그네들은 남의 땅 허리에다 저희 마음대로 선을 긋고
푯말을 세우고, 오도가도 못한 채 
서로 총부리를 겨누게 하면서
저희가 만든 오만 무기를 다 팔아먹고
기름진 배때기를 두들기는지
우리는 그것도 모른 채,
아니 알면서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북위 38도' 푯말을 세운 자들은
이 땅의 어리석고 불쌍한 백성들이
저희끼리 좌네, 우네 편을 갈라 놓고
자기들 끼리 코피 터지게 싸움질하는 걸,
지난 70여 년 동안
복싱경기 보듯이 
마냥 즐기면서 게다가 무료 관람석에 앉아 무기까지 팔고 있다. 

우리는 언제까지 
서로 '괴뢰'라고 부르면서
그것도 허리가 잘린 채 반신불구로
아직도 삐에로처럼 치고받으며 살아야 하나?

누가 저 팻말을 뽑아내고
거기에 쳐진 철조망을 거둬낼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나는 도시락을 싸들고
"여기 한반도의 잘린 허리를 이을 위인이 있다"고 
삼천리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소리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어린시절 체험한 6.25전쟁 이야기을 바탕으로 쓴 박도의 장편소설 <전쟁과 사랑>이 출간됐습니다.


태그:#북위 38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