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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들에서 수확하는 가을 재료들이 우리 가족의 밥상을 책임지고 있다.
 요즘은 들에서 수확하는 가을 재료들이 우리 가족의 밥상을 책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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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발병 이후로 가족의 식습관이 모두 바뀌었다. 신선한 채소와 잡곡밥 먹기, 단백질 섭취하기, 3끼를 규칙적으로 챙기기 등 기본적이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던 것들을 5개월째 무사히 해내고 있다. 특히 요즘은 들에서 수확하는 가을 재료들이 우리 가족의 밥상을 책임지고 있다.

항암 치료의 어려운 과정을 누군가는 카레로만, 누군가는 장아찌로만 견딜 수 있었다고 말했지만, 남편에게 그런 특별한 음식은 없는 것 같다. 다만, 항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체중관리는 가족 모두의 과제가 되었다. 아직은 항암 치료의 과정은 중반도 지나지 않았다. 항암 치료를 시작하고 3차까지는 치료약의 부작용 때문에 끼니를 챙기는 일이 식사를 준비하는 가족도 잘 먹어야 하는 환자도 어려운 시험 같았다. 

항암 1/3을 마친 지금은 나름의 식사 루틴은 만들어지고 있다. 때가 아니어도 무엇이든 먹을 수 있을 때마다 먹기, 끼니 사이에 틈틈이 먹기. 그러기 위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음식은 무엇이든 말해 달라고 당부했다. 남편이 말하면 가족들은 각자의 역할을 나누었고 언제든 먹을 수 있도록 음식을 준비했다.

가장 쉽게 간식으로 찾은 것이 옥수수였다. 길을 걷다 '하나 먹어 볼까' 하고 산 것이었는데 다행히 잘 먹었다. 고구마도 혹시 먹을까 하여 쪄서 준비했는데 환자의 손이 자주 갔다. 간식으로 그만인 옥수수와 고구마는 식이섬유가 풍부한 기능성 음식이라고 한다. 어렵지 않은 재료에 다행히 둘 다 수확철이었다. 찌고 삶고 해서 뜨끈한 것들을 손 닿는 곳에 준비해 두었고 환자는 틈틈이 먹었다. 물론 단백질 음료와 함께 먹게 했다. 그렇게 해서 저녁에 목표 체중이 나오면 그날의 식사는 성공이라고 나름의 의미를 부여했다.

장아찌, 청... 마음과 계절을 담은 선물들 

환자가 있기 때문인지 매일 이런저런 음식들이 집으로 배달되었다. 음식을 잘 먹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는 각종 장아찌류가 무겁게 도착했고, 레몬밤청이나 생강청, 매실 같은 음료 종류도 여기저기서 보내 주었다. 직접 만들어 지인에게 건넨 정성 어린 선물이 돌아 돌아 우리 차지가 되기도 했고, 마음을 다해 직접 담가 보내주기도 했다.

암환자에게 장아찌와 같은 염도가 높은 음식은 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항암 기간 중에는 잘 먹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한국인의 반찬이고 입맛이 없을 때 혹시 그런 것들이 당길지도 모른다며 생각해서 보내온 장아찌는 이미 냉장고에 가득 찼다. 오래 저장하고 먹을 수 있는 것들이지만, 한 달쯤 지나고도 그대로 남은 것들은 처리할 수밖에 없다. 버려지지 않으려면 환자를 제외한 다른 가족들이 열심히 먹어야 했다. 

레몬밤청과 생강청, 매실청은 가을과 꼭 어울리는 것이었다. 특히 레몬밤청은 환자에게 잘 맞았던 것 같다. 티스푼으로 한 숟갈씩 그냥 떠먹어도 된다고 했지만, 주로 따뜻한 물에 타서 마시도록 챙겼다. 밤과 생강, 매실이 주는 꽉 찬 느낌과 따뜻한 기운이 가을의 향으로 집 안에 은은히 퍼졌다. 

시장에서 가게마다 마늘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마늘 수확철이구나 생각했는데 며칠 지나니 마늘로 만든 음식들도 종류별로 도착했다. 통마늘이나 깐 마늘로 담근 초장아찌와 간장 장아찌는 기본이었고, 마늘을 쪄서 꿀에 절인 것과 흑마늘까지 다양한 종류가 왔다. 최고의 항암식품이라는 소문 때문인지 여러 곳에서 보내왔다. 

남편의 발병 이후로 집에서는 고기를 굽지 않았다. 고기 종류를 자주 먹지도 않았다. 어쩌다 먹게 되면 찜이나 수육, 장조림이나 국으로 먹는 정도였다. 마늘장아찌는 이전에도 고기를 구워 먹을 때만 조금씩 먹었던 음식이었다. 더구나 환자 당사자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환자를 위하는 마음으로 보내온 엄청나게 많은 마늘장아찌를 어떻게 먹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다.

벌초하러 갈 때나 가까운 친지의 시골집에 가게 되면 우리는 깻잎 밭에서 한참을 머문다. 무성한 깻잎의 향에 이끌리고 익히 아는 맛에 이끌려서다. 지인의 허락과 동시에 밭에서 깻잎을 톡톡 따기 시작해서 두 고랑만 왔다 갔다 움직이면 어느새 작은 비닐봉지에 가득 찬다. 

이번에도 그렇게 시골에서 깻잎을 따왔다. 따온 깻잎은 시장에서 사는 것과는 그 맛과 향이 완전히 다르다. 따오자마자 수육을 삶고 깻잎과 쌈장을 준비해서 한상을 차렸다. 두세 장씩 겹쳐서 쌈장에 고기와 밥을 얹어 먹으면 누구도 그 맛에 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환자는 물론 가족 모두 산지 직송의 참맛을 진하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남은 깻잎으로는 장아찌를 담갔다. 깨끗이 씻고 물기를 빼서 차곡차곡 몇 장씩 포개고 미리 만들어 놓은 간장 양념을 얹는다. 냄비에 봉곳이 올라올 때까지 차곡차곡 쌓은 후 약불에 뭉근히 졸이면 양념장이 깻잎에 잘 배어 제대로 된 밑반찬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만든 깻잎 장아찌는 가족 모두가 좋아했다. 깻잎 한 장씩 떼서 따끈한 밥에 얹어 먹으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간장 대신 된장으로 양념을 해서 깻잎을 찌면 색다른 구수한 맛을 낼 수 있다. 삼사일을 식탁에 부지런히 오르면 따온 깻잎은 금세 없어진다. 아쉬운 마음에 시장에 가서 깻잎을 찾지만 직접 따온 것과는 맛과 향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뿐이다.

시골에 가면 고추장이나 된장 항아리에 깻잎을 박아 둔 것을 투박하게 꺼내어 싸주기도 했다. 한 주먹 뚝 떼어 비닐봉지에 넣어 주는 장아찌는 별미다. 별 것 아닌 듯 간단해 보이지만 소금물에 삭히고 된장이나 고추장 항아리에서 한철 이상을 오래 묵힌 것이니 정성이 가득한 음식이었다. 묵힌 만큼 오래 두고 먹을 수 있지만 아껴 먹어도 어느새 동이 나곤 했다. 

우리만의 '리틀 포레스트'를 만들어가며 

암은 가족의 식단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맵단짠'의 찌개를 끓이거나 쉽게 고기를 굽거나 단품요리로 한 끼의 식사를 채우곤 했는데 지금은 그럴 수 없다. 특별한 고급 재료가 아닌 시장에서 늘 만나는 제철 채소가 기본이 되는 신선 식단으로 상을 차린다.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고 간은 약하게 하고 영양은 챙기고. 연근과 우엉, 무와 당근, 고구마나 감자 등의 뿌리채소와 오이, 가지, 부추와 호박 등도 매일 활용한다.

'리틀 포레스트'가 별건가. 소꿉장난하듯 매일 조금씩 사서 만지고 다듬는다. 생선이나 해물과 같이 조리하거나 볶고 무쳐서 밑반찬으로 만든다. 식탁에 둘러앉아 맛있게 먹으면 혼란스럽던 마음도 진정되고 가족이라는 둥지가 완성된다.

이쯤 되면 풍성한 계절 가을에 감사의 마음이 절로 생긴다. 수많은 가을의 결실로 차리는 소박하지만 실속 있는 밥상이 나의 유일한 무기다. '가을에는 손톱 발톱도 다 먹는다'는 속담처럼, 어려운 치료 과정이지만 이 가을 자연이 허락하는 작물로 몸과 마음이 회복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태그:#가을 식단, #제철 채소, #뿌리채소, #항암치료 식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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