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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이면 으레 듣게 되는 이야기들이 있다. 임신이나 출산에 얽힌 고생스러운 에피소드 혹은 감격의 순간과 주변 반응 등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우리 엄마는 해마다 내 생일이면 더운 여름 집에서 출산하느라 산파가 왔다는 이야기, 내 배꼽에 달린 탯줄을 보고 4살 많은 큰언니가 동네방네 '울 엄마 아들 낳았어요'라고 소문냈다는 이야기, 소문을 듣고 심방을 오신 목사님이 '아들 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를 간절히 드렸다'던 그 이야기를 빼놓지 않고 들려주신다.

마치 처음 들려주는 것처럼 신이 나서 생생하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엄마와 족히 서른 번은 들었을 이야기지만 처음 듣는 사람처럼 재밌다고 맞장구를 치며 까르르 웃는 나. 아마도 엄마와 나는 47년 전 함께 세상 문을 연 감격과 수고를 이런 방식으로 자축하며 되새기는 것이 아닐까. 몇 번을 들으면서도 신이 나서 설명하는 엄마의 얼굴 표정과 그 당시 순박한 시골사람들의 호들갑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세 아이와 입양으로 가족이 된 후 가장 아쉬운 부분은 이 대목이다. 내 아이의 생일에 들려줄 이야기가 없다는 것. 뭔가 유치하고 엉성하더라도 엄마와 나처럼 세상의 첫 문을 열던 순간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우리가 한 팀이었음을 기억하고 싶은데 그럴 이야기가 없다. 우리 아이를 직접 출산하지 않은 나는 그 사실이 많이 아쉽고 아프다. 내가 소유하고 싶은 그 경험을 어딘가에 살고 있는 우리 아이의 생모는 선명히 기억하고 있을테지.

1주일 먼저 당겨 받은 선물 덕에 '생일에 대한 기대감 없이' 평소의 얼굴로 잠에서 깨어난 둘째 아들에게 가을에 어울리는 재즈풍으로 생일 축하곡을 틀어주었다. 미역국을 싫어하는 녀석이라 따로 끓이지 않았더니 아침이 식탁도 한산하다. 그래도 생일 찬스는 쓰고 싶었던지 오늘은 학원을 가지 않고 엄마와 있고 싶다고 조르길래 선심 쓰는 마음으로 그러라고 했다.

등교 준비를 마친 녀석이 방에서 자신의 '아기수첩'을 꺼내왔다. 라이프 박스에 고이 담겨있던 아기수첩을 오랜만에 펼쳐보는데 출생 시각이 2008년 9월 2일 오전 8시 50분이라고 쓰여있다. 그리고 그 밑에 쓰여있는 체중 4.4kg.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는 숫자 4.4는 어마어마하게 다가온다. 아... 어린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들에게 4.4kg이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하는데 놀랍다는 표정이다. 그리곤 시계를 보더니 '엄마! 이제 30분 남았어요'라고 속삭이는 녀석. 14년 전 오늘 자신이 탄생한 그 순간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나 보다. 누나와 동생을 먼저 등교시킨 뒤 아들 녀석의 손을 꼭 잡고 소파에 앉아 진지하게 시계를 바라본다.

아들의 모습 뒤로 떠오른 얼굴 없는 생모

"삼분... 이분... 일분... 십초... 드디어 땡!"

시계가 8시 50분을 가리키자 녀석이 작은 목소리로 '응애응애'하며 울음소리를 냈다. 내 품을 넘어설 만큼 커버린 녀석이 들려주는 아기 울음소리. 웃긴데 우습지 않고 밝은데 왠지 짠한 큰 아기의 울음소리다. 기억도 없는 자신의 생의 첫 순간을 안타까워하기보다 지금의 곁에 있는 엄마와 오늘의 생일을 새롭게 기억하고 싶었나 보다.

이제 막 다시 태어난 아들을 꼭 끌어안아주었다. 내 품에 안겼던 37일의 아기가 어느새 훌쩍 자라 이토록 사랑스러운 모습의 소년이 되었는가 싶어 아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기도를 마치니 홀가분하다는 듯 일어서서 가방을 메며 한마디를 남긴다. 

"와~! 내가 드디어 열네 살이 되었다! 엄마 저 학교 다녀올게요!"

기특하고 울컥한 마음도 잠시 아들의 모습 뒤로 얼굴 없는 생모가 떠오른다. 한 번도 본 적 없고,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그녀도 오늘은 나와 같은 아이를 품고 있으리란 걸 안다. 십삼 년 전 내 아이와 한 팀이 되어 오늘을 맞이했던 사람, 분명 아들을 낳았지만 엄마라는 소리 한번 듣지 못하고 생모라는 호칭 아래 사라진 그녀는 입양 이후 어떻게 살고 있을까.

"우리 같은 생모는요, 아이의 생일만 되면 너무 힘들어요. 다른 날은 몰라도 아이 생일 날 만큼은 우리 입양상담을 해주었던 선생님이 전화 한 통이라도 걸어서 '오늘 하루 어떻게 보내고 계세요. 아기가 많이 보고 싶으시죠?' 이렇게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곁을 내주면 좋겠어요. 사실 그 이야기는 다른 누구랑 나눌 수가 없잖아요."

아들을 미국으로 입양 보낸 생모분이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귓전에 맴돈다. 입양가정을 위한 사후 서비스는 해마다 확대되는 추세이지만 아이를 떠나보낸 생모(출생가족)를 위한 사후 서비스는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그 개념조차 낯선 단계이다. 생의 어느 순간에 다시 누군가의 엄마로 살아갈 그녀들이 건강해지지 않으면 그 품과 엮인 수많은 아이들 역시 건강하게 자라기 어렵다.

어딘가에서 오늘을 기억하며 가슴 서늘한 하루를 보내고 있을지 모를 그녀에게 누군가 따스한 전화 한 통 해주기를, 수고하고 애썼다고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기를, 훗날 입양 보낸 자녀와 재회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하게 치유되고 성장하도록 돕는 사후 서비스가 준비되기를 바라본다.

태그:#입양, #모두의입양, #아동중심 입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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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연결을 돕는 실천가, 입양가족의 성장을 지지하는 언니, 세 아이의 엄마, <가족의 탄생>,<가족의 온도>,<모두의 입양>저자, 가끔 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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