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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코로나가 발목을 잡았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을 주제로 한 답사가 조금 밋밋해졌다. 일정과 현장에서의 체험 활동을 다채롭게 기획했는데 모든 게 일그러져버렸다. 찾아가려던 지역 인근에 코로나 확진자가 속출했다는 소식에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지난 4일, 얼마 전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부터 돌아온 홍범도 장군의 묘소를 찾아 국립 대전 현충원으로 동아리 아이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이곳 광주에서 오전 8시 반에 출발해 오후 2시 남짓에 도착한 '반나절' 답사였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5시쯤 돌아왔어야 맞다. 

우선, 광주의 고려인 문화관을 관람한 뒤 인근 고려인 마을을 걸어서 탐방할 요량이었다. 고려인이 운영하는 상점에 들러 간식도 준비하고, 자연스럽게 그들과 대화도 나눠보려고 했다. 광주에 고려인들의 공동체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아이들도 있었다.

장군 역시 고려인이었고, 그가 말년을 보낸 카자흐스탄에서 고려인 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인 법. 백 번 수업하는 것보다 한 번 눈으로 보여주는 게 낫다고 여겨서다. 지금 고려인 문화관에서 홍범도 장군 관련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출발 전날인 금요일, 고려인 문화관으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인근에서 확진자가 나오고 있으니 방문 계획을 취소해달라는 것이다. 광주 고려인 마을 답사는 뒤로 미루고, 답사 주제를 변경했다. 덩그러니 장군의 묘소만 참배하고 오기엔 너무 헛헛했기 때문이다. 

두 인물의 삶
 
아이들은 답사 노트에는 홍범도와 백선엽의 생애를 대조하는 메모가 가득했다.  백선엽은 자칫 밋밋할 뻔한 이번 답사를 다채롭게 만들어 주었다.
 아이들은 답사 노트에는 홍범도와 백선엽의 생애를 대조하는 메모가 가득했다. 백선엽은 자칫 밋밋할 뻔한 이번 답사를 다채롭게 만들어 주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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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와 백선엽'. 고민 끝에 떠올린 주제다. 홍범도와 백수를 누리다 작년에 현충원에 안장된 백선엽의 삶을 찾아 대조해보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에게 의미 있는 소재가 될 것이라 봤다. 더구나 두 무덤은 쉬엄쉬엄 걸어도 채 5분이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다. 

굳이 두 인물의 삶을 아이들에게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들의 손엔 스마트폰이 있고, 묘비의 앞뒷면에도 그들의 면면을 보여주는 글귀가 적혀 있다. 그것들을 조합하고 서로 대조해보면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것이다. 빛나는 독립운동에 대해서, 또 질곡의 우리 현대사에 대해서.

이 한 마디는 건넸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조국에 모셔진 건, 우리 현대사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역사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그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는 물구나무선 가치관을 바로잡고, 통일에 대한 염원을 북돋우는 소중한 계기가 될 것이라는 걸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아이들은 그의 이름을 낯설어했다. 그들과 길거리에서 국외 무장 독립전쟁의 두 영웅, 홍범도와 김좌진에 대한 인지도를 조사한 적이 있다. 패널에 붙은 스티커 수는 비교가 안 됐다. 아이들은 물론, 오가는 시민들조차 홍범도를 잘 알지 못했다.

천출과 사회주의자라는 편견을 걷어내면, 독립운동가로서 홍범도의 업적은 김좌진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무장 독립전쟁의 경력과 전과는 외려 홍범도가 한 수 위다. 김좌진이 명문가 출신의 계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라는 점, 게다가 젊은 나이에 암살당한 비극적 생애가 도드라져 보인 이유가 아닐까 싶다.

대한민국 건국훈장의 권위

알다시피, 홍범도는 교과서에 실린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초기의 거의 모든 사건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단지 교과서에 그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을 뿐이다. 1895년 을미의병 때 유인석 부대와 연합작전을 펼쳤고, 1907년 정미의병 때 함경도 지역에서 포수로서 이름을 떨쳤다. 

이후 연해주로 건너가 권업회 활동을 주도했으며, 3.1운동 직후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으로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이끌었다. 직후 결성된 대한독립군단 부총재로 추대되었고, 자유시 참변을 겪었다. 1937년엔 스탈린에 의해 한인들과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이렇듯 불세출의 일제강점기 무장 독립전쟁 영웅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예우는 작년까지 2등급인 건국훈장 대통령장이었다. 이승만과, 박정희, 최규하 등 역대 대통령과 심지어 쑨원과 장제스 등 중국 국민당 정부 인사들까지도 받은 1등급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홍범도는 여태껏 받지 못했다. 물론, 김좌진도 1등급 훈장 수훈자다.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1등급 훈장 수훈자 중에는 베트남 패망의 원흉이자 부패의 상징인 당시 베트남공화국 대통령 응오딘지엠도 있다. 나아가 미국에서 이승만을 보좌하던 비서인 임병직조차 이름을 올렸으니 더 말해서 무엇할까. 이는 대한민국 건국훈장의 권위 문제다.

어쨌든, 적어도 훈격에서 홍범도는 김좌진, 안중근, 윤봉길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고향도, 미천한 신분도, 사회주의자라는 이념도 역사적 평가에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걸 보여주었다. 북한도 그의 유해가 우리에게 봉환되는 걸 더는 문제 삼지 않고 있다. 

그가 활약했던 시기에 사회주의는 해방을 염원하고 항일의식을 벼리는 도구였다. 그것이 홍범도의 공적을 폄훼하는 이유가 될 순 없다. 천출이라는 신분에도 독립운동에 발 벗고 나선 것 역시 상찬하고 존경할 일이지 무시하고 조롱하는 건 몽매한 짓이다. 

이태 전 영화 <봉오동 전투>가 개봉되면서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이번 유해의 봉환으로 그는 독립운동의 상징적 존재로 우뚝 섰다. 만약 지금 홍범도와 김좌진에 대한 인지도를 조사한다면, 예전과 같은 결과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홍범도는 그때의 홍범도가 아니다. 

스마트폰을 켠 아이들
 
홍범도 장군의 묘소 옆에는 '국방정신전력원' 이름이 적힌 추모화환이 놓여있었다.
 홍범도 장군의 묘소 옆에는 "국방정신전력원" 이름이 적힌 추모화환이 놓여있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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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묘소는 국립 대전 현충원의 '핫플레이스'가 됐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참배했고, 벤치가 놓인 묘소 옆 휴게 공간에도 빈자리가 없었다. 특히 가족 단위의 참배객이 많았는데, 어린 자녀들에게 홍범도의 생애에 대해 조곤조곤 들려주는 부모의 다감한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

아침나절에 올려놓은 듯한 싱싱한 국화꽃이 묘소 앞에 가득했고, 옆에는 '국방정신전력원' 이름이 적힌 화환도 놓여 있었다. 국군의 정신력 강화를 위한 국방부 장관의 직속 기관이니, 우리 국군이 공식적으로 경의를 표한 셈이다. 곁에 꽂힌 태극기를 보노라니 가슴 뭉클했다.

아이들과 장군을 향해 머리를 숙인 뒤 백선엽이 안장된 묘소를 찾았다. 위치를 근처 안내소에 물으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군묘역 맨 앞 왼쪽에서 여덟 번째'라는 대답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그만큼 백선엽을 찾아오는 참배객들이 많다는 뜻이다.

사실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장군묘역을 휙 둘러보다가 시선이 멈추는 곳이 그의 묘소다. 봉분 앞에 형형색색 꽃다발과 화환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다 같은 장군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지만, 관리소에서 꽂아둔 똑같은 조화 말고 '꽃 대궐'인 무덤은 그의 묘소뿐이었다. 

아이들은 '육군 대장'이라는 그의 계급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라'고 적힌 묘비명에 관심을 보였다. 압권은 꽃다발 사이의 '고 백선엽 장군님, 사랑합니다'라는 큼지막한 글귀였다. 남다른 그의 묘소 앞에서 백선엽의 생애를 찾아보기 위해 아이들은 다시 스마트폰을 켰다.
 
백선엽 묘소 앞에는 화환과 울긋불긋한 꽃다발이 많았다. '고 백선엽 장군님 사랑합니다'는 팻말이 눈에 띈다.
 백선엽 묘소 앞에는 화환과 울긋불긋한 꽃다발이 많았다. "고 백선엽 장군님 사랑합니다"는 팻말이 눈에 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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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가 직접 답해야

"독립군을 토벌하던 친일파가 6·25 전쟁을 통해 애국자로 둔갑한 가장 극명한 사례로군요?" 

단지 스마트폰 검색만으로 아이들은 핵심을 꿰뚫어냈다. 그가 악명 높은 간도특설대 소속이었고, 해방 당시 만주군의 간부였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 6·25 전쟁 당시 남한 측 대표로 휴전협정에 서명했다는 것도, 이후 승승장구해 합참의장까지 역임했다는 것도 술술 읊었다. 

작년 사망 당시 국군통수권자인 문재인 대통령의 조문을 요구하는 정치인들이 많았다는 뉴스까지 찾아냈다. 또, 창씨명인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가 그가 흠모하던 일본 육군 대장의 이름이었다는 것도 알아냈다. 시라카와는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투탄 의거로 사망했다. 

물론, 스마트폰 검색으로 이렇듯 쉽게 확인되는 사실도 그의 묘비에는 단 한 줄 언급이 없다. 그저 공산군의 침략에 맞선 6·25 전쟁의 영웅으로만 묘사되고 있을 뿐이다. 1920년에 태어났지만,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1950년 이후의 생애만을 대상으로 삼고 있는 셈이다. 

"두 곳에 놓인 화환 때문에 든 생각인데요. 국방부는 홍범도와 백선엽 중 누굴 더 존경할까요? 홍범도가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일제와 싸울 때 백선엽이 태어났으니 직접 맞닥뜨린 적은 없었겠지만, 두 세력은 서로 총칼을 겨눈 사이잖아요. '너도 옳고 나도 옳다'는 뜻일까요?"

한 아이의 질문이 뼈를 때렸다. 친일파 백선엽이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주역'이라면, 일제강점기 일제에 맞서 싸운 홍범도의 묘소에 국방부가 화환을 보내는 건 이율배반적인 행위라는 뜻이다. 아이들은 홍범도 묘소의 태극기와 백선엽 묘소의 그것 중 어떤 게 진짜 태극기인지를 묻고 있는 거다. 

백선엽의 삶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처럼 부러 그 질문에 대한 답도 하지 않았다. 그건 국방부가 직접 답해야 할 몫이다. 수많은 친일파가 버젓이 국립 현충원에 묻힌 까닭을 백선엽의 생애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준 셈이 됐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이 가져온 나비효과다. 

태그:#홍범도 장군, #백선엽, #국립대전현충원, #친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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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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