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3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작인 <일렉트로니카 퀸즈 - 전자음악의 여성 선구자들>의 한 장면.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올해로 23회째인 서울국제여성영화제(아라 SIWFF)의 슬로건은 '돌보다, 돌아보다'이다. 사회적 편견, 유리천장에 맞서 최근까지 행동해 온 서로를 보듬고 주변 약자를 생각해보자는 취지일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임에도 많은 영화들이 초청돼 상영 중인 가운데 유독 최초, 시초라는 키워드가 눈에 띈다.
지난 27일 진행된 영화제의 첫 심야 행사 '선셋시네마' 상영작은 호주 여성 감독 폴렛 맥도나의 <더 치터스>였다. 더불어 앞서 오후에 상영됐던 여러 영화 중 <일렉트로니카 퀸즈- 전자음악의 여성 선구자들> 또한 평일 오후 시간대임에도 오픈된 좌석의 3분의 2 이상이 들어찰 정도로 성황이었다.
악기 대신 전선과 전자 기기를 들다
리사 로브너 감독의 <일렉트로니카 퀸즈- 전자음악의 여성 선구자들>는 단연 전자음악 마니아들에게도 잘 알려진 최초 여성 음악가를 조명한다. 다프네 오람, 로리 스피겔, 베베 바론 등 흔히 지금의 EDM(Electronic Dance Music) 시초 격이라 할 수 있는 음악을 십 수 년에 걸친 연구 끝에 만들어내고 새로운 전자악기를 조합해낸 주인공들이다.
1900년대 이전까지 주류 음악으로 추앙받던 클래식이 사실상 남성들의 전유물이었고, 작곡 및 연주 또한 남성 중심으로 재편되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재능 있고, 감수성이 뛰어나도 여성이기에 살림과 육아를 도맡았던 여성들은 클래식 음악계에 발을 들이기 어려웠는데 1900년대 중반 세계 대전과 산업 혁명이 가속화되며 상황이 급반전된다. 영화는 바로 이 지점을 짚으며 순식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여성 전자음악가들을 소개하기 시작한다.
흑백의 자료 화면과 인터뷰, 여기에 각 음악가들이 만들어 온 음악을 배경으로 깔면서 영화가 진행된다. 난해한 곡 구성으로 동시대엔 인정받지 못했던 사람도 있었고, 델리아 더비셔 등 TV 드라마 OST와 영화 음악을 해오며 능력을 인정받은 사례도 등장한다. 대중의 관심과 업계의 인정 유무와는 별개로 고전적 악기가 아닌 전자기기와 전선을 들고 이리저리 연결하는 여성 음악가들의 모습은 가히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 제23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작인 <일렉트로니카 퀸즈 - 전자음악의 여성 선구자들>의 한 장면.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최근까지 국내에서도 불고 있는 EDM 열풍에 몇몇 이들은 대중적이면서도 흥겨운 박자와 멜로디를 쉽게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그 역사를 파고 들어가면 EDM은 주류 음악계에 나름 충격파를 던지며 혁신과 해체를 꾀해 온 투쟁의 의미를 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비싼 돈을 들이거나 권력자에 아부하지 않아도 음악에 대한 열정과 기기에 대한 지식만 갖추면 자신만의 노래를 만들 수 있는 EDM의 매력을 그 여성들은 일찌감치 알아챘을 것이다. EDM 등장 초기 이런 여성을 향해 마녀라고 칭한 것도 그래서 어쩌면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호주 최초의 여성 영화인들
<더 치터스>는 약 90분 분량의 무성 장편 영화라는 점에서 일단 그 희소성이 크다. 게다가 여성 감독의 작품이라니. 1920년대 등장해 호주 영화 역사와 산업에 한 획을 그은 맥도나 자매들이 주축이 된 영화다. 연출과 제작에 자질을 보인 막내 폴렛을 비롯해, 미술과 무대를 도맡아 온 둘째 필리스, 그리고 배우로 활동한 이자벨까지.
이 세 자매가 호주 영화 역사의 산증인이었다. 물려받은 유산을 탕진하고, 끼니까지 굶어 가며 영화 만들기를 주저하지 않은 세 사람은 훗날 호주 영화는 물론이고 제3세계 여성 영화인의 족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특히 호주를 대표하는 최초의 여성 감독, 영화인이라는 점에서 현재까지도 연구가 활발히 진행 중이라고 한다.
이들이 남긴 여러 작품 중 <더 치터스>는 사적 복수와 엇갈린 남녀의 사랑을 소재로 한 멜로 장르 영화다. 동시기에 큰 인기를 구가한 찰리 채플린 영화보다도 호주에선 관심도가 높았고, 무성 영화 시대 끝자락에서 공연과 음악, 영화의 결합이라는 복합 문화 체험의 역사라는 점에서 현재의 영화팬들에게도 관심을 끌 만하다.
▲ 지난 28일 저녁 진행된 제23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선셋시네마 현장. ⓒ 이선필
선셋시네마에선 뮤지션 이주영의 라이브 공연과 함께 상영이 진행됐다. 무성 영화 특성상 오케스트라의 공연이 함께였기에 1930년대의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었다. 현장에서 이주영은 키보드와 기타, 심벌 등을 이용해 각 시퀀스와 장면의 감정을 고조시키고, 풍부하게 전달하려 했다.
공개된 <더 치터스>는 세월의 흔적, 보관상 문제 등으로 일부 장면의 색감이 고르지 못하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생동감 있는 음악 덕에 극 중 폴라(이자벨 맥도나)의 다층적인 감정이 무리 없이 전달될 수 있었다. 영화는 과거 상사에게 억울하게 해고된 남성이 자신의 딸 폴라를 이용해 수십년에 걸친 복수를 시도한다는 내용이다.
제23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오는 1일까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