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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사진으로 많은 것을 해석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특히, 그 사진이 '서양인이 이 땅에서 촬영한 최초의 조선인 사진'(이경민 사진아카이브연구소 대표)이라면 해석은 더 다양해질 것이다. 1871년 5월 30일 상투를 튼 조선인이 미국 군함에서 맥주병들을 품에 안고 웃고 있다. 이 사진은 미군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한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이탈리아계 종군사진가 펠리체 베아토가 찍은 조선인 사진이다.

한동안 이 사진은 우리나라 최초의 맥주 사진, 양주 사진(맥주병을 양주병으로 착각)을 이야기 할 때 사용되곤 했다. 하지만 5월 14일 '어재연 장군 순국·신미양요 150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서 이 사진의 자세한 내용이 설명되었다. 이 사진은 전투가 시작되기 전 미군 함대를 찾은 조선인 관리 중 한 명인 인천부 아전 김진성을 찍은 사진으로 알려지고 있다. 1882년 윌리엄 그리피스가 펴낸 <은자의 나라, 한국>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몇몇 조선 사람들이 우정의 표시를 보이면서 아무 주저함이 없이 갑판에 올랐다. (중략) 그들은 사진을 찍기 위하여 갑판 위에 섰는데, 이때 매우 귀중한 사진 몇 장을 찍을 수가 있었다. 이 사진에 대하여는 설명문으로 '얼마나 흡족한 표정인가, 이 사진을 보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배스(Bass : 영국 맥주회사)’의 엷은 색깔의 다 마신 맥주병 10여개를 보스톤 발행의 사진판 신문인 ‘에브리 새터데이(Every Saturday)’에 싸서 한 아름 안고 있는 모습
▲ 맥주병을 들고있는 김진성을 촬영한 사진 ‘배스(Bass : 영국 맥주회사)’의 엷은 색깔의 다 마신 맥주병 10여개를 보스톤 발행의 사진판 신문인 ‘에브리 새터데이(Every Saturday)’에 싸서 한 아름 안고 있는 모습
ⓒ 미국 폴게티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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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150년 전 사진 속 맥주는 조선인이 마신 최초의 수입 맥주일지도 모른다. 신미양요 이후 조선은 1876년 강화도 조약(병자수호조약)을 통해 개항하게 되었다.이때부터 외국의 근대 문물이 본격적으로 들어오면서 조선의 모습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주류들도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정확하게 맥주가 언제 수입되었는지 기록된 바는 없다. 다만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도 이 시기로 추측된다. 1876년 개항 이후 서울과 개항지를 중심으로 일본인 거주자가 늘어나면서 일본을 통해 세계의 맥주들이 흘러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개항 직후 일본과의 무역은 무관세 무역(無關稅貿易)이 강요되었다. 하지만 조선은 무관세 무역이 근대 무역의 국제적 통례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국가 경제 및 재정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883년 7월 25일 '조일통상장정 및 동 해관세칙'을 체결하였다.

해관세칙(세관 규칙)을 적은 한성순보 1883년 12월 20일에 '맥주(麥酒)'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해관세칙은 지금으로 따지면 수입품에 대한 세금 기준을 기록한 것이다. 여기에는 수입되는 주류에 대한 내용도 있는데 맥주에 대해서는 술값의 10%를 세금으로 내게 했다. 참고로 당시 브랜디나 위스키의 세금은 30%로 정했다.

 이후 맥주 수입은 지속적으로 증가한다. 황성신문 1901년 6월 19일자에는 점포 '구옥상전'이 낸 광고에 맥주가 수입되어 들어 왔다는 내용과 함께 판매 홍보를 하고 있다. 수입품이었던 맥주를 일반 국민이 접하기는 어려웠겠지만, 광고가 계속된 것을 보면 개화한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소비층이 형성됐다고 볼 수 있다.

1910년을 고비로 일본 맥주 회사들이 서울에 출장소를 내면서 소비량이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1913년 전체 주류 총 소비량 23만3870 kL(킬로 리터) 중 맥주 수입량이 3349 kL로 1.4%를 차지한다. 이후 1921년에는 맥주 수입량이 3659 kL로 청주 3030 kL를 뛰어 넘었다. 탁약주 및 소주가 대부분이던 시대에서 결코 적은 양이 아니었다.
 
광고 포도주, 전복, 우유, 밀감주, 가배당, 목과, 맥주
▲ 황성신문(皇城新聞) 1901.06.19. 구옥상전 광고  광고 포도주, 전복, 우유, 밀감주, 가배당, 목과, 맥주
ⓒ 국립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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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소비량 증가에 맞춰 조선 땅에서의 본격적인 맥주회사 설립은 1933년 대일본 맥주 주식회사가 조선맥주 주식회사를 설립한 것이 시초이다. 뒤이어 같은 해 12월에는 기린맥주 주식회사가 소화기린맥주(동양맥주의 전신)를 설립하였다. 본격적인 생산이 시작된 1934년 4월 이후 맥주 수입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조선의 첫해 맥주 생산액은 2933 kL였고 전체 조선 주류 생산량 38만5882 kL의 1.9%를 차지하는 양이었다. 첫 맥주 생산량 2933 kL은 지금의 맥주 생산량 171만5995 kL(전체 주류 생산량 중 41.2%)와 비교하면 보잘 것 없다.

하지만 1871년 5월 30일에 찍힌 조선 최초의 맥주 사진 이후 150년 사이에 맥주는 한국인의 입맛을 서서히 길들였다. 이제는 명실상부 우리나라 최고의 주류가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1937년 조선총독부 발간 조선신궁 어진좌 10주년 기념책자
▲ 국내 최초의 맥주공장 1937년 조선총독부 발간 조선신궁 어진좌 10주년 기념책자
ⓒ 국립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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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맥주, #신미양요, #콜로라도호, #김진성, #페리체베아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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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주 연구를 하는 농업연구사/ 경기도농업기술원 근무 / 전통주 연구로 대통령상(15년 미래창조과학부 과학기술 진흥) 및 행정자치부 "전통주의 달인" 수상(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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