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6.22 08:15최종 업데이트 21.06.22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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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이 우리 곁을 떠난지도 어언 3년이 흘렀다. 그의 3주기에 즈음하여 노회찬 재단은 오마이뉴스와 함께 공동기획으로, 4월 16일부터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우리시대 '6411투명인간'과 '약자들의 벗 노회찬'의 정치실천: 기록으로 기억하다] 기록 연재를 시작한다.[편집자말]
노회찬은 진보정의당 당대표 취임사(2012.10.21.)와 당대표 퇴임 고별사(2013.7.21.)에서 "6411번 버스를 아시나요?"라며 투명인간 분들을 구체적으로 호명한다. 이번 글에서는 '도시빈민'과 관련한 노회찬의 이야기와 그들의 '지금·여기' 삶의 현주소를 하나씩 살펴보기로 한다. - 기자말 

2020년 1월 조돈문(노회찬재단 이사장)은 <시사IN>을 만나 이런 대화를 나눈다(<시사인>, 648호, 2020.2.19.).


- 노회찬 전 의원이 내성적인 성품이었다는데?

"낯을 많이 가렸다. 천성이 수줍었다. 그런데 진보정치를 하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통합력이 큰 정치를 한 사람이 노회찬이다. 2004년 민주노동당이 총선을 치를 때 농민단체, 빈민단체 등 다양한 세력을 포섭한 게 노회찬 작품이다. 수줍어하고 낯가리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역할을 했을까? 그건 목적의식이다. 진보정치를 성공시키기 위해 자기 몸에 맞지 않는 방식으로, 의무감에서 했던 것이다. 일종의 사회적 자아가 있었다고 본다. 노 전 의원은 스스로를 객관적 입장에서 평가하고 그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
       

노회찬의 마지막 정치적 거처였던 정의당 강령에도 빈민이 등장한다. ⓒ 노회찬재단

 
변영주 영화감독과의 대화에서 노회찬이 "고난의 세월 끝에 당은 창당됐는데, 저는 진심으로 너무 기뻤습니다. 그때 어떤 생각이었냐면, 제 인생의 목표의 반은 이루어졌다, 반이나 이루어졌다. 창당을 한 것만으로도"라고 말한, 민주노동당 창당(2000.1.30.) 당시 강령 전문('민주 평등 해방의 새 세상을 향하여')을 보면 이런 글귀가 있다.

"민주노동당은 3·1 민족해방운동, 4·19와 5·18 민중항쟁, 6월 민중항쟁과 노동자 총파업 등 도도히 이어져 온 민중투쟁사의 계승자로서, 노동자, 농민, 영세상공인, 도시빈민, 여성, 청년과 학생, 양심적 지식인의 지혜와 힘을 모아 희망찬 민중 세상을 열어갈 역사적 책무를 부여받고 있다."

"한국에 도입된 자본주의는 폭압적인 군사독재와 정경유착에 힘입어 급속한 팽창을 이루었다. 이러한 한국 자본주의의 이면에는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의 고통, 저곡가 정책에 내몰린 농민의 희생, 기본 생존권마저 위협받는 도시빈민의 좌절, 그리고 최소한의 인권조차 처참하게 유린당해 온 민중의 분노가 쌓여 있다."


노회찬이 상임공동대표, 대표로 활동한 진보신당 창당(2008.3.16.) 선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제 우리 각자는 진보정당을 시작한 첫 마음으로, 진보정치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 여기 모였습니다. 우리가 곧 비정규직 노동자이고 장기투쟁 노동자입니다. 우리 자신이 농민이고 영세상인이며, 노점상이고 빈민입니다. 우리부터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노동자여야 합니다. 가난하고 차별받고 평범한 사람들의 연대가 우리의 생명줄입니다."

노회찬의 마지막 정치적 거처였던 정의당 강령에도 빈민이 등장한다.

"대한민국은 지금 행복하지 않다. 양극화와 불평등은 점점 극심해지고 있다. 개발독재의 특권과 특혜가 키워낸 거대 재벌은 독식 성장을 계속해 왔다. 반면 노동자의 삶은 더욱 위태로워졌고 농민과 빈민은 희생되었으며 중소기업과 영세 자영업자는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완벽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좋은 사람이어서 형을 좋아했어요. 다음 생은 저도 더 좋은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어요. 그때는, 만나는 첫 순간부터 형이라고 할게요."라며 노회찬의 떠남을 마음으로 많이 아파한, 노회찬과 통합진보당과 진보정의당 활동을 함께 한 유시민의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푸른나무, 1992)의 '에필로그: 아직도 끝나지 않은 논쟁'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오늘의 이야기 주제인 <빈민>과 '빈민의 경제학'에서 '빈민'이 그 결은 다를지 모르지만, 큰 맥락에서 일정한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싶어서 30년 전 출간된 책 내용의 일부를 옮겨본다.

"대중을 빈곤으로부터 구제할 수 없다는 사고방식은 이제는 과학의 이름으로 합리화될 수 없는 '부자의 편견'에 불과하다. … 자유방임시장과 계획경제를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고 벌인 논쟁 역시 의미를 잃었다. 그 둘 모두는 선도 아니며 또한 악도 아니다. 어떠한 국민경제도 자유방임과 계획을 겸비하지 않고서는 존립할 수 없다. … 경제는 정치와 분리될 수 없으며 어떤 경제법칙도 인간의 의지와 동떨어진 순수한 자연법칙일 수는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결코 신성하고 영원한 체제일 수는 없게 되었으며, 동시에 문제는 많지만 당장은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빈민의 경제학'과 '부자의 경제학' 사이의 싸움 역시 사활을 건 체제논쟁으로부터 좀 더 구체적이고 다양한 정책논쟁으로 전환하고 있다."


한국 도시화와 도시빈민의 형성

도시빈민(urban poverty)은 도시 거주민으로서 저소득 또는 저자산 등 빈곤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뜻하는 표현으로, 도시지역 거주 빈민이라 할 수 있기에 도시화 현상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근대 이후의 도시화는 주로 자본주의 사회의 성립과 관련되며 한국에서도 일제강점기 근대 자본주의 유입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한국에서 근대적 의미의 도시빈민의 시초는 일제강점기의 '토막(土幕)민'으로 평가된다. 토막민 성립 시기는 대체로 1919년 이후로 추정되며 일제강점기 경성부에서는 토막민을 "하천부지나 임야 등 관유지·사유지를 무단 점거해 거주하는 자"라고 규정했다. 1940년 말 경성부 사회과 자료에 의하면, 공식적인 토막민의 숫자는 1만 6,344명, 비공식적으로는 3만6000여 명에 이르렀다. 지속적인 토막민의 증가로 경성부는 교외지역인 홍제정·돈암정·가현정 등에 토막 수용지를 설정해 부내에 산재하는 토막민을 수용했으며, 이는 이후 달동네를 형성하는 근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도시빈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도시빈민은 1945년 해방 이후 폭증했다. 일제강점기 해외로 이주했던 수백만의 사람들이 돌아오면서 상당수가 도시지역에 정착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분단과 한국전쟁은 또 한 번 도시빈민이 급증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전쟁을 통해 북한지역에서 대거 피난민이 몰려들었고, 별다른 연고가 없던 이들은 주로 도시지역에서 새로운 삶을 모색하게 되었다.

노회찬이 태어난 부산을 보면, 한국전쟁 직전 47만여 명이었던 인구가 1.4후퇴 이후 84만여 명으로, 전쟁이 끝나자 100만여 명으로 급증하였다. 증가한 인구는 부산 토박이보다 전쟁 때문에 이북이나 다른 지역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왼쪽은 1960년 부산 초량 판자촌. 오른쪽은 1960년대 부산 산복도로 일대 전경. 산동네들을 연결하는 부산 산복도로는 1964년 부산 동구 초량동에서 처음으로 개통. (초량동은 노회찬의 출생지로 어린 시절 뛰놀던 곳) ⓒ 부산동구청

 
그러나 한국에서 대규모의 도시빈민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은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 추진과 산업화 이후였다. 1960년 244만 명에 불과했던 서울 인구는 1963년 325만4600명의 인구를 기록, 처음으로 거대도시의 면모를 갖춘다. 이후 서울은 1970년 543만3200명, 1976년 725만5000명, 1983년 920만4000명을 기록하며 1963~1983년 20년 동안 600만명 가까운 인구가 늘어난다.

이러한 현상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다른 지역의 대도시에서도 반복되는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1970년대 중반 전체 인구 중 도시 거주 비율이 50%를 넘어서게 되었다. 산업화에 따른 이촌향도(離村向都)가 도시화의 주된 원인이었고, 이들 이촌향도민들이 도시빈민의 대부분을 이루었다.

서울이 초고밀도 도시가 되어가면서 다양한 문제가 불거지자 안양, 성남, 부천 등의 위성도시가 들어서게 되었고, 도시빈민은 수도권 전체로 확산되었다. 특히 광주대단지로 출발한 성남시는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광주대단지'로 조성된 1970년대 성남시 모습 ⓒ 성남시청

  
1970년 서울의 무허가 판자촌에 거주하던 10만여 명의 도시빈민을 강제적으로 이주시킨 광주대단지는 구릉지대에 천막만 설치해 놓은 '버려진' 곳이었다. 수도, 전기, 도로, 화장실 등 아무런 기본적인 생활기반은 물론 생계수단조차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토지대금 일시 납부와 세금 징수를 독촉받자 주민들의 불만과 분노가 폭발해 대규모 대중봉기가 발생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최초의 도시빈민 투쟁으로, '광주대단지 사건'으로 불리는 이 봉기는 도시화와 도시빈민 문제가 집중되어 발생한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와 관련해 한겨레(2018.11.14.)는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언론을 통제해 이 사건을 폭도들에 의한 '난동'으로 몰았다. 심지어 자체 부대를 편성해 시민을 진압할 계획까지 세웠다. 박정희 정권에게 도시빈민은 구제해야 할 대상이 아닌 판잣집과 함께 '버려야 할 존재'일 뿐이었다."
 

광주대단지 사건 이후로도 도시화와 이촌향도는 지속적으로 진행되었고, 도시빈민 문제 또한 여전했다. 1980년대 이후에는 도심지 재개발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철거반대 투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상계동, 사당동 등은 대표적인 철거반대 투쟁이 전개된 지역이었다. 

조세희 작가의 <난쏘공>과 '낙원동'에 아직 도착하지 않은 우리들

도시빈민을 다룬 소설을 꼽으라면 아마도 조세희 선생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아래 '난쏘공')>을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에 꼽지 않을까 싶다. 조세희의 <난쏘공>은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도시하층민의 고통을 간결한 문체와 환상적 분위기로 잡아낸 명작'이라는 평을 들어왔다.

조세희는 "사람이 태어나서 누구나 한번 피 마르게 아파서 소리 지르는 때가 있는데, 그 진실한 절규를 모은 게 역사요, 그 자신이 너무 아파서 지른 간절하고 피맺힌 절규가 <난쏘공>이었다"다고 말했다. 책에는 이런 대목도 있었다.

"햄릿을 읽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교육받은) 사람들이 이웃집에서 받고 있는 인간적 절망에 대해 눈물짓는 능력은 마비당하고, 또 상실당한 것은 아닐까?"
 

소설 <난쏘공> 속의 철거 계고장과 철거 확인원 ⓒ 조세희

  
노회찬과 조세희 선생은 노회찬마들연구소의 4회 명사초청특강(2008.12.3.)에서 만나 이런 말을 나눴다.

노회찬) "<난쏘공>은 연속 단편입니다. 첫 단편이 쓰인 때가 1975년입니다. 그러니까 33년이나 된 셈입니다. 몇 쇄를 찍었고, 몇 만부가 팔렸는지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초판이 출간된 뒤 100쇄를 찍는 데는 18년이 걸렸고, 100쇄에서 200쇄로 가는 데는 9년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소설 등 문학은 시대를 반영합니다. 보통 시간이 지날수록 잊히는데 <난쏘공>의 경우 시간이 지날수록 (독자들이)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난쏘공의) 문학성과 그 노선이 전하는 메시지가 우리 현실 속에서 절실하게 와 닿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강연의 주제가 '2008년, 우리 시대 난장이'인데 지금 80% 이상이 그 난장이의 처지에 있습니다."

조세희) "노회찬 전 의원이 어떻게 저를 불러냈느냐? 제가 신세를 졌어요. 우리에게 변화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쓰는 말이 달라져야 합니다. 말은 생각이에요. 노회찬 전 의원을 두고 '스타가 나왔다'고 하는데 그건 바보의 언어예요. 노회찬 전 의원이 다른 언어를 사용했어요. 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노 전 의원에게) 신세를 진 거지요. 노회찬 전 의원은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언어를 쓰고 있었어요.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하는 특별한 말들을 쓰고 있었어요. 뛰어난 언어였어요. 노 전 의원과 저는 동급이 아니에요. 저는 제 고집의 언어를 썼어요."


이를 기사화한 <오마이뉴스>의 구영식 기자는 이렇게 마무리했다("노회찬 형을 위해 한 가지는 해야겠네": [정치人/in] 노회찬과 조세희, 그리고 마들연구소, <오마이뉴스>, 2008.12.12.).

"그(조세희)는 특강 말미에 이런 말을 했다. '이 땅에서 바로 이 시간에 행복하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음 두 부류 중 하나다. 하나는 도둑이고 하나는 바보다.' 우리는 아직도 '낙원동'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아마도 조(세희)씨는 노 대표가 그런 슬픈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조세희 선생이 꿈꾼 '낙원구 행복동'을 노회찬 식으로 표현한다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동존중사회, 선진복지국가', '누구나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닐까 싶다. 노회찬은 그런 세상을 좀 더 앞당기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
 

2008년 12월, 노회찬마들연구소의 4회 명사초청특강에서 만난 노회찬과 조세희 선생의 모습(2008.12.3.) ⓒ 노회찬재단

 
기록연재 | 조현연 노회찬재단 특임이사

(*다음기사 [6411 투명인간과 약자들의 벗 노회찬] 도시빈민과 노회찬 ②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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