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서울을 떠났을까. 지난 18일 개봉한 영화 <정말 먼 곳>에 주요 인물인 진우(강길우)와 현민(홍경)의 사연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강원도 화천 깊은 시골 마을에서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며 인생 2막을 살게 된 두 사람은 이윽고 자신의 성 정체성이 까발려지며 그곳에서도 궁지에 몰린다. 

사랑의 형태나 방법에서도 어떤 혐오나 차별이 발생한다는 아픈 현실을 영화는 아름다운 화면 곳곳에 녹여냈다. 진우가 세간의 반응에 민감하고 그만큼 여리기에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사는 인물이라면, 현민은 제법 당당하다. 애정 표현을 숨기지 않으며 주변 반응에도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 배우 홍경은 "어디서 살든 견디고 초연할 수 있는 법을 터득한 인물 같았다"며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이 연기한 현민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만들어 갔는지 소개했다.

<정말 먼 곳>의 현민, 그리고 <결백> 속 정수

"현민에겐 여러 상처로 다져진 보호막이 있을 것 같았다. 시인이기 전에 한 사람으로서 서울에서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는지 상상했고,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감독님과 얘길 많이 했다. 실제 성소자 분을 만나거나 관련 작품을 찾아보진 않았다. 연기라는 게 제가 가진 걸 자연스럽게 녹이는 작업이라 생각하거든. 나도 모르게 다른 배우, 다른 인물을 따라가기 쉽기에 제가 아직 부족하고 서툴지만 진심 어린 제 마음에 집중했다."

동성을 사랑한다는 점에서 온갖 차별과 혐오의 경험을 했을 현민와 진우지만 진우와 달리 현민의 내면은 단단해 보였다. 영화 제목처럼 진우는 정말 먼 곳으로 떠났고, 현민에겐 떠나는 장소보단 함께 하는 사람이 더 중요해 보였다. 그렇게 영화에서 두 캐릭터의 온도 차가 생겨난다. 

생각해보면 홍경의 장편 영화 데뷔작 <결백> 속 캐릭터 또한 일종의 사회적 약자이자 소수자였다.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정수, 그리고 현민을 두고 홍경은 "(어떤 캐릭터라도) 결국 제 안에서 나올 수밖에 없기에 진심을 담아 표현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제 데뷔한 지 4년 차인 신인 배우임에도 제법 단단한 내공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자폐 스펙트럼이든 동성애자든) 실제 그 분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는 알아보려 노력했다. 주변 얘기도 많이 듣고, 방송 등을 통해 나온 이야기도 봤다. 하지만 동시에 조금은 떨어져서 바라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제가 좋아하는 선배들 인터뷰 읽는 걸 좋아하는데 한 선배님께서 자신과 맞닿아 있지 않은 인물은 연기할 때 그 인물을 전부 이해하려 하기 보단 나와 공통적인 한 부분을 발견하는 것 자체가 큰 수확이라 하신 말씀이 있다.

날 다 열어놓고 (현민과 공통의 부분을) 발견하려 노력했다. 이 친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환경에서 살았고, 어떤 관계에 놓였는지 등. 물론 발견한다고 끝이 아니라 관객분들을 설득시켜야 하잖나. 제가 아직 어리고 경험이 많지 않은 루키지만 시나리오에 써있는 인물이 내 옆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하나하나 알아가려고, 그 이면에 있는 걸 보려고 노력했다." 
 
   
 
실제 촬영 현장서 홍경은 선배 강길우와 함께 인근 방갈로에서 약 한 달간 합숙했다. 그렇게 일상과 현장을 연결해 감정선을 만들어 간 게 좋은 연기라는 결과물로 나온 게 아닐까. 또한 데뷔작과 두 번째 영화에서 모두 사회적 차별을 받는 소수자를 연기했다는 것에 홍경은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듯 보였다. 잠시 생각한 뒤 그는 '용기'라는 단어를 꺼냈다.

"<결백> 때도 느낀 건데 그들과 우리가 전혀 다르지 않다는 걸 인정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사실 혐오라는 게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데 다르지 않다는 걸 받아들일 용기가 필요한 듯하다. 개인적으론 귀를 기울이고, 좀 더 넓은 시야를 가지려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모인 사회기에 어느 특정 사람들 취향만 존재하는 게 아니잖나. 인터뷰하면서 저 또한 생각을 하나하나 되짚게 되는 것 같다."

쌓아온 작품 10여 편, 그리고 4년

데뷔 후 드라마, 영화 통틀어 그가 쌓아온 작품이 10편 남짓이다. 4년이라는 시간, 그가 신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적지 않은 수다. "10편이라고 하면 많이 한 것 같은데 <정말 먼 곳>에 함께 하신 기주봉 선배님을 보면 저보다 수십 배"라며 그는 "여전히 제 갈 길이 멀다"며 웃으며 말했다.

"절 공식적으로 알린 게 2017년 드라마지만 그 전부터 단편영화와 독립영화로 경험치를 쌓아왔다. 어렸을 때부터 학교 끝나고 극장 가는 게 일종의 일상이었는데 아무래도 배우의 연기가 가장 눈에 들어오기 쉽잖나. 제가 봤던 배우가 다른 작품에선 전혀 새로운 연기를 하는 걸 보며 마음에서 꿈을 키우기 시작한 것 같다.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 말에 좋은 연기 선생님을 만났다. 어떤 기술적인 것보다 글 안에 담긴 배역을 어떻게 알아가고 이해할 것인지에 대해 알려주셨다. 캐릭터 안에서 나란 사람을 어찌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는지 일종의 거울을 들어주신 분이다. 그 과정서 단편을 경험하면서 욕심이 생겼다. 그리고 운이 좋아서 부모님 또한 제가 처음으로 뭔가 하고 싶어한다는 것에 지지해주셨다. 그런 믿음이 없었으면 아마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홍경은 스스로 다른 20대들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고 말했다. 20대 들어 편의점, 식당 아르바이트도 곧잘 했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평소에 소설책 읽기와 사진 찍기, 그리고 그림 그리기가 취미였다. 여기엔 사람에 대한 그의 관찰력, 그리고 연기에 대한 갈증이 반영돼 있었다.

"소설도 1인칭 주인공 시점을 좋아하고 사진과 그림도 인물을 다루는 걸 좋아한다.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것 같다. 연기가 참 재밌는데 너무 어렵다. 이게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 잘 설명하긴 어렵다(웃음). 뭔가 카멜레온 같을 배우가 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진 않지만 제가 10대, 20대에 겪은 것들, 그리고 우리 세대가 겪는 걸 잘 담아내고 싶다. 이 사회에서 우리 세대가 숨 쉬는 걸 잘 표현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

제 경험이 제 또래가 겪는 것과 다 같다고 말하긴 조심스럽지만, 여러 매체에서 다루듯 힘든 세대라는 것에는 동의한다. 취업난도 그렇고, 굉장히 변화가 빠른 시기를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어느 세대나 마찬가지일 텐데 빠른 변화에 우리 세대가 가장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생각한다. 터지기 직전 풍선처럼. 하나가 터지면 또 하나가 생겨나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지금의 20대는 격동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최근 홍경은 넷플릭스 드라마 < D.P > 촬영을 마쳤다. "다음 작품을 알아보며 준비하고 있다"며 그는 "영화와 연극 등 매체를 가리지 않고 새로운 걸 발견하고 쏟아내고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을 만나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폭 넓은 그의 활약을 기대해봐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