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뜰한 당신>을 부른 황금심, <연락선은 떠난다>를 부른 장세정, <슈샨 보이>를 부른 박단마, 그리고 <오빠는 풍각쟁이>를 부른 박향림. 지금도 그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이 가수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다들 세상을 떠나긴 했지만, 2021년이 바로 이들의 탄생 100년이 되는 해라는 점이다.

황금심은 호적에 1922년생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한데, 사실상 이들 모두 1921년에 태어난 닭띠 동갑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이처럼 쟁쟁한 여성 가수들이 두드러져 보이는 가운데, 탄생 100년 인물로 역시 빠뜨릴 수 없는 남성 작곡가도 있으니, 그가 바로 나화랑이다.

1921년 1월 25일(양력인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난 나화랑은, 일본 음악학교 유학을 다녀온 뒤 1942년에 가수로 먼저 데뷔했다가 곧 작곡으로 활동 영역을 옮겼다. 이후 1983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40년 동안 많은 히트작을 발표하며 대중음악 작곡가로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1950년대 나화랑 모습

1950년대 나화랑 모습

가수 이미자가 이름을 알리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열아홉 순정>(데뷔곡은 아니다), '가요황제' 남인수가 타계 2년 전에 발표한 마지막 인기곡 <무너진 사랑탑>, 내리는 비의 온도까지 알게 해 준 가사 '비가 오도다'로 회자되던 <비의 탱고>, 1960년대 대표 가수 남일해의 <이정표>와 김상희의 <울산 큰애기> 등,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유명 작품만 꼽아도 열 손가락이 금방 모자랄 만큼 나화랑의 음악 이력은 화려하다. 만약 1950~1960년대 대중음악사에서 그의 작품이 모두 사라진다면, 당연히 큰 공백이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정 스타일에 치우침 없이 다양한 곡들을 만든 나화랑이었지만, 그가 선보인 음악에서 특히 주목을 받는 것이 민요 관련 작업이다. 연주에 서양악기를 도입하는 '한양합주'와 새로운 편곡으로 민요 대중화에 많은 성과를 낸 것은 물론, <뽕 따러 가세> 같은 민요풍 대중가요, 즉 신민요를 여럿 히트시키기도 했다. 또한 <도라지 맘보>, <닐니리 맘보>처럼 민요 소재와 라틴 리듬을 엮은 작품으로 한 시절 유행을 이끈 이도 나화랑이었다.
 
 1957년에 발표된 <닐니리 맘보> 음반 딱지

1957년에 발표된 <닐니리 맘보> 음반 딱지


나화랑은 또 손꼽히는 음악가족의 핵심이기도 하다. <나그네 설움>, <고향에 찾아와도> 등 명작 가사를 남긴 작사가 겸 극작가 고려성이 그의 형, 1960년대에 활약한 가수 유성희는 그의 아내였다. 그리고 형제 음악가로 유명한 조규천·조규만·조규찬이 바로 나화랑의 음악 재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아들들이다.

그런데, 이처럼 다채로운 나화랑의 이력 중 데뷔 시절에 관해서는 분명한 오류 또는 사실과 다를 가능성이 높은 내용들이 여럿 확인되기도 한다. 예컨대 10년 전 탄생 90년을 기념해 김천시 지원으로 제작된 음반에서는 나화랑의 가수 데뷔곡 <청춘 번지>를 수록하면서 그가 직접 작곡한 것으로 소개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1942년에 발표된 <청춘 번지>는 앞서 1940년 일본에서 먼저 발표된 <남경의 꽃 파는 아가씨(南京の花賣娘)>와 같은 곡조, 즉 번안곡이다. 작곡자도 당연히 나화랑이 아닌 우에하라 겐토(上原げんと)라는 일본 작가이다. 이러한 오류는 역시 김천시 지원으로 2014년에 간행된 평전에서도 그대로 반복되었다.
 
 나화랑의 가수 데뷔곡 <청춘 번지> 광고

나화랑의 가수 데뷔곡 <청춘 번지> 광고


평전에서는 또 나화랑이 작곡가로 발표한 첫 작품을 <삼각산 손님>으로 소개했는데, 이 역시 오류일 가능성이 있다. 나화랑 본인도 1981년 회갑 기념으로 펴낸 작품집에서 <삼각산 손님>을 작곡 데뷔작으로 기록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단정해 볼 수만은 없는 다른 자료가 있기 때문이다.

<삼각산 손님>보다 1년 앞서 발표된 <만경뜰 길손>이라는 노래에 작곡자로 표기된 '조응환(曺應煥)'이 나화랑의 본명 '조광환(曺曠煥)'의 오기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당시 작곡가 중 조응환이란 이름을 찾아볼 수 없는 데다, 비슷한 한자를 쓰는 이름에 대한 오기는 이따금 보이는 실수이기도 하다. 명확한 근거가 아직 발견되지 않아 추정에 그치는 상황이지만, 이에 관해서는 앞으로 가사지나 월보 등 추가 자료가 발굴되면 오류 여부가 분명히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청춘 번지>와 함께 발표된 <만경뜰 길손> 음반 딱지

<청춘 번지>와 함께 발표된 <만경뜰 길손> 음반 딱지


데뷔곡 문제 외에 나화랑이 가수가 되기 위해 출전했던 콩쿠르 관련 내용에도 사실과 다른 기술이 있다. 평전에서는 1940년 5월에 개최된 콩쿠르에 나화랑이 출전, 입상한 것으로 소개했으나, 나화랑이 출전한 대회는 1942년 4월쯤에 개최되었다. 1940년 콩쿠르는 5월이 아닌 9월에 개최되었고, 그때 나화랑은 유학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있었다.

이상 간단히 짚어 본 세 가지 외에도 발견되는 오류, 특히 인터넷상에 떠돌아다니는 오류는 상당히 많은 편이다. 뜻깊은 탄생 100년을 맞아 그와 그의 노래를 기억하고 이런저런 방법으로 기념하는 것도 물론 좋은 일이지만, 기왕의 오류를 바로잡는 것도 꼭 필요한 일이다. '100년 작곡가'에 대한 의미 있는 재조명은 그렇게 소소한 것들을 챙기는 데에서 시작도 되고 완성도 된다.
나화랑 태평레코드 김천시 조광환 무너진 사랑탑
댓글5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노래를 찾는 사람, 노래로 역사를 쓰는 사람, 노래로 세상을 보는 사람.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