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25 16:13최종 업데이트 20.12.25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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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남서부의 보르도(Bordeaux)는 와인 애호가에게는 너무나 유명한 프랑스 최대의 포도 재배지역이다. 와인 초짜 시절에 나는 보르도와 부르고뉴를 종종 헷갈렸다. 둘 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포도 재배지역인 데다가 발음도 '보'와 '부'로 비슷하게 시작하니 더욱 그랬다.

지금이야 두 지역의 차이를 대충은 안다. 부르고뉴는 피노 누아(레드 와인), 샤르도네(화이트 와인) 포도를 주 품종으로 와인을 만들며 섬세하고 우아한 풍미가 일품이고, 보르도는 메를로, 카베르네 소비뇽이 주 품종인 레드 와인을 주로 생산하는데 상대적으로 강한 타닌과 장기 숙성력이 돋보인다. 물론 보르도에서도 화이트, 로제, 스위트 와인 등을 생산하지만 전체 생산량 80%가량은 레드 와인이 차지하고 있다.

예전에 어디선가 어설프게 주워듣고는, 보르도의 '5대 샤토'가 독수리 오형제처럼 세계에서 가장 비싸고 좋은 다섯 와인인 줄로 착각한 적도 있다. 지금이야 '5대 샤토'보다도 높은 평가를 받고 가격도 더 비싼 레드 와인의 이름을 줄줄 읊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르도 '5대 샤토'의 대표성과 상징성 및 대중적 인지도는 쉽게 무시할 수 없다.
 

왼쪽 부터 샤토 라피트 로칠드, 샤토 라투르, 샤토 마고, 샤토 무통 로칠드, 샤토 오 브리옹이다. ⓒ 고정미

 
■ 5대 샤토 (12월 21일 와인서쳐 앱 기준으로 가격 높은 순서)
샤토 라피트 로칠드 (세전 107만454원)
샤토 라투르 (세전 94만4090원)
샤토 마고 (세전 84만8937원)
샤토 무통 로칠드 (세전 78만6464원)
샤토 오 브리옹 (세전 71만3643원)

   
'5대 샤토' 보다 비싼 보르도 와인, 왜 등급에 없을까

보르도 '5대 샤토'의 공식적인 기원은 1855년의 파리 엑스포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는 파리 엑스포에 최고급 보르도 와인을 전시하기 위해 보르도 상공회의소에 고급 와인을 따로 분류해달라고 요청했다.


보르도 상공회의소는 보르도에서도 지롱드 강 좌안의 메독(Médoc) 지역 와인을 위주로 가격순으로 등급을 매겼는데, 그 이유는 해당 지역이 보르도 상공회의소의 관할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보르도 전체 와인을 대상으로 등급을 매긴 것이 아니라는 점을 꼭 기억하자.

레드 와인의 경우 57개의 샤토(포도원)가 우수한 품질을 인정받아 그랑 크뤼로 지정되었으며(지금은 61개), 이 57개를 다시 1등급부터 5등급까지 5개의 등급으로 나눴다. 그중 1등급(Premiers Crûs)에 속하는 와인이 네 개였으니 바로 샤토 라피트 로칠드, 샤토 라투르, 샤토 마고, 샤토 오 브리옹이다.

어? 그런데 왜 5대 샤토냐고? 샤토 무통 로칠드가 118년이 지난 1973년에야 1등급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61개의 그랑 크뤼 레드 와인 중에서 1등급을 받은 샤토 오 브리옹(그라브 지역)을 제외하고는 모두 메독 지역의 와인이다.

나는 예전에 1855년의 등급체계가 보르도 와인 전체를 대상으로 한 분류로 착각해서, 페트뤼스, 르 팽처럼 '5대 샤토'보다 세 배 이상 비싼 보르도 와인이 왜 등급에 없는지 궁금했다.

앞서 얘기했듯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하는 1855년 보르도 레드 와인 등급체계는 보르도 지역을 가로질러 흐르는 지롱드 강의 좌안 지역, 그중에서도 메독을 중심으로 분류한다. 페트뤼스, 르 팽 등은 지롱드 강 우안 지역에 위치했으며 그곳은 리부른(Libourne) 상공회의소의 관할이니, 1855년 등급체계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등급에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1855년 당시 샤토 무통 로칠드는 1등급에 충분히 들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하고 가격도 높았다. 하지만 1853년에 영국인 너새니얼 드 로스차일드(Nathaniel de Rothschild) 남작(Baron)이 이 포도원을 인수했기 때문에 자존심 강한 프랑스인들이 영국인 소유의 포도원을 1등급에서 제외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포도원의 옛 이름은 샤토 브랑 무통(Château Brane Mouton)이었는데, 너새니얼 드 로스차일드 남작이 인수한 후 명칭을 샤토 무통 로칠드(Château Mouton Rothschild)로 변경했다. 로칠드는 로스차일드의 프랑스 발음이다. 음모론에 단골로 등장하는 그 로스차일드 가문 맞다.

그러면 샤토 라피트 로칠드도 로스차일드 가문 소유인데 어떻게 최고 등급이 될 수 있었느냐고? 나도 궁금해서 찾아보니, 로스차일드 가문의 제임스 메이어 드 로스차일드(James Mayer de Rothschild) 남작이 샤토 라피트 포도원을 구입한 해는 1868년이다. 그러니 1855년 등급 지정 때는 로스차일드 가문 소유가 아니었다.

게다가 같은 로스차일드 가문이어도 너새니얼은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지만 제임스 메이어는 독일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했다. 알다시피 로스차일드 가문은 유태계 '다국적' 금융재벌이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1973년 샤토 무통 로칠드는 1등급으로 승급되었다. 이때부터 '5대 샤토'가 되었다.

사실 1855년에 제정된 등급체계가 변화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비판은 꾸준히 있었다. 예컨대 샤토 랭쉬 바쥬, 샤토 뽕떼 까네의 경우 최근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가격도 2등급 수준이지만 여전히 공식적으로는 5등급에 속한다. 현실에 맞게 등급을 조절하면 샤토 랭쉬 바쥬나 샤토 뽕떼 까네는 2등급 승급이 유력할 것이다.

하지만 하향 평가를 받은 와인의 경우 가격 하락이 예상되기 때문에, 샤토(포도원) 입장에서는 민감하고 예민한 문제다. 게다가 샤토 무통 로칠드가 118년에 걸친 갖은 노력 끝에 간신히 1등급으로 올라설 수 있었으니 얼마나 보수적인 분위기인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는 자신의 저서에서 1855년 등급체계는 실효성이 떨어진다며 지롱드 강 좌안과 우안 지역을 포괄하는 자신만의 5등급 체계를 제시했다. 런던국제와인거래소(London International Vintners Exchange)는 1855년 등급체계가 가격을 기준으로 했음에 착안해, 최근 와인 거래 가격을 기준으로 보르도 와인 등급을 재산정해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관심이 있다면 런던국제와인거래소 홈페이지(https://www.liv-ex.com)에서 직접 확인 가능하다. 참고로 지롱드 강 좌안의 그라브 지역, 우안의 생테밀리옹 지역에는 나름의 등급체계가 있지만 그것까지 언급하면 피차 머리 아픈 상황이 초래될 수 있으므로 그냥 넘어가자.

보르도 와인의 '진정한 맛'을 담았다는 리베르 파테르

그나저나 '5대 샤토'가 보르도에서 가장 비싸지는 않다고 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렇다면 보르도에서 가장 비싼 와인은 무엇일까? 역시 지롱드 강 우안에 위치한 포므롤 마을의 그 위풍당당한 페트뤼스, 혹은 르 팽?

나도 얼마 전까지는 페트뤼스와 르 팽이 각각 1등, 2등인 줄 알았다. 둘 다 와인서쳐 앱 기준으로 해외 평균 거래가(세금 제외)가 400만 원에 육박하니 말이다. 병당 가격으로 5대 샤토를 합산해야 견줄 수준 아닌가. 그런데 가격으로 이 둘을 제친 보르도 와인이 있다. 바로 지롱드 강 좌안 그라브 지역의 리베르 파테르(Liber Pater)라는 신생 와인이다.
 

리베르 파테르(Liber Pater) ⓒ 고정미

 
이 와인의 해외 평균 거래가(세금 제외)는 무려 500만 원에 육박하며, 2015 빈티지의 경우 무려 병당 4000만 원에 거래된다. 도대체 이 갑툭튀 와인의 정체는 무엇일까? 리베르 파테르의 소유주이자 양조자인 로익 파스케(Loïc Pasquet)의 목표는 프랑스 보르도 와인의 진정한 맛을 되살리자는 것이다. 진정한 맛이라니? 그렇다면 자기 빼고는 다 가짜라는 말인데, 이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

로익 파스케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세기 후반에 유럽 포도나무 대부분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진딧물의 일종인 '필록세라(Phylloxera)'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필록세라의 원산지는 북미대륙인데 19세기에 포도나무 품종 개량을 위해 북미 자생종 포도나무를 유럽으로 들이는 과정에서 유입됐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필록세라에 내성이 없었던 유럽 포도밭은 그야말로 초토화되었다.

프랑스에서는 필록세라에 대응하기 위해, 면역력을 가진 북미 자생종 포도나무의 뿌리에 프랑스 포도나무 줄기를 접붙여서 농사를 짓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필록세라에 강한 품종만이 살아남고, 보르도 전통 품종들이 점점 포도밭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로익 파스케는 필록세라 이전의 보르도 와인 맛을 재현하기 위해 접붙이기 방식이 아니라 뿌리부터 줄기까지 프랑스 본연의 포도나무를 이용하고, 심지어 과거 보르도의 포도 농사 방식을 현대에 재현했다. 19세기 보르도 와인의 진정한 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하니 세계적인 부호들이 앞 다투어 사들이는 와인이 되었는데, 수요에 비해 생산량은 극히 적으니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리베르 파테르를 보면 바흐, 헨델,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시절의 소리를 재현하기 위해 악기부터 연주 주법까지 까뒤집는 깐깐한 시대연주가 떠오른다. 존 엘리엇 가디너,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같은 음악가들이 큰 족적을 남긴 시대연주의 와인 버전이 리베르 파테르가 아닐까.

이것이 한때의 미풍으로 그칠지, 아니면 와인계의 혁명을 일으킬지는 결국 사람의 코와 혀에 얼마나 감동을 줄지에 달릴 것이다. 솔직히 궁금하긴 한데, 내가 리베르 파테르를 마시는 상황은 이번 생애에는 어렵지 싶다.

아참! 중요한 것을 하나 빠뜨렸네. 앞선 연재 글에서 (보르도가 아니고) 부르고뉴 와인의 등급체계를 다룬 적이 있는데, 그때 부르고뉴에서 프리미에 크뤼와 그랑 크뤼 등급은 품질이 좋은 포도를 생산하는 '포도밭'에 부여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관련 기사 : 백화점 와인 매니저와 와인 초짜의 이불킥할 대화]
[관련 기사 : 같은 포도밭 와인인데 70만원대부터 2천만원까지... 왜죠?]

하지만 보르도의 경우는 포도밭이 아니라 샤토(포도원)에 등급을 부여한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부르고뉴는 포도밭에 등급을 부여하기 때문에 그랑 크뤼 밭의 양조자가 다른 밭을 구매해서 와인 생산을 늘리더라도 해당 와인은 그랑 크뤼 등급을 받을 수 없다. 밭이 다르니까.

반면 보르도에서는 1등급 샤토(포도원)가 인근의 포도밭을 구매해 생산량을 늘리면 그 와인도 1등급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밭이 아니라 해당 샤토에게 등급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부르고뉴 와인이 보르도 와인보다 훨씬 비싼 이유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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