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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꽃처럼 웃네."

나의 미소를 꽃에 비유해 심쿵 대사를 해주는 이는 8살 동글이다. 연애때부터 지금까지 남편에게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런 이야기를 아이는 내게 해준다.

"동글이는 어디든 여행갈 수 있는 버스표가 있다면 어디에 가고 싶어?"
"엄마 마음 속으로~"


달달 로맨스가 가끔 벌어진다는 게 함정이긴 하다. '왜 엄마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데, 엄마가 다 정하고 말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라며 엄마 속 안과 밖을 뒤집어 놓는 일이 빈번하지만, 더 이상 못해먹겠다 할 때쯤 동글이의 심쿵 대사에 마음이 녹는다.

그림자로만 살기 싫었던 육아기

근무하던 학교에서 과로로 인한 잔병치레를 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마음이 지쳐서 몸이 보내는 신호였는데 당시에는 몰랐다. 불면증과 그로 인한 잔병들 때문에 1년간 휴직했지만 악순환을 끊어내지 못하고 결국 퇴직했다.

결혼 후 주말 부부로 지내다 퇴직 후 집에서 쉬게 되니 바로 임신을 했다. 남편은 학생이었고 나는 퇴직한 상태였기에 우리 부부는 아이를 맞을 마음의 준비도 현실적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결혼을 했으니 임신과 출산을 하리라 막연히 생각했을 뿐 가족 계획을 하지도 않았고 육아에 대해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

무방비 상태에서 임신과 출산을 하고 육아가 시작됐다. 보통 임신을 하면 태교를 위해 육아서를 본다던데 보지 않았다. 육아용품을 준비하면서 여러 선택지 중에서 아이에게 안전한 걸 고르는 일만으로도 벅찼다.

임신 초기엔 유산 위험이 있어서 누워 있었고, 6개월 이후 배뭉침이 있어서 누워 있었다. 많은 시간을 침대에서 보내서 무언가를 준비할 여력도 없었다. 준비없이 시작된 육아의 험난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출산 이전까지 내 삶이 나라는 개인의 삶이었다면 출산 후에는 나를 지우는 삶이었다. 24시간 아이의 신체리듬과 감정에 반응하는 일상이 펼쳐졌다. 아이 뒤에 드리워진 그림자 같은 삶이 지속되자 내 안에 숨어 있던 나들이 아우성쳤다. 갑갑하다고 그림자로만 살기 싫다고 말했다.

젖을 떼고 아이가 걷고 말하면서 사람의 꼴을 갖춘 후부터 나의 욕구에 집중하기 위해 발버둥쳤다. 그림책 모임도 나가고, 시민기자로 글도 쓰고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찔러봤다. 무엇보다 출산 전처럼 일을 하고 싶었다. 아이를 누군가 봐주기만 한다면.

육아하면서 할 수 있는 내 욕구에 맞는 일은 글쓰기와 책읽기였다. 아이를 재우고 나서 새벽 시간에 글을 쓰고 책을 읽었다. 그것만이 나를 구해주는 일인 것처럼. 아이는 나를 잡는 발목, 글쓰기와 독서만이 희망이라는 생각에 갇혀 있었다.

나를 깨우는 존재는 아이였다
 
내가 여기에 있어, 아드리앵 파를랑주(지은이).
 내가 여기에 있어, 아드리앵 파를랑주(지은이).
ⓒ 웅진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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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2년 정도 갇혀 있다 점차 생각이 열렸다.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져 이제 8년차가 되어 가니 아이는 나를 가두는 존재가 아니라 깨우는 존재였다.

"엄마, 우리집 14층인데 나 지금 14번 문제 풀고 있어!"

작은 것에서도 의미를 찾고 숫자를 연결하길 좋아하는 아이에게서 어릴 적 내 모습을 본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설명하고 말하는 게 좋아."

사람들과 관계 맺고 그들과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아이는 나를 닮았다. 긍정적인 모습 속에서 아이를 통해 나를 발견할 때는 흐뭇하다. 반대로 피하고 싶고 보고 싶지 않은 내 모습을 볼 때는 괴롭다.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도전하지 않고 망설이는 모습, 잘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에는 뒤로 빠지는 연약함, 꾸준한 성실함보다는 빨리 해결하고 싶은 성격급한 모습. 아이에게서 발견되는 나의 약점들은 가슴을 후벼팠다.

아이가 이쁘다고 물고빨고하다가도 아이의 말 한 마디와 행동에 괴성을 발사하며 다중인격이 이런 거구나 싶은 날들은 나라는 인간의 바닥을 보여준다. 사회적 체면을 유지하는 관계에서는 볼 수 없는 내 모습이다.

나와 가장 오랜 시간 붙어 있는 존재, 가장 많은 일상을 공유하고 가장 많은 말을 나누며 내 인간성의 바닥을 보는 존재인 아이. 아이 덕분에 성장했다. 그런 아이와 나의 관계를 <내가 여기에 있어>라는 그림책에서 확인했다.

이른 아침 누군가 소년의 머리를 두드린다. 뱀의 꼬리를 발견한 소년은 몸통을 따라간다. 가면서 뱀의 몸통을 꼬집어 본다. 창문 넘어 구불텅한 뱀을 타고 정원 밖으로, 도시 밖으로 나아가는 소년. 도시를 벗어나 숲을 지나고 해가 져도 소년은 멈추지 않고 뱀의 몸통을 따라간다.

어느새 밤이 되자 소년은 몸통을 지붕 삼아 잠을 잔다. 해가 뜨자 소년은 다시 길을 찾아 나서고 동굴 입구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소년은 드디어 뱀의 얼굴과 마주하게 된다.

아무도 여기까지 날 보러 온 사람은 없었다며 소년을 반기는 뱀. 뱀은 소년에게 세상 이야기를 들으며 이제 외롭지 않다고 말한다. 둘은 다시 만났을 때 둘만 알 수 있는 신호를 약속한다. 손가락을 눌러 선 두 개를 그려주면 그건 '내가 여기 있어'라는 뜻이라고.

네가 동굴에 있을 때 말해줄게, "내가 여기에 있어"

책 표지에 커다란 뱀의 몸통이 내장처럼 구불구불 그려져 있다. <곧 이방으로 사자가 들어올 거야>의 작가 아드리앵 파를랑주의 그림책인 <내가 여기에 있어>는 전작 그림책과 같은 기법인 리노컷 판화로 찍은 그림이다. 곡선과 직선이 만들어내는 오묘한 조화와 뱀의 몸통이 그림 가운데를 지나가면서 만들어내는 공백이 독특한 그림책이다.
내가 여기에 있어 중 일부
 내가 여기에 있어 중 일부
ⓒ 웅진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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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불구불한 뱀의 몸통이 그림 한 가운데를 지나가지만 어른들은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다. 소년만이 관심을 가지고 따라간다. 이 책을 처음 봤을 때 가슴이 툭하고 내려 앉았다.

육아를 하면서 머리가 동굴에 박혀 있어 세상 밖에 있는 몸통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져도 감각하지 못하고 세상과 단절된 채 고립된 내가 이 책 속 뱀 같았다. 그런 나를 알아봐주고 세상과 소통하게 해준 소년. 동굴 안으로 겁 없이 들어와 나를 알아봐준 사람은 공교롭게도 아이였다. 아이 때문에 나를 지우고 살았는데, 나를 다시 찾게 해 준 것도 아이였다.

아이와 함께 하다보니 세상과 단절되었지만 고립 속에서 아이와 교감하면 나를 좀더 깊이 이해하고 알아갈 수 있었다. 연약한 아이에게 고함치고 협박하는 인간 말종같은 모습 때문에 자책하며 괴로워 하기도 했지만, 이런 모습을 직시했기에 조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지워진 시간들이 있었기에 나를 찾기 위한 작업에 절실히 발버둥쳤다. 만약 그림자 같은 삶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내 자신을 돌아보며 스스로의 욕구를 바라보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이 바라는, 세상이 말하는 욕구가 아닌 내가 원하는 욕구를 찾을 수 있었던 것도 내 인간성의 바닥과 장점과 단점을 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아이 덕분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조건없이 나를 사랑해 준 아이의 겁 없는 사랑과 용기 덕분이다.

내가 뭐라고 꽃 같다느니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다느니, 내 마음으로 여행을 오겠다느니 하는 아이. 그런 아이가 동굴에 들어가는 날이 오면 나도 아이를 찾아가 '내가 여기에 있어'라고 손가락으로 선 두 개를 눌러주려 한다.

내가 여기에 있어 - 2020 볼로냐 라가치상 픽션 부문 스페셜 멘션 수상작

아드리앵 파를랑주 (지은이), 이세진 (옮긴이), 웅진주니어(2020)


태그:#내가 여기에 있어, #아이와 엄마, #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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