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4 13:42최종 업데이트 20.12.04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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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에 결혼 10주년을 기념해 보라카이로 가족여행을 갔다. 보라카이의 해변과 자연풍경이야 좋았다고 굳이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때만 해도 이듬해 코로나가 창궐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이 당혹스러울 정도로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다 보니 여행이 고작 작년인데도 마치 십 년 전 일처럼 느껴진다.

집에만 있다 보니 좀 답답해서 보라카이에서 찍은 사진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숙박했던 리조트의 식당에서 만세 자세로 찍은 사진이 눈에 꽂혔다. 워낙 유명한 포토존이라 경쟁률이 치열해 일찌감치 방문해 저렴한 와인 한 병을 시켜놓고 눌러앉아 식사 시간까지 뻗치기를 했는데, 그때 마셨던 와인이 바로 이거다.

빌라 지라르디 피노 그리지오 델레 베네지에 2017
Villa Girardi Pinot Grigio Delle Venezie 2017

 

ⓒ 고정미

 

빌라 지라르디 피노 그리지오 델레 베네지에 2017 신선한 과일 향기에 싱그러운 산도의 조화가 마치 보라카이의 부드럽고 시원한 바닷바람 같아 매우 인상적이었다. ⓒ 임승수


이탈리아 화이트 와인인데 빌라 지라르디(Villa Girardi)는 와인 제조사, 피노 그리지오(Pinot Grigio)는 포도품종, 델레 베네지에(Delle Venezie)는 와인 생산지 및 등급을 표시하는 문구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복잡하니(모르니) 생략한다.

솔직히 자리 선점을 위해 메뉴판에서 대충 저렴한 와인으로 주문한지라 기대 없이 마셨는데, '오! 이거 의외로 괜찮은데?'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신선한 과일 향기에 싱그러운 산도의 조화가 마치 보라카이의 부드럽고 시원한 바닷바람 같아 매우 인상적이었다. 식사 주문 시간이 되어 해산물을 푸짐하게 시켰는데 음식과도 너무나 잘 어울리는 것 아닌가.


맘에 쏙 들어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이 와인은 국내에 수입되지 않는 것 같았다. 해외 판매가격(세금 제외)이 궁금해 와인 서쳐 앱으로 찾아보니 대략 1만원이 살짝 넘는 수준이다. 이 와인 외에 피노 그리지오 품종으로 만든 여타 와인의 가격대도 대략 그 정도 수준에서 형성되어 있었다. 이 맛에 이런 가격이라니! 맛에 놀라고 저렴한 가격에 또 한 번 놀랐다. 국내 할인 장터에서도 1만 원대 중후반이면 피노 그리지오 와인을 구입할 수 있다.

다른 애호가에 비하면 경험의 폭이 부끄러울 정도로 협소하지만, 어쨌든 내 경험의 테두리 안에서 판단했을 때 지금까지 마셔본 와인 중에서 가격 대비 성능이 가장 뛰어난 품종이 피노 그리지오다. 그야말로 가성비 최강!

피노 그리지오는 재배 지역에 따라 불리는 이름도, 풍미도 다르다. 이탈리아에서는 피노 그리지오라고 부르지만, 프랑스는 '피노 그리(Pinot gris)', 독일은 '그라우부르군더(Grauburgunder)'다.

회색을 의미하는 그리(gris)에서 알 수 있듯 피노 그리지오는 다른 포도와 비교했을 때 엷은 회색빛이 감도는데, 프랑스의 피노 그리는 풀바디에 향신료 및 과실 향, 낮은 산도, 높은 알코올 도수, 유질감이 특징이다.

반면 이탈리아의 피노 그리지오는 포도를 일찍 수확해 신선한 산도, 적당한 과실 풍미, 낮은 알코올 도수, 가벼운 바디감을 지향한다. 개인적으로는 청바지와 면티처럼 편한 이탈리아 피노 그리지오가 맘에 든다.

해외에서는 갈수록 인기가 솟구치는 품종인데 한국에서는 여타 와인에 비해 수입량도 적고 아직 찾는 사람도 많지 않다. 와인 소비 문화의 차이 때문이다. 피노 그리지오는 단독으로 마실 때는 다소 밍밍한 느낌이며 음식과 곁들였을 때 진가를 발휘한다.

외국에서는 평소 식사에 와인을 곁들이는 분위기이다 보니 가볍고 신선하며 음식과 궁합이 좋고 가격도 저렴한 피노 그리지오의 인기가 갈수록 치솟는다. 하지만 한국은 풍미가 강렬한 레드 와인을 구입해 와인 주연에 안주 조연으로 즐기다 보니 피노 그리지오 같은 명품 조연 와인이 진가를 발휘하기 어렵다.

나도 갓 와인에 빠져든 시절에는 강렬한 풍미의 레드 와인 한 병을 신줏단지처럼 모셔놓고 정성스레 한우 채끝등심 구이를 준비한 후, 예술영화를 초집중해서 감상하듯 코와 혀에서 느껴지는 감각 하나하나에 신경을 쏟으며 마셨다.

그런데 지금은? '느그들이 한국에 왔으믄 한국식으로 살아야재?' 하면서 상추쌈을 우걱우걱 씹어먹다가 물 건너온 화이트 와인을 홀짝 들이킨다. 너희들도 진짜배기 한국인의 구강 속을 여행하고 싶지 않겠어?

그러고 보니 결혼 10주년 여행을 다녀온 지 거의 1년이 다 되어간다. 때마침 겨울로 접어드니 해산물 킬러인 아내가 석화와 거북손(갑각류)이 연신 생각난단다. 일전에 거북손을 기똥차게 맛있게 먹었던 한식주점 '락희옥'이 떠올랐다. 망설일 것 있는가?

지난 11월 14일 집에 있는 피노 그리지오 와인 한 병을 들고 락희옥 마포본점으로 가족이 총출동했다. 콜키지 프리(corkage free) 식당이라 주류 반입이 가능하고 와인잔도 무료로 제공된다. 와인 온도 유지를 위한 얼음 바구니만 2,000원 비용이 붙는데, 그 정도야 허접한 내 재정 상태로도 충분히 커버 가능하다.

불필요한 정보 제공일 가능성이 97%이지만 노파심에서 언급하자면, 콜키지는 코르크 차지(Cork Charge)의 줄임말이다. 식당에서 술을 가져온 손님에게 부가하는 추가 비용을 콜키지라고 부른다. 콜키지 '프리(Free)' 식당은 그 비용을 부가하지 않는 식당이라는 의미다. 아무튼, 당시 락희옥에 가져간 와인은 이놈이다.

카발리에레 도로 캄파닐레 피노 그리지오 델레 베네지에 2019
Cavaliere d'Oro Campanile Pinot Grigio delle Venezie 2019

 

ⓒ 고정미

 

카발리에레 도로 캄파닐레 피노 그리지오 델레 베네지에 2019 지금까지 마셔본 와인 중에서 가격 대비 성능이 가장 뛰어난 품종이 피노 그리지오다. ⓒ 임승수


카발리에레 도로(Cavaliere d'Oro)는 와인 제조사, 캄파닐레(Campanile)는 제품명, 피노 그리지오(Pinot Grigio)는 포도품종, 델레 베네지에(Delle Venezie)는 와인 생산지역 및 등급을 표시하는 문구다. 이 와인 역서 와인 서쳐로 검색한 해외 평균 거래가(세금 제외)가 대략 1만 원 정도다.

다만 나는 마트에서 2만 원대 중반으로 다소 높은 가격에 구입했다. 할인 장터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인데, 여러분은 기왕이면 할인 장터를 기다렸다가 적당한 피노 그리지오 와인을 1만 원대에 구입하기를 권한다. 우리의 돈은 너무나 소중하니까.

코로나 때문에 간만의 외식인지라 계산서 후폭풍 고려하지 않고 맘껏 주문했다. 석화, 차돌박이 구이, 거북손, 굴전, 대방어회, 부추 된장비빔밥, 김치말이국수. 그야말로 개인파산 신청 직전에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사고치는 가족처럼 주문했는데, 모든 음식과 피노 그리지오가 참으로 훌륭하게 어울렸다. 이 놀라운 음식 친화력은 독일의 리슬링과 더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게다가 가격은 리슬링보다도 더욱 착하다. 그러니 어떻게 내가 애정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어차피 2020년 내내 코로나 사태로 인해 은행 잔고가 위태위태한 데다 글쟁이 프리랜서에게는 보릿고개와도 같은 월동기가 다가오니, 와인 할인 장터가 눈에 띄면 무조건 저렴이 위주로 구입해야 한다. 조만간 할인 리스트가 나오면 1만 원대 피노 그리지오 위주로 구매계획을 세워 셀러의 빈 곳을 채운 후 내년 봄까지 버텨보련다. 그때는 상황이 좀 나아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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