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후 서울 고척 스카이돔에서 열리는 2020시즌 KBO리그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두산 베어스 선발투수 플렉센(오른쪽 두번째)이 홈런을 맞고 교체되고 있다.

23일 오후 서울 고척 스카이돔에서 열리는 2020시즌 KBO리그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두산 베어스 선발투수 플렉센(오른쪽 두번째)이 홈런을 맞고 교체되고 있다. ⓒ 이희훈


 
"마음은 강한데 몸이 안 따라준다."

한국시리즈 5차전 경기 후 김태형 두산 베어스 감독이 부진의 원인을 진단하면서 씁쓸하게 남긴 답변이다. 두산은 23일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벌어진 NC 다이노스와의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0-5로 완패했다. 이로써 두산은 7전 4선승제의 한국시리즈에서 2승 3패로 몰리며 한 번만 더 패하면 무너지는 벼랑 끝에 섰다.

여기에 두산은 이틀 전 4차전(0-3)에 이어 한국시리즈 2경기 연속 영봉패라는 굴욕을 당했다. 공교롭게도 종전 기록도 두산이 보유하고 있다. 두산은 2007년 SK와의 한국시리즈에서 4~5차전을 모두 0-4 영봉패를 당하는 굴욕을 겪었고 결국 한국시리즈 우승을 내줘야했다. 올해의 두산은 3차전 8회부터 5차전 9회까지 무려 19이닝 연속 무득점의 굴욕을 이어가고 있다. 단일 한국시리즈 최다 이닝 연속 무득점 기록인 1989년 빙그레 이글스(현 한화)가 기록했던 22이닝 연속에도 어느새 3이닝 차이로 근접했다.

김태형 감독도 가장 큰 문제로 인정했을만큼 타선 부진이 심각하다. 부동의 4번 타자 김재환이 한국시리즈 5경기에서 20타수 1안타라는 충격적인 기록을 남기며 타율이 고작 .050에 불과하다. 허경민도 타율 .222, 오재일이 .176, 박세혁이 .167, 박건우가 .133에 그치고 있다. 김재호(12타수 7안타·.583)와 페르난데스(19타수 5안타 .263, 2홈런)가 그나마 타선의 숨통을 트여주고 있지만 한두 명만으로는 득점을 뽑아내는데 한계가 있다.

실제로 4차전에서는 김재호만 3안타를 쳤을 뿐 나머지 8명의 타석에서는 단 한 개도 안타를 때려내지 못하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두산은 1∼5차전 팀 타율이 .222에 그쳤는데 김재호와 페르난데스를 빼면 실질적으로는 1할대까지 추락한다.

그래도 5차전에서는 돌아가며 안타가 나왔고 득점권 기회까지 이어지는 찬스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 적시타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김태형 감독은 이번 시리즈들어 유독 부진한 김재환을 4번으로 고정하고 오재일을 하위타순으로 내리며 '신뢰와 변화'를 동시에 추구했지만 하필이면 두 선수의 타석에서 후속타 불발로 득점권 찬스를 잇달아 날리는 머쓱한 상황이 벌어졌다.

두산 타선은 3차전 이후로는 NC 투수들의 구위에 눌리면서 타자들이 조급해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전체적으로 흐름이 끊기고 모든 면에서 연결이 안 되는 상황이 속출하자 선수들도 본인들의 리듬대로 공격적인 배팅을 하지 못하고 자신감이 떨어진 듯한 모습이다. 특히 한국시리즈 경험이 많다는 베테랑들이 더 부진하다보니 전체적으로 선수단의 분위기까지 위축될 수밖에 없다. 벌써 6년째 한국시리즈를 치르고 있는 김 감독은 "이 정도로 좋지 않은 타격감은 올해가 제일 심하다"며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포스트시즌 들어 두산 투수 중 최상의 구위를 뽐내던 플렉센의 '당겨쓰기' 카드도 실패로 돌아갔다. 플렉센은 지난 2차전에서도 선발 투수로 6이닝 1실점을 기록한데 이어 5차전에도 선발로 등판했다. 순서대로라면 1차전 선발이었던 라울 알칸타라가 등판해야할 타이밍이었지만, 시리즈 전적 2승 2패 동률을 기록한 5차전의 중요성을 감안할 때 포스트시즌에서 플렉센의 구위가 더 좋았다는 점을 고려한 승부수였다.

플렉센은 불과 4일 휴식에도 불구하고 마운드에 올라 6이닝 5안타(1홈런) 5탈삼진 1볼넷 3실점으로 분투했다. 아무래도 힘이 떨어진 것은 사실이었지만 강한 책임감과 투혼으로 6회까지 마운드를 지키며 퀄리티스타트 조건을 달성했고 투구수는 무려 108개나 됐다. 하지만 상대 선발 구창모의 호투에 가려져 빛이 바랬고, 끝내 타선의 지원을 받지 못하며 패전투수가 되는 것을 피하지 못했다.
 
 21일 오후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2020시즌 KBO리그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두산 베어스 선수들이 마스크를 쓰고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21일 오후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2020시즌 KBO리그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두산 베어스 선수들이 마스크를 쓰고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 이희훈

 
플렉센은 포스트시즌 들어 연일 살인적인 등판 일정을 소화했다. 11월 4일 LG와의 준PO(6이닝 4피안타 1볼넷 11탈삼진 무실점 승)를 시작으로 9일 kt와 플레이오프 1차전(7.1이닝 4피안타 2볼넷 11탈삼진 2실점), 13일 kt와 4차전(3이닝 1피안타 무4사구 2탈삼진 무실점 세이브), 여기에 NC와의 한국시리즈 2,5차전까지 벌써 5경기를 치르는 강행군을 이어왔고 모두 4일 이내의 휴식 이후 등판이었다.

올시즌 두산의 공식 에이스는 알칸타라였지만, 부상으로 두달 간의 공백 이후 복귀한 9월부터는 플렉센의 비중이 더 높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산이 올해 정규리그 3위로 준PO부터 소화하면서 올라와야했고 불펜진의 구위가 부진한 가운데 많은 이닝을 홀로 책임져야하는 부담이 커졌다. 자칫 포스트시즌이 끝난 이후에도 후유증이 우려되는 대목이다.

현재의 두산 선수들을 두고 이보다 더 잘해야한다고 마냥 몰아붙아기는 어려운 대목이다. 두산은 올해로 6년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면서 매년 다른 팀들보다 가장 늦게 시즌을 끝냈고 회복할 시간도 부족했다. 시즌후에는 전력 보강보다는 유출이 매년 더 많았던 것도 익숙하다. 이제는 한국시리즈 상대팀의 간판스타가 된 양의지를 비롯하여 김현수, 민병헌 등 자신들이 키워낸 정상급 선수들이 FA가 되자 잡지 못했다. 한때 우승주역이었으나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이미 저물었거나 저물어가고 있는 선수들도 다수다.

그동안 '화수분'이라는 화려한 타이틀로 새로운 선수들을 발굴해내며 위기를 극복해왔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서서히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과거의 두산은 누군가 부진해도 얼마든지 빈 자리를 메울 수 있는 다른 스타가 나왔고 그게 '미러클'의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김재환이나 오재일, 이영하가 부진했을 때 내세울 만한 다른 대안이 없다. 중심타선이 부진해도 김인태 정도를 제외하면 대타 자원조차 마땅치 않다. 6차전에서도 결국 기존 선수들의 부활을 믿고 기다리는 것 외에는 뾰족한 대책이 없는 실정이다.

어쩌면 올해 한국시리즈는 2010년대 중반부터 이어진 두산 왕조가 황혼기에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시점일 수도 있다. 매년 두산이 꾸준히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야구팬들은 어쩌면 두산이 이기는 것을 너무 당연스럽게 여기는데 익숙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올시즌의 두산은 정상의 자리를 지키는 당당한 디펜딩챔피언의 모습이라기보다는, 끝없이 이어지는 혈투와 소모전에 지쳐가는 외로운 늙은 곰을 연상시킨다. 두산의 화수분 야구도 결국 기계로 찍어내는 것이 아닌 사람이 만드는 것이기에 당연히 한계는 있는 법이다. 어느덧 마지막 벼랑 끝에 선 두산에게 또 한 번의 미라클이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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