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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초기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위해 젊음을 바쳤으나, 청나라로부터는 모략당했고, 조선으로부터는 추방당했으며, 본국 정부로부터는 해임당했다. 어느 날 일본의 호젓한 산길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의인 조지 포크에 대한 이야기이다.[기자말]
* 이 기사는 구한말 조선에 머문 미 해군 중위 조지 클레이턴 포크의 이야기를 사료와 학술 논문 등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이전 기사 : 한미 수교 조약문을 쓴 '이동인 스님'은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지금 나는 나의 고국인 미국이 아닌 일본 땅에 묻혀 있고, 나의 젊음을 바쳤던 조선인들에게서는 까맣게 잊혀진 존재이지요. 하지만 지금 나는 나보다 더욱 쓸쓸한 또 하나의 고혼을 불러내려 합니다.

서른 살 즈음에 증발해 버린 이동인 스님. 안으로는 조선의 양반체제를 혁파하고 밖으로는 외세로부터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자신을 불태운 비운의 선각자. 그에 대하여 나는 왠지 표현키 어려운 동정과 울림을 느낍니다.  

기억하십니까? 이동인 스님이 1880년 5월 어느 날 동경 주재 영국 외교관 사토우의 집을 불쑥 찾아간 일을? 그걸 기록한 사토우의 일기를? 어떤 생각이 드나요? 1880년 당시 조선은 서양에 빗장을 굳게 잠가 놓았고 서양인을 허가 없이 접촉하는 건 극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지요.

그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이동인 스님은 왜 그리고 어떻게 이국만리로 영국인을 찾아갔을까요? 더구나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처지에. 국왕이나 정부의 밀사라면 혹 모르지만 일개 승려의 이러한 행동은 흉내낼 수도 없고 상상조차 어려운 일입니다. 그만큼 이동인 스님은 특이한 존재였고 비상한 뜻을 품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일본으로 건너간 스님 이동인 
 
 오늘날의 부산항
 오늘날의 부산항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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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인이 일본에 가게 된 경위를 간단히 추적해 보아야 할 것 같군요. 그는 1879년 9월 일본인 복장으로 변장한 채 벙어리 행세를 하면서 부산에서 배에 올라 밀항했습니다. 국법으로 엄금하고 있는 출국을 감행한 것이죠. 당시 개화당의 유대치 및 김옥균, 박영효가 비밀리에 그의 밀항을 지원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개화파의 일개 에이전트는 아니었습니다. 개화파와 의기투합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는 능동적으로 행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천인 계층인 승려의 신분으로 국법이 엄금하는 밀출국을 단행한 것만 보더라도 그가 비상한 신념과 용기의 인물임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때는 고종 1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지 4년째 되는 해였지요. 나이는 30대 전후였을 겁니다. 그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어느 절의 승려였는지도 애매합니다. 서울의 봉원사라고도 하고 양산의 통도사라고도 하고 동래(부산)의 범어사라고도 하는데, 부산 쪽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가 일찍부터 바깥 세상 돌아가는 것을 예의 주시하였을 뿐 아니라 영국 외교관 사토우의 존재를 안 것도 1878년 부산항이었으니까요.

헌데, 부산의 일본 승려 오쿠무라 엔싱(奧村圓心)이 이동인을 도왔습니다. 밀항하기 훨씬 전부터 이동인은 계획적으로 일본 승려들에 접근하여 친분을 맺어 놓았던 것이지요. 현해탄을 건너는데 성공한 그는 곧바로 교토로 향합니다. 본원사(本願寺)라는 사찰에서 기거하면서 한편으로는 일본 말을 익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메이지 유신으로 변화된 일본 사회를 관찰합니다.

아울러 그는 구미문명에 관한 서적들을 열심히 수집하여 조선에 가는 일본 승려를 통해 김옥균, 박영효 등의 개화파 동지들에게 제공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일본 승려와 조선의 서재필, 윤치호 등이 훗날 증언하였으므로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책들은 거의 한문으로 번역된 것이어서 해독하는데 별 문제가 없었다 합니다. 하지만 그 책들이 금서여서 몰래 돌려가며 익었다고 서재필은 회고합니다. 개화파들에게 성냥이라는 물건을 처음 소개한 것도 이동인 스님이었구요.

초기 개화파들은 이동인이 보내 준 서적을 탐독함으로써 비로소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게 되고 청나라가 아닌 일본을 근대화 모델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이 청나라로부터의 자주독립을 신조로 삼게 된 데에는 그러한 배경이 있었습니다.

훗날 한국인들은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 개화파를 친일파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당시 그들의 뜻이 실현되었더라면 나라를 빼앗기는 일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사후적 관점에서 그들을 '친일'로 규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나는 미국인이지만 그들과 흉금을 털어놓고 깊이 사귀었기 때문에 최소한 그들이 일본의 꼭두각시가 아니었다고 확신합니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자주독립 정신이 강한 선각자들이었습니다. 한탄할 일은 그들의 일본 학습이 아니라 그들의 좌절이라 생각합니다. 

한·중·일 동양 삼국의 연대체 흥아회에 참여

교토에서 반 년 남짓 지낸 후 이동인은 동경으로 진출합니다. 제국의 심장부로 진입한 거지요. 1880년 4월 그는 본원사 소속의 별원(別院)에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기숙하면서 이동인은 숨돌릴 겨를도 없이 <흥아회興亞會>라는 단체에 접근합니다. 흥아회는 문자 그대로 아시아를 흥성시키자는 모임입니다. 이동인의 흥아회 참여는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지요.  

<흥아회興亞會>는 1880년 2월 13일 동경의 한 음식점에서 창립되었습니다. 서양세력의 위압과 그들이 가하는 모욕을 극복하기 위하여 한·중·일 동양삼국이 연대하자는 취지였습니다. 훗날 일제가 아시아를 침략했기 때문에 지금은 그런 결과적 시각으로 흥아회를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흥아회 인사들의 면면은 다양했고 이념의 스펙트럼도 폭넓었음에 비추어 볼 때 흥아회가 애초부터 침략주의를 내장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중국 외교관들과 명사들도 다수 참여했고 조선의 초기 개화파들도 참여했지요. 

흥아회의 취지에 공감한 이동인은 그것을 최대한 활용 혹은 역이용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동인은 흥아회 창립 직후인 4월 흥아회 회장 앞으로 격정적인 편지를 보냅니다. 서한 형식의 이동인 기고문(흥아회 회보 게재)이 전해 내려옵니다.

이동인이 남긴 유일한 육필 원고라는 점에서, 이 문건은 매우 중요한 사료라 할 수 있겠습니다. 헌데 그 중요성에 비추어 충분히 주목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제 그의 육성을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여기 그 일부를 의역하여 소개합니다.
 
"오늘날 아시아가 쇠미하여 서양인들에게 굴욕을 당하는 것은 변통할 때 변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서양인들은 서로 상대방의 장점을 본받아 수시로 변통하여 실익을 취합니다. 때문에 동양인은 갈수록 곤궁해지고 서양인은 갈수록 강해집니다. (중략)

영국인의 아편 제조는 이익을 위해 아시아인에게 독을 쓴 것입니다. 만일 청국인들이 아편에 불을 지르지 않았다면 아편이 다른 나라에까지 확산되었을 것입니다. (중략)

조지 워싱턴이 이끌었던 미국은 영국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그렇다면 전 세계 인구의 70%에 해당하는 7억 인구를 지닌 아시아에도 인물이 없을 수 없으니 아시아의 인사들도 스스로 분발할 것을 촉구합니다. (중략)

마침 도쿄에 오자 이 회(흥아회)가 창설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저는 땅에 엎드려 합장하였습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흥건히 얼굴을 적셨습니다. 이에 학자금 30 金을 출연하여 설립비 명목에 보탬이 되고자 합니다. 물방울이 보탬이 되지 못함을 압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저의 말로 분연히 일어나는 사람이 있어서 대세를 한번 바로잡아 억만이 사는 우리 아시아를 이 시대의 종주宗洲로 만든다면 보탬이 되는 바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보다시피 이 글은 이동인의 역사관과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 그리고 아시아인들이 처해 있는 현실과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염원 및 지향점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동인의 목소리 속에서 우리는 그의 시야와 포부가 광대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크고 뜨거운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어떤 이론보다도 그의 육성에서 우리는 그의 초상화를 그려보아야 합니다.

영국 외교관 사토우를 찾아간 이동인

흥아회의 창설 취지에 눈물로 감격한 유랑승 이동인이 쾌척한 30金(정확한 화폐가치는 불명)은 거금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당시 흥아회 회원 입회비가 2엔, 월회비는 1엔이었으니까요.

이동인 스님이 아시아 연대에 공감했다고 해서 서양문물을 배척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기는커녕 그는 공세적으로 서양의 문을 두드립니다. 흥아회 회장에게 격정적인 편지를 보낸 다음 달인 5월 12일에 사토우를 찾아갔음을 사토우의 일기가 증언합니다.

빗장을 굳게 잠근 조선 왕조의 승려와 욱일승천하는 대영제국의 엘리트 외교관의 돌발적인 만남은 의문과 상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족합니다. 서로 외계인 같아야 할 두 사람은 만나자 마자 뜻밖에도 잘 통했고 상당히 많은 대화를 나눈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동경에는 많은 서양 외교관들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이동인은 영국 외교관 사토우를 찾아갔으며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요?

첫 만남에서 이동인은 사토우의 존재를 애초에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하여 침묵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토우의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궁금했겠지만, 물어보지는 않았던 것 같구요. 이동인은 사흘 후에 다시 나타납니다. 그리고 놀라운 이야기들을 털어 놓습니다. 사토우의 일기를 보겠습니다.
 
5월 15일(1880년)

나의 조선인 친구[이동인, 별명 아사노]가 다시 왔다. 조선이 수년 안에 외국과 관계를 맺게 될 것을 확신하지만 현 정부를 청산할(sweep away) 필요가 있을 거라고 그는 말한다. 뜻을 같이하는 젊은이들의 수가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중략)

나는 아사노에게 빌딩과 전쟁 사진을 많이 주었고 삽화집에 들어 있는 것도 그가 원하는대로 모두 주었다. 그는 또한 시계를 몇 개 조선에 보낼 거라 한다. (중략)

일본인들은 조선에서 인기가 없는데, 16세기에 히데요시가 불의한 침략을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일본인들이 원산에 들어오자 일인을 싫어하는 많은 주민들이 고향을 떠났단다. 조선에 들어오는 일본 수입품은 전부가 서양 물건이라면서 만일 조선이 서양과 직접 교역을 하면 일본 무역은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영국이 조선과 무역을 바라는지 여부를 그가 물었다. 영국은 정말로 관계를 갖고 싶지만 강제하고 싶지 않아서 조선에 사절을 보내지 않고 있다, 만일 영국 사절이 조선에 갔다가 거절당하고 돌아온다면 영국측은 그 수모를 갚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아닌가, 사정이 그러해서 우리는 조선측에서 원할 때까지 두고보고 있을 따름이다라는 취지로 그에게 말해 주었다. 

내가 1878년 조선에 가지고 갔던 서한의 사본을 그가 본 적이 있었으며 거기에서 내 이름을 알았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나를 찾아냈다는 것이다.

그는 세 시간 가량 머물렀다. 오는 20일 그가 시계를 살 수 있도록 요코하마에 데리고 가주겠다고 나는 약속했다. 그는 자국의 자원 개발에 대하여 관심이 많다. 조선은 석탄과 철광석 외에도 금이 풍부하고 연안에는 고래도 많다고 한다. 그는 좋은 인삼 샘플과 나쁜 인삼 샘플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서양의사가 잘 활용할 수 있다면 인삼은 좋은 수출품이 되지 않을까 싶다고 한다.

(May 15. My Korean friend [I Tong-in, alias Asano] came again. He says that he is convinced that Korea will enter into foreign relations before many years are over, but it will be necessary to sweep away the present Gov[ernmen]t. The number of young men who think like himself is daily increasing. ……

I gave Asano a quantity of pictures of buildings, battles and whatever else he chose from the "Illustrated". He is also going to send back some watches. ……

The Japanese are unpopular in Korea, because of the unjustifiable war which [Toyotomi] Hideyoshi waged there in the 16th century, and numbers of inhabitants are said to have left Gensan [K: Wonsan 元山], to avoid being near them. The trade of Japan with Korea is entirely in European goods, and if other nations had commercial relations, the trade of Japan would disappear. He asked me whether England desired to trade with Korea. I said that she was perfectly willing to enter into relations, but did not wish to force herself upon an unwilling nation, which was the reason why she would not send an envoy, for if the envoy were turned back, she would have to avenge the insult, and therefore would leave Korea alone until she showed a desire to enter into relations. He had seen a copy of the letter of which I was bearer in 1878, and learnt my name from it. This was the reason he had come to seek me out. He remained ab[ou]t. 3 h[ou]rs. and I promised to take him to Yokohama on the 20th to buy his watches. He is very keen about developing the resources of his country, which has plenty of gold, besides coal and iron, and whose shores abound in whales. He gave me some specimens of good and bad ginseng, which he thinks might form an article of export, if European doctors can make any use of it.

Ruxton, Ian. A Diplomat in Japan Part II: The Diaries of Ernest Satow, 1870-1883 . Kindle Edition.)

보다시피 이동인은 조선의 정변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영국이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할 의사가 없는지 탐문하기도 하였고, 사토우의 존재를 알게 된 경위를 털어 놓습니다. 이 일기 내용은 다음에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아야겠습니다.

-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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