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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 천사대교 야경. 천사대교는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도와 암태도를 이어준다. 섬과 섬을 잇는 연도교다.
 신안 천사대교 야경. 천사대교는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도와 암태도를 이어준다. 섬과 섬을 잇는 연도교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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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휴가철이다. 하지만 장마가 계속되고 있다. 폭우로 인해 전국이 물난리를 겪고 있다. 잠시 우리의 관심에서 밀려난 것 같은 코로나19도 부담이다. 마음 놓고 떠날 데가 마땅치 않다. 사람이 많지 않으면서도, 의미가 있는 곳이 없을까? 대안은 한적한 섬이다.

사람의 발길이 북적이지 않는 섬으로 간다. 많은 섬 중에서도 묵직한 근현대사를 품고 있는 신안 암태도다. 암태도는 신안 압해도에서 연결되는 천사대교를 건너서 만난다. 에로스서각박물관과 동백파마 벽화로 알려진 곳이다. 입소문을 타고 핫플레이스(hot place)가 됐다.

동백파마 벽화의 인기가 여전하다. 지금도 여행객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며 사진을 찍는다. 벽화는 집안에 있는 산다화(애기동백) 나무를 배경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그렸다. 집주인 문병일(78)·손석심(79) 어르신이 모델이다. 할머니는 수줍게, 할아버지는 환하게 웃는 모습이다.

일제강점기, 암태도에 서린 역사 
 
신암 암태도의 기동삼거리에 있는 동백파마벽화. 벽화의 주인공인 집주인 문병일·손석심 어르신이 벽화를 배경으로 섰다.
 신암 암태도의 기동삼거리에 있는 동백파마벽화. 벽화의 주인공인 집주인 문병일·손석심 어르신이 벽화를 배경으로 섰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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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세 마리의 조각상이 설치돼 있는 에로스서각박물관 풍경. 박물관은 천사대교를 건너서 만나는 신안 암태도에 있다.
 돼지 세 마리의 조각상이 설치돼 있는 에로스서각박물관 풍경. 박물관은 천사대교를 건너서 만나는 신안 암태도에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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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가 그려져 있는 곳이 기동삼거리다. 에로스서각박물관을 지나서 만난다. 삼거리에서 오른쪽은 자은도, 왼쪽은 암태면소재지를 지나 팔금·안좌도로 연결된다.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 기동리에 속한다.

암태도와 기동리는 우리 근현대사에서 묵직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이른바 암태도 소작쟁의다. 일제강점기 소작쟁의의 출발점이었다. 자은도, 비금도, 도초도, 하의도까지 번졌다. 바다를 건너 뭍에까지 들불처럼 번져 농민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암태도 소작쟁의의 발단은 높은 소작료였다. 농사를 짓는 대가로 땅주인한테 주는 토지 사용료를 둘러싼 싸움이다. 일제에 빌붙은 지주 문재철은 암태도, 자은도 등 신안의 여러 섬에 많은 농지를 갖고 있었다. 전북 고창에도 그의 땅이 있었다. 면적이 750만㎡나 됐다.

그가 갖고 있던 암태도 농지만도 139만㎡였다. 섬의 농지가 전부 그의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신안 암태도의 오산마을에서 본 승봉산과 기동리 풍경. 암태도는 섬이지만 크고 작은 저수지가 여러 개 있다. 농사를 주업으로 삼는 섬이다.
 신안 암태도의 오산마을에서 본 승봉산과 기동리 풍경. 암태도는 섬이지만 크고 작은 저수지가 여러 개 있다. 농사를 주업으로 삼는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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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쌀값을 낮추는 저미가(低米價) 정책을 도입했다. 지주의 수입이 줄 수밖에 없었다. 문재철은 줄어든 수입을 소작료로 메우려고 했다. 5할도 안 되던 소작료를 7∼8할로 올렸다. 1923년이었다.

소작인들의 반발은 당연했다. 소작인들이 한데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소작인회가 만들어지고, 서태석을 위원장으로 뽑았다. 농민들은 가을 추수기를 앞두고, 소작료를 4할로 내릴 것을 요구했다.

문재철은 두 말도 없이 거절했다. 소작인들은 추수를 거부하며 소작료를 내지 않는 불납동맹으로 맞섰다. 경찰이 끼어들더니, 소작인들을 협박하고 나섰다. 일본경찰의 비호를 받은 문재철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소작인을 따로 만나 협박하고, 회유도 했다.

그럴수록 소작인회는 더 강하게 뭉치며 맞섰다. 이 과정에서 크고 작은 충돌이 일어났다. 지주 측은 소작인들에게 폭력까지 휘둘렀다. 경찰은 폭력을 당한 소작인들만 잡아갔다. 노골적으로 지주의 편을 들었다.

경찰과 지주가 탄압을 할수록 소작인들의 저항도 거세졌다. 소작인 수백 명이 배를 타고 목포까지 나가 경찰서와 법원 앞에서 시위를 하고 농성을 벌였다. 굶어 죽겠다는 아사동맹(餓死同盟)을 결의하고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신안군 암태면 단고리에 있는 소작인항쟁기념탑. 당시 쟁의에 앞장선 농민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신안군 암태면 단고리에 있는 소작인항쟁기념탑. 당시 쟁의에 앞장선 농민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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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태도소작쟁의는 처음에 섬에서 시작됐으나 차츰 뭍까지 번져 전국적인 관심사로 떠올랐다. 다른 지역에서도 후원이 잇따랐다. 당시 후원자의 이름과 내용이 소작항쟁기념탑 한쪽에 따로 세워져 있다.
 암태도소작쟁의는 처음에 섬에서 시작됐으나 차츰 뭍까지 번져 전국적인 관심사로 떠올랐다. 다른 지역에서도 후원이 잇따랐다. 당시 후원자의 이름과 내용이 소작항쟁기념탑 한쪽에 따로 세워져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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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브로 섬마을에서 시작된 소작쟁의가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전국 각지에서 지지 선언이 잇따랐다. 각계각층에서 10원, 20원씩 모아 성금도 보내왔다. 변호사들도 무료 변론을 자청하고 나섰다. 여론이 소작인 쪽으로 빠르게 기울었다.

일제가 그동안의 태도를 바꿔 중재에 나섰다. 소작쟁의가 전국으로 확산되고, 자신들의 통치기반도 무너질까 우려한 행동이었다. 마지못한 타협이었다. 소작료가 4할로 조정됐다. 5할을 내던 조선시대보다도 더 낮춘 것이다.

1년여에 걸친 암태도 소작쟁의는 부당한 지주의 압력과 일제의 탄압에 맞서 스스로 권리를 지킨 싸움이었다. 암태도 소작쟁의의 불씨가 다른 지역으로 들불처럼 퍼졌다. 한국농민운동사의 큰 획을 긋는 사건으로 기록됐다.

암태도 소작쟁의를 이끈 사람이 서태석이었다. 그는 1885년 암태도 오산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의학을 공부하고, 일찍이 한약방을 운영했다. 1907년부터 8년 동안 암태면장을 지냈다. 1920년엔 목포에서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는 유인물을 뿌리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징역을 살았다.

1923년 암태도 소작쟁의에 앞장섰다. 그해 12월에 결성된 암태도소작인회 위원장을 맡았다. 1927년엔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서기, 조선농민총동맹 중앙집행위원이 됐다. 이 과정에서 몇 차례 징역을 살았다. 고문과 옥살이 후유증으로 1943년 유명을 달리했다.

8·15해방을 맞았지만, 서태석은 우리 사회에서 외면당했다. 공산당 가입 전력 등이 이유였다. 그가 죽은 지 60년이 지난 2003년에야 독립유공자 인정을 받았다.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유해도 2008년 3월 이곳 기동리에서 대전현충원으로 옮겨졌다.

농민들이 역사의 한 획을 그은 곳
  
암태도 오산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는 소작인 농민항쟁 사적비. 소작쟁의 과정과 주요 참여자가 새겨져 있다. 뒤에는 서태석 선생의 가묘(假墓)가 남아 있다.
 암태도 오산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는 소작인 농민항쟁 사적비. 소작쟁의 과정과 주요 참여자가 새겨져 있다. 뒤에는 서태석 선생의 가묘(假墓)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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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태도 오산마을에 있는 서태석 선생의 생가 터. 폐가로 방치돼 있던 집을 최근 신안군에서 철거했다. 신안군은 조만간 이 일대에 생가를 복원할 예정이다.
 암태도 오산마을에 있는 서태석 선생의 생가 터. 폐가로 방치돼 있던 집을 최근 신안군에서 철거했다. 신안군은 조만간 이 일대에 생가를 복원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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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석의 묫자리가 기동리 오산마을 입구에 남아있다. 에로스서각박물관에서 동백파마벽화를 보러 가는 도로변이다. 서태석의 유해가 옮겨가고 남은 가묘(假墓)다. 농민항쟁 사적비도 있다. 소작쟁의 과정과 함께 유공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오산마을에 서태석이 살던 집 자리도 남아있다. 얼마 전까지 오랫동안 폐가로 방치됐다. 그 집을 최근 신안군에서 철거했다. 신안군은 조만간 이 일대에서 생가 복원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소작쟁의의 흔적은 면사무소 옆 소작인항쟁기념탑에서도 만난다. 쟁의에 앞장선 농민 43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소작쟁의를 주제로 한 소설 〈암태도〉를 쓴 송기숙의 글귀도 씌어있다. 사방으로 보이는 들녘도 그때 그 시절을 겪었다. 당시 농민들이 목포로 원정 시위를 가려고 배를 탔던 남강선착장도 지척에 있다.
  
암태도(岩泰島)는 농사를 짓는 섬이다. 지명대로 돌이 많고,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섬 면적(43.2㎢)의 3분의 1이 농지다. 쌀과 보리, 양파, 마늘, 고추 등을 주로 재배한다.

"벌레가 많이 먹었습니다. 작황도 안 좋아요. 비가 너무 자주 왔어요." 오산마을회관과 맞닿은 집 마당에 고추를 널고 있던 안양숙씨의 말이다.

기동리(基洞里)는 터가 아주 좋은 곳이다. 터를 잡고 살만한 곳이라고 '텃골'로도 불린다. 기동, 당산, 오산 등 3개 마을로 이뤄져 있다. 뒷산에 당이 있다고 당산(堂山), 다섯 개의 산봉우리가 둘러쌌다고 오산(五山)이다.

지리적으로 암태도의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승봉산이 감싸고 있어 산세가 좋고, 물도 풍부하다. 예나 지금이나 농사를 지으며 살기에 좋은 마을이다.
 
서태석 선생이 나고 자란 암태도의 오산마을 풍경. 전형적인 섬마을이면서 농촌마을의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서태석 선생이 나고 자란 암태도의 오산마을 풍경. 전형적인 섬마을이면서 농촌마을의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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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남일보에도 실립니다.


태그:#암태도소작쟁의, #에로스서각박물관, #신안암태도, #서태석, #동백파마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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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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