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4월도 중순을 지날 즈음 겨울 옷을 정리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먼저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 패딩을 정리했다. 옷장이나 옷걸이마다 패딩이 걸려 있었고 조끼 종류의 패딩도 많았다. 압축 팩에 넣어 한쪽에 쌓으니 패딩이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로 엄청났다. 

다음은 겨울 코트였다. 옷장에 걸어두면 되는데, 문제는 걸어 놓을 자리가 부족했다. 일 년 혹은 이 년을 안 입은 채로 장롱에 빽빽이 잠자는 옷들이 많았다. 직장을 다니지 않으니 정장 코트를 입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겨울 내내 롱 패딩으로 지내니 코트를 입은 것은 다섯 손가락을 꼽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아깝지만 이참에 안 입는 코트를 재활용 박스에 넣기로 했다. 한참을 고민해서 고르고 고른 것 4개. 혹시라도 나중에 찾을 것 같은 마음에 몇 번을 망설였다.

쉬는 날은 홈쇼핑 채널에서 한참을 머물른다. 보는 것마다 꼭 필요할 것 같고, 몇 벌씩 묶어 판매하니 매일 무얼 입을까 걱정없이 한 철은 잘 입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입다 버리지 뭐.'
 
<핀란드 사람들은 왜 중고가게에 갈까?> 책표지
▲ 책표지 <핀란드 사람들은 왜 중고가게에 갈까?> 책표지
ⓒ 헤이북스

관련사진보기

 
가볍게 입고 쉽게 버리겠다는 생각은 결과적으로 잘못된 생각이었다. 박현선 작가가 쓴 <핀란드 사람들은 왜 중고가게에 갈까?>에는 경고도 있다. 우리가 좋은 소재라고 생각하는 면에 관한 것이다.
 
현재 의류를 만드는 데에 가장 널리 쓰이는 면화는 병충해에 매우 약하기 때문에 많은 양의 살충제와 비료가 쓰이는데, 이 화학물질들은 지역의 흙과 지하수를 오염시키고 주변의 생태계를 망가트린다. "기존의 면은 세계에서 가장 지속 불가능한 섬유 중 하나입니다."라고 패선 디자이너이자 환경론자인 캐서린 햄넷은 2014년 영국 일간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기존의 면화 재배에는 엄청난 양의 물과 살충제를 사용하기 때문에 1년에 35만 명의 농부가 사망하고 100만 건의 입원이 발생합니다." 면화의 생산은 환경오염뿐 아니라 물 부족 현상을 가속화시킨다. 면 티셔츠 1장을 만드는 데 약 2700리터의 물이 쓰이는데, 하루에 사람이 2리터 물을 마시는 것도 쉽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얼마나 많은 양인지 금세 알 수 있다.

화학 섬유도 아닌 면에 이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한 번의 구매로 4장부터 6장까지 주는 홈쇼핑의 매력 때문에 옷장 서랍은 면을 비롯한 천연 소재라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고작 1년 정도면 후줄근해서 재활용할 수도 없이 버려지기 일쑤였다. '멋'이라거나 '패션 스타일링'이라거나 하는 것들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했다. 

"핀란드에서 패션에 관심이 많다는 것은 유행에 민감하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어떤 옷을 입고 살고 스스로를 어떻게 표현하고 싶은지 고민하고 시도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라고 한다.

나라의 문화 자체가, 나이 든 사람은 물론이고 젊은 학생들의 의식 속에도 이러한 생각들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이 신선했다. "시간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중고가게에서 나만의 취향과 개성을 고려한 구매를 하는" 것을 즐기는 것. 그들은 우리가 홈쇼핑에서 맛보는 즐거움 이상을 중고가게에서 찾는 것이 생활화 되어 있었다.

매년, 매 계절마다 입을 옷이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쉽게 구매하지만 막상 즐겨 입는 옷은 두세 가지도 되지 않는다. 나머지 것들은 버리기 위해서 사는 것이다. 오늘 사고 내일 한 번 사용하고 모레 집안 구석 어딘가에서 조용히 잠들게 된다. 쉬운 소비와 빠른 폐기다.

국가에서 중고 거래를 위해 투자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지금의 중고 문화를 말 그대로 문화로 만든 핀란드에서 배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수없이 많은 중고 매장에서 판매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 자리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을 발판으로 모두 자원 리사이클 분야의 전문가로 교육받고 성장한다고 했다. 현장을 바탕으로 체득한 경험이 자원의 효용과 미래까지 생각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거점이 되는 것이다.
 
핀란드는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로 만들어진 나라인 것이다. 열악한 기후와 척박한 지리적 요건 속에서 다수의 보통 사람이 자원이라는 것을 진즉 체득했던 것일까? 대다수인 보통 사람들이 더 잘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더 나은 결과를 위해 변화에 지체하지 않는 성질은 오늘날까지도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핀란드의 중고거래가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은 자원과 환경에 대한 사람들의 치열한 고민과 노력 때문이라고 했다. 1980년에 시작된 '재사용 운동'이 40년이 지난 현재, 깊이 뿌리를 내렸다. 개인이나 사회, 국가의 인식을 바꾸는 변화는 쉽게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어떨까. 북유럽 디자인이라는 말을, 디자인을 모르는 사람도 근사한 실내를 떠올리며 세련된 디자인의 상징처럼 말하곤 한다. 그러나 핀란드를 찾은 저자는 "눈과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보통 사람들과 보통 물건들, 보통의 일상"이었다고 말한다. 고요하지만 가볍고 빠르게 변화를 시도하는 도시, 그 바탕에 평범한 사람들이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는 노력이 현재 우리의 눈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인구 550만 명의 나라에서 2017년 한 해에 중고 매장에서 거래된 제품 수는 270만 점, 물건을 구매한 손님의 수는 80만 명이라고 한다. 핀란드 중고 매장은 새 상품을 판매하는 매장에 버금가게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다고 한다. 나름의 디스플레이를 적절하게 해서 소비자들이 효율적으로 물건을 구매할 수 있도록 정리되어 있고 그 중에는 1950년대, 1960년대의 옷이 진열되기도 하고 인기도 많다고 한다.
 
수년, 길게는 수십 년의 긴 시간 동안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후에도 망가지지 않고 살아남아 중고 가게에 무사히 안착한 물건들과, 이를 무심히 버리지 않고 가치를 부여해 기꺼이 가게까지 가져온 사람들에게 묘한 고마움을 느끼기도 했다.
 
tvN <신박한 정리> 방송화면
▲ tvN <신박한 정리> 방송화면 캡쳐 tvN <신박한 정리> 방송화면
ⓒ 장순심

관련사진보기

 
tvN <신박한 정리>에서 진행자는 다른 집의 정리를 도우며 필요와 욕구로 물건을 가르게 했다. 필요가 아닌 것은 갖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내가 아끼는 것, 갖고 싶은 것, 그러나 사용하지 않는 그런 것들을 나누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나누고 정리한 결과, 집은 몰라보게 바뀌어 있었다.

자원절약이나 환경문제는 핀란드만의 문제일까. 우리나라의 중고거래는 요즘 활발한 듯하지만 한정적이다. 오프라인은 접근성이 부족하고, 품목도 자동차나 명품 등 일부 품목에 한정되어 있다.

핀란드의 20대 젊은이들처럼 할머니가 늘 입던 재킷과 어머니의 바지와 이웃이 입었던 티로 자신을 표현하는 패션 스타일링이 자연스럽게 우리에게도 정착되었으면 하는 바람은 너무 큰 꿈일까.

지구의 생명은 다해가고 있다. 자원은 무한하지 않기에 재활용 기술과 방법에 지혜를 모아야 한다. "지구는 커다랗지만 우주라는 바다에 떠 있는 섬일 뿐이다. 섬의 자원을 다 소진하고 나면 그다음 수순은 불 보듯 뻔하다." 저자의 말이 아니어도 이제는 우리의 소비 방식을 되짚어보는 것이 필요하고 더는 늦출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핀란드의 중고 거래의 문화가 던지는 메시지를 통해, 물건의 가치에 대한 고민, 소비에 대한 고민, 더 나아가 미래에 대한 고민을 생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나아가 우리가 모두 함께 고민해 보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되었다.

핀란드 사람들은 왜 중고 가게에 갈까? - 헬싱키 중고 가게, 빈티지 상점, 벼룩시장에서 찾은 소비와 환경의 의미

박현선 (지은이), 헤이북스(2019)


태그:#핀란드 사람들은 왜 중고가게에 갈까, #박현선, #재활용, #환경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