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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아동 성착취 범죄자 손정우의 송환 불허 결정을 규탄하는 집회에 참석했다. 여느 집회의 현장이 그러했듯 이날도 다양한 사람들이 발언대에 올랐지만, 유독 기억에 남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10대 페미니스트 여성들이었다.

물론 평소라면 그렇게 주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이 여는 집회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평등하게 참여했고 연령·직업·성적지향 등의 차이는 그 자체로 그렇게 특별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손정우 미국 송환 불허에 분노한 사람들'에 참여한 시민들이 10일 오후 서울 지하철 2호선 서초역 앞에서 손씨의 미국 송환을 불허한 사법부를 규탄하며 '분노한 우리가 간다'를 주제로 집회를 열고 있다.
 "손정우 미국 송환 불허에 분노한 사람들"에 참여한 시민들이 10일 오후 서울 지하철 2호선 서초역 앞에서 손씨의 미국 송환을 불허한 사법부를 규탄하며 "분노한 우리가 간다"를 주제로 집회를 열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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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때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들에게 지난 일주일은 어떻게 다가왔을까. 아동 성착취 범죄자가 유유히 세상으로 풀려나고, 성폭력 가해자의 모친상 빈소에 정치인들의 화환이 줄을 서며, 자신의 성추행 의혹이 고발된 후 한 고위공직자가 자살한 일들이 벌어졌으니까.

누구에게든 이 시간은 지옥 같았을 것이다. 다만 집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며, 나는 처음으로 10대 여성의 위치에서 지금의 세상이 어떻게 다가올지 진지하게 생각했다. 이미 '스쿨미투'가 드러낸 것처럼, 학교 또한 여성에게 안전하거나 평등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학교를 벗어나 마주한 공간이 또 다른 지옥에 불과하다면 그건 너무 암울한 미래가 아닌가. 아니 '암울한 미래'조차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조차 침해되는 범죄가 횡행하고 공정한 판단을 해야 할 이들조차 이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세상이라면, 그곳에 여성으로서 그들이 존재할 자리가 있다고 봐야 할까. 그때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10대 여성에게 이미 미래는 보이지 않겠구나. 어쩌면 그들에게 세상은 이미 망했구나.

이미 망한 세상을 재건하는 페미니즘
 
 '늘 그랬듯이 길을 찾아낼 것이다' - 폭력의 시대를 넘는 페미니즘의 응답, 겉표지.
 "늘 그랬듯이 길을 찾아낼 것이다" - 폭력의 시대를 넘는 페미니즘의 응답, 겉표지.
ⓒ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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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발언대에서 10대 페미니스트 여성들은 결코 절망만을 말하지 않았다. 이미 늦었고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발언하지 않았다. 대신 싸움을 멈추지 말고 오래오래 함께할 것을, 그리하여 다 같이 무너진 세상을 재건할 것을 제안했다.

그건 막연한 낙관에 기댄 비약이 아니었다. 지금의 사회 체제가 효용을 다하고 더 이상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책 <대한민국 넷페미史>에는 페미니스트들이 기존 체제들이 붕괴를 앞둔 1920~30년대, 1990년대, 그리고 2015년도에 가장 활발히 등장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페미니스트야말로 기성체제를 가장 완강히 거부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이날 집회에서 그 발언자들은 스스로를 '청소년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했다. 물론 변화를 만드는 과정이 그리 순조로운 것은 아니다. 청사진에 다다를 지도를 그리는 일부터 쉽지가 않다. 발 디딘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부터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나 페미니스트로서 글을 쓰기란 많은 경우 까다로운 정도가 아니라 막막하기 그지없다. 모든 당연하게 여겼던 전제들을 의심하고 재해석해야 한다. 손쉬운 이분법이나 단순한 구도를 거부하며 동시에 현재를 정확하게 마주하는 페미니즘 도서를 쓰기가 어려운 이유다.

하지만 그럼에도 용감하게 그런 일에 나서는 저자는 늘 등장하기 마련이다. 소개할 권김현영의 <늘 그랬듯이 길을 찾아낼 것이다>는 그런 책들 중 가장 최근에 나온 저서다. 

페미니스트가 가야 할 길을 찾는 책

우선 제목부터 인상적이다. 개인적으로 좋은 책은 제목이 정직한 책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책의 목표와 주제가 아주 선명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늘 그랬듯이 길을 찾아낼 것이다>도 마찬가지다.

이 책은 부제목처럼 존엄을 아무렇지 않게 해하는 '폭력의 시대'를 넘는 '페미니즘의 응답'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지난 역사에서 페미니스트들이 반복해온 작업, '길을 찾는 일' 그 자체이기도 하다.

<늘 그랬듯이 길을 찾아낼 것이다>는 요약하자면 유해한 남성성과 남성연대에 대한 비판, 미투 혁명을 비롯한 동시대 운동에 대한 분석, 그리고 페미니스트의 시각에서 사회체제를 재해석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소 거칠게 정리하자면 점점 더 강력하고 통제할 수 없이 불거진 여성혐오와 젠더폭력의 원인, 이에 대한 저항과 그 운동이 보인 가능성, 페미니즘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체제를 향한 그림이 담겨 있다. 그리 두껍지 않은 책 안에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가능성을 모색하는 과정까지 충실하게 기록되어 있는 셈이다.

이 책의 장점은 아주 까다롭고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이를 단순하게 요약하거나 겉면만을 조망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책의 여러 부분에서 독자의 통념을 뛰어넘는 통찰과 해석이 등장한다.

가령 저자는 강간문화의 존재를 드러내고 이를 문제로 지목하는 선에서 멈추지 않고(물론 나는 그런 내용을 담은 글도 치열한 고민의 산물이자 존재 의의가 있는 글이라 생각한다), 강간문화를 경험하는 다양한 남성성들을 분석하여 어떻게 이 문화가 실질적으로 작동하는지를 분석한다.

현실을 입체적이고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식으로 강간문화에 대항해야 할지, 보다 명확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또한 통념과 다르게 폭력이 주변화 된 남성성만의 특징이 아님을 지적하는 저자의 분석은, 아주 명백하게 고발되었지만 손쉽게 비가시화 되었던 특권층 남성의 폭력을 직시하게 만든다.

한 마디로 <늘 그랬듯이 길을 찾아낼 것이다>는 낡은 인식이 가렸던 현실을 드러내고 거기서부터 나아갈 길을 찾는다.

길을 찾아낼 것이다, 그 약속을 믿는다

이 책은 또 여러 저항운동의 가능성을 조명하면서도 동시에 비판적인 접근 역시도 함께 수행한다. '피해자 중심주의'가 이룬 성과와 함께 이 개념이 멈춰선 지점을 분석한 장과 정체성에 기반한 운동이 지닌 한계를 고민한 부분이 대표적이다.

이는 권김현영이 '연구활동가'로서 운동의 현장에서 지속적으로 호흡하고 참여해 온 저자이기에 쓸 수 있었던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대중화 된 여성운동'에 놀라고 등장 자체에만 의의를 부여하는 글들을 때로 접하곤 하는데(이는 나 또한 통렬히 반성하는 부분이다), 이 책은 그런 글들이 도달하지 못했던 고민과 성찰에 접근한다. 이는 자칫 운동에 대한 '평가절하'로 오독될 수도 있기에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이미 최악을 보았다고 생각한 순간 더 끔찍한 현실이 찾아왔다. 2020년 7월, 특히 지난 한 주는 많은 이들에게 절망적인 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무례와 다소 간의 비약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그것들은 새롭게 발생한 문제였지만 '새로운 문제'는 아니었다.

어떤 면에서 계속해서 반복적이고 누적되어 온 고루한 사건들의 또 다른 면면이었다. 이는 우리가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나온 시간과 사건들을 정확히 해석하고 우리가 해온 운동의 한계와 가능성을 명확히 인지할 수 있다면, 그 발판을 딛고 우리는 보다 빠르고 과감하게 새로운 미래를 만들 시도를 할 수 있다.

나는 <늘 그랬듯이 길을 찾아낼 것이다>가 그 출발선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책들 중 하나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를 약속한다. 그 약속을 나는 믿는다.

늘 그랬듯이 길을 찾아낼 것이다 - 폭력의 시대를 넘는 페미니즘의 응답

권김현영 (지은이), 휴머니스트(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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