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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식민지시대가 끝난 지 5년도 안돼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한국전쟁' 혹은 '6.25전쟁'은 이후 한국사회의 모든 구조를 주조했다. 그 전쟁이 발발한 지 무려 70년이 흘렀다. <오마이뉴스>는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전쟁의 또다른 상흔인 화교부대병 2세와 소년병, 월남민 2세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편집자말]
김육안 여한화교참전동지승계회장이 아버지 고 김성정 선생의 참전용사증을 들어 보이고 있다.
▲ 김육안 여한화교참전동지승계회장 김육안 여한화교참전동지승계회장이 아버지 고 김성정 선생의 참전용사증을 들어 보이고 있다.
ⓒ 김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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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화교 용사들은 거의 다 돌아가시고, 이제는 참전동지회에서도 연락이 닿는 분은 거의 안계십니다."

김육안 여한화교참전동지승계회장의 표정에서 착잡함이 묻어났다. 김 회장의 아버지 고 김성정(1926~2001)씨는 한국전 당시 육군첩보부대 SC지대 소속의 무장공작원으로 북한군과 중공군을 상대로 첩보활동을 벌였다.

중국 산둥(山東)성 르자오(日照)현에서 태어난 김씨는 6살 때 가족과 함께 함경남도 함흥으로 이주했다. 17세 무렵 혼자 서울로 올라와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음식점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돈을 모아 집으로 부치곤 했다. 해방이 되고 38선이 그어졌다. 뒤이어 전쟁이 터지면서 다른 한국인들처럼 김씨도 이산가족이 됐다.

"전쟁이 터지자 아버지는 화교 의용군 모집 소식을 듣고 자원하셨습니다. 군에 입대하면 '함흥에 있는 가족들을 만날 수 있는 길이 있겠구나'라고 생각하셨답니다."

SC지대 무장공작원 '김성정'

1951년 초 입대한 김씨는 경기도 파주에서 군사훈련을, 서울 사직동에 있던 육군첩보부대 안가에서 정보교육을 받은 후 강화도 교동도로 보내졌다. 전쟁 당시 육군첩보부대는 서해안에 18지구대, 동해안에 36지구대를 비롯해 여러 지대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전방 군단과 사단에 이러한 지대들을 파견했다.

화교청년들로 구성된 SC지대는 강화도 교동도를 본거지로 활동했다. 이곳에서 김씨는 주로 바다 건너 황해도를 넘나들며 첩보활동을 했다. 북한군과 중공군의 배치와 이동상황, 군사시설, 보급창고, 교량 같은 공격 목표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다. 치열한 교전도 여러 번 경험했다.

"다리에 관통상을 입으셨어요. 거기 말고도 아버지 몸 여기저기엔 총알에 맞은 상처가 있었습니다. 날씨가 조금이라도 궂으면 많이 아프다면서 고통스러워 하셨지요."

자나 깨나 부모·형제 소식이 궁금하던 김씨는 작전 중 함흥에 갈 기회가 있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살던 집을 찾아 갔지만 가족을 만날 수는 없었다. 먼 훗날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전쟁이 터지자 가족들은 다시 고향 산둥성으로 돌아간 후였다.

김씨와 SC지대에서 함께 복무했던 사촌동생(김 회장의 당숙) 김정의 대원은 1952년 겨울, 수송기로 북한 지역에 공중침투한 후 실종됐다. 김 회장이 아버지로부터 들은 얘기로는 낙하산으로 북한 내륙 깊숙히 투하됐던 사람들 중 살아서 돌아온 대원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김씨처럼 SC지대에서 무장공작원으로 활동했던 화교 청년들은 모두 70여 명.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20여 명에 불과했다.
    
1970년대 여한화교참전동지회가 작성한 회원 명단 중 일부. 한국전 당시 육군 제1사단 중국인특별수색대와 육군첩보부대 SC지대에서 복무한 60여 명의 이름이 확인됐지만, 지금은 거의 고인이 됐다.
▲ 참전 화교 명단 중 일부 1970년대 여한화교참전동지회가 작성한 회원 명단 중 일부. 한국전 당시 육군 제1사단 중국인특별수색대와 육군첩보부대 SC지대에서 복무한 60여 명의 이름이 확인됐지만, 지금은 거의 고인이 됐다.
ⓒ 여한화교참전동지승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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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의 명물 '지동관' 혹은 '김 상사네'

정전협정이 맺어지고 SC지대가 해체되면서 김씨는 제대했다. 서울·부산·광주를 떠돌던 그는 1957년 의정부에 정착했다. 중앙로 뒷골목에서 '용해반점'이란 조그만 중국음식점을 열었고, 1963년 자리를 옮기면서 '지동관'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상호 지동(志東)은 김씨가 고향인 산둥(山東)을 그리워하며 언젠가는 가족을 만나겠다는 의지를 담아 지은 것이라고 했다. 김씨의 참전 사실을 알게 된 이웃들은 '지동관'보다는 '김 상사네'라고 불렀다.

"주변 어르신들이 '우리도 참전 못했는데, 중국사람인 당신이 우리나라를 지켜줘서 고맙다'고 하셨어요. 많은 한국 분들이 '이제는 우리가 도와줘야 한다'면서 자장면 한 그릇, 우동 한 그릇이라도 먹을 일이 생기면 꼭 우리 집에 와서 팔아주셨습니다."

가게는 번창했다. 1970~80년대 의정부에서 지동관은 '화상(華商) 중화요리집'의 대명사로 통했다. 한국인 참전용사들은 일부러 지동관에서 약속을 잡았고, 전쟁 당시 육군첩보대 36지구대장을 지냈던 김동석(예비역 대령, 가수 진미령씨 아버지) 경기도북부출장소장은 회식이나 모임은 꼭 지동관에서만 했다. 의정부에 정착한 함경도 출신 실향민들은 김씨를 같은 '아바이'로 대우했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서 제외
 
이지성 주한대만대표부 부대표를 비롯한 화교 단체 회원 등이 5월 15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 서울 현충원 외국인 묘역 한국전쟁 참전 종군화교 강혜림 위서방의 묘 앞에서 참배를 마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지성 주한대만대표부 부대표를 비롯한 화교 단체 회원 등이 5월 15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 서울 현충원 외국인 묘역 한국전쟁 참전 종군화교 강혜림 위서방의 묘 앞에서 참배를 마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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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2월 국방부는 참전 화교 47명에게 종군기장을 수여했다. 이를 계기로 참전 화교용사들은 '화교참전동지회'를 결성했다. 1973년 9월에는 김씨를 포함해 10명의 참전 화교용사들이 보국포장을 받았다.

"아버지가 보국포장을 받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참전용사가 노후 걱정을 하지 않도록 국가에서 책임지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외국인(중화민국 국적)이어서 유공자 등록을 할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어요. 보훈 혜택을 받지 못하니 전쟁 때 입은 부상 후유증으로 고생하면서도 자기 돈을 내고 치료해야 했습니다. 저희는 그래도 먹고 살 만해서 그러려니 했지만, 정말 형편이 어려운 참전 화교들이 많았습니다. 그분들은 만년에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다 돌아가셨습니다."

1980년대 김씨는 미국에 있는 친척으로부터 가족이 고향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1990년대 초반, 김씨는 홍콩을 거쳐 산둥성을 방문해 형제들과 재회할 수 있었다.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신 후였다.

2000년대 들어 정부는 북파공작원 등 특수임무수행자들의 실체를 인정하고 보상하는 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지만, SC지대에서 복무했던 화교 첩보부대원들은 보상대상에서 제외됐다. 역시 외국인이란 이유였다.

"아버님과 다른 참전 화교 어르신들을 모시고 총리실 산하에 설치됐던 보상심의위원회를 찾아 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외국인이라 참전 기록을 보여줄 수 없고 보상도 받을 수 없다는 겁니다.

국방부는 '당신들은 애초에 중화민국 정부로부터 대가를 받고 자원입대한 것'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아버님 말씀이 'SC지대에 지원할 때 쌀 한 포대를 받은 게 전부'라고 하셨어요. 그걸 가지고 대가를 받았다고 하면 화교 참전자는 쌀 한 포대 가치밖에 안 되는 것 아닙니까."

 
평생 중화민국 국적을 유지했던 김성정 선생은 1998년 3월 한국으로 귀화했다. 이듬해 8월 참전용사증서가 발급됐다.
▲ 김성정 선생의 참전용사증 평생 중화민국 국적을 유지했던 김성정 선생은 1998년 3월 한국으로 귀화했다. 이듬해 8월 참전용사증서가 발급됐다.
ⓒ 김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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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3년 전, 중화민국 국적 포기하다

1998년 3월, 김씨는 평생 보유했던 중화민국 국적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귀화했다. 국립묘지 안장 자격을 얻기 위해서였다. 3남 1녀 자녀들 중 막내아들만 김씨와 함께 한국국적을 얻었고, 김 회장을 비롯한 다른 가족들은 여전히 중화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다.

"돌아가시기 전에 무엇이라도 이 세상에 아버지의 인생이 헛되지 않았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셨어요. 국립묘지에 안장되려면 귀화를 해야만 했습니다. 한국국적을 얻은 지 1년 만에 참전용사증이 나왔는데, 아버님이 정말 좋아하셨어요."

2001년 1월 5일, 김씨는 노환으로 별세했다. 보훈처에서 관을 덮을 영구용 태극기를 보내왔다. 대한민국 정부가 고인의 참전 공훈을 인정하고 그 명예를 국가가 지켜준다는 의미였다. 김 회장은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서울 현충원은 자리가 없어서 대전 현충원에 안장할 수 있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멀면 자주 가기 어려울 것 같았어요. 그래서 먼저 돌아가신 어머님이 계신 파주 용미리 화교묘지에 두 분을 함께 모셨습니다."

1980년대까지 60여 명에 이르렀던 화교참전동지회원 중 생존자는 이제 국내·외를 통틀어 2~3명으로 추산된다. 그마저 고령에 거동이 편치 않아 연락이 어려운 상태다. 화교 참전자가 이제 몇 분 남지 않으면서 참전동지회는 참전동지승계회가 됐다. 선대의 유지를 이어간다는 의미다.

"이제 참전 화교 용사들은 대부분 돌아가셨습니다. 현충원에 참전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작은 동판 하나라도 놓일 수 있다면, 참전용사들이 저승에서라도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70년 전 대한민국이 위태로웠을 때 이 땅의 화교들도 한국인들과 함께 피를 흘렸다는 역사는 어딘가에는 반드시 기록돼야 합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이런 사실은 잊힐 테니까요."

태그:#참전 화교, #SC지대, #김성정, #김육안, #한국전쟁 7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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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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