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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군 측 벽보.
 공산군 측 벽보.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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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6.25전쟁이 일어나던 1950년에 여섯 살 소년이었다. 내 고향은 경북 구미로 그때 우리 가족들은 7월 하순 인민군이 진주한 이후에야 피란을 떠났다. 당국이 전황을 늘 사실대로 알려주지 않아 그랬다. 우리 가족은 달구지에 피란 봇짐을 잔뜩 싣고 낙동강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곳에 이미 진주한 인민군들이 피란민들에게 호통을 쳤다.

"남조선 인민들, 어서 살던 곳으로 돌아가라우."

우리 가족은 하는 수 없이 살던 동네로 돌아왔다. 그러나 마을은 유엔군들의 공습이 심해 금오천 냇가로 피해 그곳에 지냈다. 우리 조무래기들은 피란이 뭔지도 모른 채 냇가에서 피라미를 잡거나 들판의 방아깨비나 메뚜기를 잡으면서 신나게 놀았다.

그러다가 비행기소리만 나면 솔개소리에 놀란 병아리처럼 잽싸게 토굴 속으로 달려가 머리를 벽에 쳐박고 공습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당시 유엔군 비행기는 주로 B-29 전폭기이거나 F-84 세이브제트기로 일명 '쌕쌕이'라고 불렀던 전투기였다.

B-29 전폭기들은 4대가 한 편대로 십수 편대가 폭탄을 잔뜩 싣고 와서 마구잡이로 떨어트렸다. 적진에만 투하하는 게 아니라 아무 곳에나 무차별 폭탄을 쏟았다. '융단폭격'이라고 했다. 마치 그들에게 한반도는 몹쓸 저주의 땅처럼. B-29 전폭기는 폭탄을 마치 염소가 똥을 누듯이 주르르 쏟았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들이 물러가자 그제부터 비행기들은 때때로 하늘 하얗게 전단(삐라)을 뿌렸다.

그 시절은 종이가 귀했던 탓으로 삐라가 떨어지면 우리 꼬맹이들은 그걸 주워 딱지를 만들거나 밑씻개로 썼다. 그때 나는 글을 몰라 삐라의 내용을 알 수 없었다. 그 삐라를 2004년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자료열람실에서 다시 볼 수 있었다. 후방에 남은 인민군들에게 투항을 권유하는 삐라가 주를 이뤘다.
 
유엔군 측 삐라.
 유엔군 측 삐라.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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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 측 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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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어른이 될 때는 통일이 돼서 군에 가지 않아도 될 거다."

하지만 그 손자는 군에 입대해 전방 소총소대장으로 복무했다.

[전선일기] "사시사철 웬 삐라는 그렇게도 많은지"

6.25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지났다. 아직도 통일의 길은 요원해 보이고 이즈음에는 나의 손자뻘 되는 젊은이들이 휴전선을 사이 두고 여태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6.25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세계전사에 가장 '더티'하다.

나는 1969년 6월부터 1971년 6월까지 보병 26사단 73연대에서 복무했다. 현재 파주 출판단지인 파주 교하 일대와 양주군 백석면 일대가 근무지였다. 특히 파주 교하 심학산 기슭과 한강 하류에서 근무할 때는 북한이 빤히 보이는 곳으로, 대남방송과 남과 북에서 날려 보낸 삐라의 홍수 속에 살았다.

특히 매주 수요일은 수색일이었는데, 그날은 주둔지 일대에 뿌려진 삐라를 줍는 날이었다. 그 시절 나의 전선일기 한 대목이다.
 
1969년 8월 20일 (수)

매주 수요일 오전은 수색일이다. 2개 소대가 수색을 나간다. 1개 소대는 부대 뒷산 심학산을, 1개 소대는 한강변 수색이다. 수색의 목적은 숲이나 동굴, 계곡 등 은폐된 곳에 숨어잇는 간첩이나 공비를 색출하는 일이지만 강변 수색은 노출된 곳이라 주로 뿌려진 삐라 줍는 일이다.

사시사철 웬 삐라는 그렇게도 많은지 강변에는 삐라가 지천으로 깔려 있다. 삐라는 줍는 즉시 마대에 담아 중대로 가져와 소각하거나 상급부대로 보내지만 줍는 순간 보지 않을 수 없다. 유치한, 상투적인 선전문구들이다. 어떤 때는 우리 측이 북으로 날려 보낸 삐라가 풍향을 잘못 판단한 탓으로 뭉텅이나 박스째로 떨어진 걸 줍기도 한다.

우리나라에는 참 삐라와 구호가 많다. 그 문구가 유치하기 짝이 없다. 후진국일수록 독재가 심할수록 삐라와 구호가 많다고 한다.
   
NARA에서 찾은 삐라와 벽보들
 
공산군 측 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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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군 측 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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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군 측 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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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04년부터 네 차례 미국 워싱턴D.C. 근교의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을 찾아가 한국전쟁 관련 문서를 검색 수집해 왔다. 그곳의 한국전쟁 자료더미에서, 그리고 북한 측 노획물 상자에서, 또한 맥아더기념관 문서 상자에서 그 당시의 숱한 삐라들과 벽보들을 볼 수 있었다.

군복무 시절에 그런 삐라의 치졸함에 분노를 느꼈다. 남과 북, 동족끼리 서로 평화롭게 살 생각보다 서로 상대를 헐뜯고, 적대시하고,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불구대천의 원수로, 서로 총부리를 겨누면서 70여 년을 지냈다.

6.15 이후 한때 대북-대남방송도 잦아지고 삐라들도 사라졌다고 하더니 어느새 다시 되살아나 남북 긴장의 도화선 역할을 하고 있다. 얼마나 많은 동족이 더 비참하게 희생돼야만 우리 겨레는 이런 유치한 작태에서 벗어나 서로 화목해 질 수 있을는지? 그저 하늘을 향해 한바탕 통곡이라도 하고 싶다.
 
탈북민단체인 자유북한운동연합이 지난달 5월 김포시 월곶리 성동리에서 '새 전략핵무기 쏘겠다는 김정은'이라는 제목의 대북 전단 50만장, 소책자 50권, 1달러 지폐 2천장, 메모리카드(SD카드) 1천개를 대형풍선 20개에 매달아 북한으로 날려 보내는 모습.
▲ 탈북민단체, "김정은 규탄" 대북전단 살포 탈북민단체인 자유북한운동연합이 지난달 5월 김포시 월곶리 성동리에서 "새 전략핵무기 쏘겠다는 김정은"이라는 제목의 대북 전단 50만장, 소책자 50권, 1달러 지폐 2천장, 메모리카드(SD카드) 1천개를 대형풍선 20개에 매달아 북한으로 날려 보내는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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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더 이상 강대국의 패권주의에 희생양이 되지 말자. 더 이상 국제 무기상의 봉이 되지 말자. 남과 북으로 삐라를 뿌리는 자들을 겨레의 이름으로 강력히 규탄하자. 남북 당국자는 더 이상 분단을 고착시키고 남북 화해에 방해하는 자는 겨레의 이름으로 엄단하기를 이 땅의 한 백성으로 호소한다.

이번 기사에는 기자가 NARA에서 직접 수집한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의 삐라와 벽보를 소개한다. 앞으로 더 이상 삐라로 남북 화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유치한, 반민족적인 작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당국자는 그 방지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남북 긴장 완화와 평화통일로 가는 첫걸음일 것이다.
 
유엔군 측 선전 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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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군 측 선전 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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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 측 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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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 측 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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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삐라와 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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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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