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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이 존중받는 경기도를 만들겠습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취임 일성이다. 민선 7기 출범 2년을 맞은 이재명 지사의 친노동 정책이 주목받고 있다. 전국 지방자치단체 중 처음으로 노동국을 신설한 이 지사는 지방정부의 노동경찰권 확보를 요구하고 있다.

“노동하면서도 노동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시절을 심장에 담고 있다”는 ‘소년공 출신’ 이재명 지사. 그의 노동 문제에 대한 고민은 31년 전 광주·이천 노동법률상담소 소장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그와 함께 활동했던 김재기(59)씨를 만나, ‘노동운동가 이재명’에 대한 얘기를 들어봤다.[편집자말]
 
 김재기(59.경기도 노인일자리지원센터 센터장)씨가 31년 전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함께 광주·이천 노동법률상담소를 열었을 때 개소식 기념으로 간직하고 있던 톱.
 김재기(59.경기도 노인일자리지원센터 센터장)씨가 31년 전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함께 광주·이천 노동법률상담소를 열었을 때 개소식 기념으로 간직하고 있던 톱.
ⓒ 경기도 권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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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상담소, 89. 5. 13. 개소식 기념'

강산이 세 번 바뀌었지만, 톱 손잡이에 삐뚤 삐뚤 새겨진 글자는 또렷이 남았다. 그래도 톱날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곳곳에 녹이 슬었다. 그 녹이 주는 느낌이 왠지 애잔하다. 손으로 톱을 쓸어내리는 김재기씨의 기억은 31년 전 경기도 이천시 창전파출소 건너편 건물 지하 노동법률상담소 문을 천천히 열고 있었다.

상담소 칸막이 공사비를 아끼기 위해 간사들이 직접 톱과 망치를 들고 베니어합판을 자르고 세우고 못질했다. 10여 일이 걸려 공사가 끝났다. 그날을 기억해야겠다는 생각에 들고 있던 톱 나무 손잡이에 연필 깎는 칼로 글자를 새겼다.

"그 당시 사진은 잘 안 찍었다. 경찰이나 권력기관으로부터 탄압을 받을 경우 불리하게 작용하는 등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물론 사진기도 없었다."

그래서였다. 노동법률상담소였지만, 톱에 새겨진 이름에는 '노동' 자가 빠졌다. 톱에 이름 하나 마음대로 새길 수 없을 만큼 엄혹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이 톱은 그냥 톱이 아니었다. 김재기씨는 "족보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때 뭘 했느냐고 누가 물어봐도 보여 줄 게 이 톱밖에 남지 않아서다.

[관련 기사 보기]
'노동 존중 경기' 기획 인터뷰 ② - 31년 전 이재명의 '잘린손가락' 때문에 벌어진 일


31년 전 광주·이천 노동법률상담소 소장에서 경기도지사로

1987년 6월 항쟁의 바람을 타고 일어난 노동자 대투쟁으로 전국에 노동조합 조직화가 급속히 진행됐다. 하지만 당시 인구 20만 명 중 노동자가 8만여 명이나 되는 경기도 광주·이천·여주 지역은 2년이 지나도록 조용했다. 진보·노동단체 하나 만들어지지 못했다. 그 흔한 변호사 사무실도 찾기 어려웠다. 돈도 배경도 없던 노동자·농민들은 아무리 부당한 일을 당해도 찾아가 호소할 곳이 없었다.
 
 김재기(59.경기도 노인일자리지원센터 센터장)씨가 31년 전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함께 광주·이천 노동법률상담소를 운영했던 상황을 얘기하고 있다.
 김재기(59.경기도 노인일자리지원센터 센터장)씨가 31년 전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함께 광주·이천 노동법률상담소를 운영했던 상황을 얘기하고 있다.
ⓒ 경기도 권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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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26살 젊은 변호사 이재명이 그곳에 무료 노동법률상담소를 내겠다고 하자, 지역이 술렁거렸다. 공안 기관의 감시와 압박 때문에 찾아가는 곳마다 퇴짜를 맞고, 겨우 찾아낸 곳이 창전파출소 건너편 건물 지하였다. 고양이 앞에 생선 꼴이었다. 정보과 형사들이 매일 상담소에 누가 언제 드나드는지 (파출소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억눌린 노동자·농민들의 불만은 머리끝까지 차오른 상태였다. 하루에도 수십 명씩 상담소 문을 두드렸다.

당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국제연대위원이기도 했던 이재명 지사는 3년 동안 그곳에서 노동자·농민의 권익을 위한 활동을 벌인 뒤, 성남시에서 시민운동을 시작했다. 성남시장을 거쳐 경기도지사로 취임한 이후 그는 각종 친노동 정책을 펼쳤다.

지역 노동계의 요구를 수용해 전국 지방자치단체 중 처음으로 노동국을 신설한 것이 대표적이다. 공공기관 노동이사제도 경기도 역사상 처음이다. 노동권익센터 설치, 공공기관 청소원, 방호원 등 현장 노동자 근무환경 개선, 택배 기사 등을 위한 노동자 쉼터 등은 도민으로부터 많은 박수를 받았다. 특히 도내 기간제와 파견·용역 노동자 등 비정규직 노동자 1,000여 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최근에는 이천 물류센터 화재 참사 등을 막기 위해 노동 현장에서 위법행위를 감독·단속하는 '노동경찰' 업무를 지자체에 중첩적으로 허용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31년 전 광주·이천 노동법률상담소 소장으로 노동자·농민의 권익을 위해 일했던 경험이 도정 운영에 밑거름이 된 것이다. 당시 상담소 간사로 일했던 김재기씨는 "이재명 변호사는 법률가로서 남고 싶어 하지 않았다"며 "그냥 노동 형제로서, 우리 사회에 어려움을 풀어줄 사람으로서, 동지로서 이해해달라고 늘 말했다"고 회상했다.

다음은 지난 5일 진행한 김재기씨와 인터뷰 일문일답 중 전반부이다.

- 본인 소개를 해 달라.
"작년부터 경기도 노인일자리지원센터의 센터장을 맡고 있다. 30년 전에 (경기도) 광주·여주·이천 지역 노동법률상담소에서 (간사로) 근무했다. 당시 이재명 변호사가 소장으로 있었다. 그곳은 약 80%가 농업이고, 20% 미만이 산업 지역이었다. 대단위(대규모) 공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에 대한 권익이나 노동조합 활동을 보장받지 못했다."

- 30년 전에 이재명 지사를 어떻게 처음 만났나?
"80년대 후반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난 시점이었고, 노동자의 권익을 위한 운동이 전국을 뒤덮는 상황이었다. 반면 경기도 동부권역인 광주·이천·여주는 조용했다. 농민의 쌀 생산을 통한 이익이 생계비에 못 미칠 정도도 열악했다. 농민과 노동자 권익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이 지역에서 나름대로 어떤 일을 해 볼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지인의 소개로 이재명 변호사를 처음 만났다. 당시 이 변호사는 사법연수원 2년 차가 마무리되는 시점이었다.

이 변호사가 본인의 진로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돼서 왔다고 하더라. 본인 성적으로 판·검사도 가능하겠지만, 이 지역의 낙후된 노동자·농민의 삶을 보고 본인만 편하게 살 수가 없다며 우리와 같이 하고 싶다고 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다들 얘기하니까 며칠이나 갈까 했다. 그런데 2주가 지나고 나서 (노동자들과) 상담 일정을 잡아보자고 하는 거다. 그렇게 이 변호사와 인연이 시작됐다."
 
 김재기(59.경기도 노인일자리지원센터 센터장)씨가 31년 전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함께 광주·이천 노동법률상담소를 운영했던 상황을 얘기하고 있다.
 김재기(59.경기도 노인일자리지원센터 센터장)씨가 31년 전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함께 광주·이천 노동법률상담소를 운영했던 상황을 얘기하고 있다.
ⓒ 경기도 권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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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광주·이천·여주 지역에는 노동자·농민의 권익을 위한 단체가 전혀 없었나.
"그렇다. 인근 수원이나 성남만 해도 노동단체가 많이 생기고 자주적인 노조도 적지 않게 들어서던 상황이었는데,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난 지 2년이 지났는데도 이 지역은 너무 조용했다. (학생 출신) 노동운동가 몇 명이 공장에 위장취업을 했지만, 서로 (조직적으로) 연결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노동운동의 불모지였다. 많은 노동자가 우울증이 생기고, 억울해도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정치적으로도) 보수 성향이 강한 지역이었다. 야당 국회의원이 전혀 없었다."

- 처절한 삶을 사는 노동자·농민이 많았는데,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단체가 왜 없었을까?
"당시 광주·여주·이천 지역에 노동자가 8만 명 정도였다. 대기업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중소기업보다 근로 조건이 나았다. 물론 보편적인 삶을 살기에는 넉넉하지 않았지만, 워낙 회사의 노무 관리가 잘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자기들이 받는 것 이상을 원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노동법률상담소에 나타난 이상한 사람들

- 당시 이재명 변호사가 지역에 왔을 때 굉장히 반가웠을 것 같은데.
"반가움도 있었지만 사실 두려움이 더 컸다. 이재명 변호사가 '노동자 변호사'라는 게 이미 지역에 알려졌다. 간판을 달기도 전에 넥타이를 맨 낯선 분들이 자주 (사무실에) 들어왔는데, 이분들이 뭘 물어보러 왔다고 하면서도 실제 물어보지는 않는 거다. 나중에 보니 이분들이 정보과 경찰들, (기업에서) 노무관리 하는 분들, 군청 노정계 직원들이었다. 당시 경찰이나 노정계 직원들이 노동자의 권익을 충실하고 공정하게 처리한다고 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처음에는 '좋은 일 한다고 문을 열긴 했지만 설마 그렇겠냐'고 해서 노동자 한두 분 정도 오시더니, '이거 정말 노동자를 위한 사람들이 온 것 같다'고 소문이 나면서 저녁이면 노동자들로 사무실이 항상 가득 찼다. 노동자들이 탄압의 눈초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는 건 그만큼 이분들의 요구와 분노가 이미 머리끝까지 차 있었다는 거다. 농민들도 그 소식들을 듣고 찾아오는 계기가 됐다."

- 당시 이재명 변호사 나이가 26세 정도로 굉장히 젊었는데.
"제가 2살 더 많다. (경기도지사가 된 이후에도) 가끔 만나면 (저를) 꼭 형님이라고 부른다. 그때도 (이재명 변호사는) 겸손하면서도 굉장히 재밌었다. 그러다 보니 노동자들이 한번 와서 (이 변호사를) 만나면, 또 언제 오느냐고 물어보고 다시 찾아오곤 했다. 그래서 수요일에는 오후 12시 넘어서, 토요일에는 아침 일찍 사람들을 만나는 것으로 (시간을) 정했다. 일주일에 두 번의 일정을 잡았는데, 이 변호사가 도착하기 전부터 사람들이 사무실에 가득 차곤 했다."

- 이재명 변호사는 당시 성남에 변호사 사무실을 냈다. 굳이 광주·여주·이천에서도 노동법률상담소를 낸 이유가 뭔가?
"저도 변호사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다. 시간도 많고, 돈도 짧은 시간에 많이 벌기 때문에 가능하겠지, 하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보니까, 토요일 오후 12시 이후에는 재판 일정을 아예 안 잡더라. (돈 버는 일도 줄여가면서) 희생을 하니까, 처음에는 좀 의아했다, 무슨 꿍꿍이속이 있나, 하고. 저도 그렇게 의심을 하는데, 다른 사람은 오죽했겠나. 그런데 점차 (이재명 변호사에 대해서)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우리 사회 노동자, 농민에 대한 이 분의 사랑과 열정이 진정성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

- 노동법률상담소를 이천 어디쯤 열었나.
"이천 창전파출소 맞은편 건물 지하였다. 경찰이 (파출소에서) 내려다보면 누가 (상담소에) 내려가는지 다 보였다. 그런데도 그곳에 (상담소를) 연 이유는 장소 잡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노동' 자가 들어가니까 가는 곳마다 모두 거절을 당했다. 그런 상황에서 (경찰서 앞에 건물을 가지고 있는) 한 분이 상관하지 않고 (빌려) 주겠다고 하더라. 하지만 (상담소에) 오는 사람들한테 큰 부담이 될 텐데 어떻게 하나, 걱정됐다. 그래서 간판을 일시적으로 내리고, 알음알음 찾아오는 사람부터 하자고 해서 시작을 했다."

- 노동자·농민들이 파출소 앞을 지나서 상담소를 방문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맞다. 경찰도 서 있고, (상담소 들어오는 것이) 앞에서 다 보이고, 누가 오겠나. 그래도 우리는 한 명이 오더라도 (차차) 늘려가면 되지 않겠느냐, 했는데, (간판을) 떼었을 때도 사람들이 몰려오는 건 똑같았다. 그렇게 노조 활동을 열심히 하는 분들이 한 분 한 분 늘어나기 시작한 거다."

- 31년 전 노동법률상담소를 기억할만한 물건은 거의 없어졌지만, 개소식 기념 톱을 아직 가지고 있는데. 톱 손잡이에 '이천상담소'라고 새겨져 있고, '89년 5월 13일 개소식 기념'이라는 문구와 사무실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보통 개소식 기념으로 톱을 만들진 않는데.
"그때 상담소가 50평 정도 되는 통 사무실이었다. 교육 공간, 상담 공간 등 4~5개를 만들어야 상담소로써 기능할 수 있는데, 차마 그 공간을 만들겠다고 (이재명 변호사에게) 돈을 달라고 하기가 어려웠다. (이 변호사가) 사무실 보증금까지 냈는데, 그것(인테리어 비용)까지 달라고 하면 정말 뻔뻔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이 변호사에게 10~20만 원 정도만 더 필요할 것 같다고 얘기를 해서 받았다. 어쨌든 멀쩡한 남자들이 있으니 재료를 사서 우리가 직접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한 거다. 그렇게 톱 한 자루, 망치 하나, 베니어합판 20여 장을 사 와서 할 줄도 모르는 재단을 하고, 자르고, 막고 하다 보니 엉성하게나마 사무실 같은 사무실이 만들어졌다. 그때 이 합판을 자르다가 손에 물집이 잡혔는데, 이 톱이 굉장히 고맙기도 하지만 신기한 거다. 우리 손으로 직접 인테리어를 했다는 것이.

(칸막이 작업이) 10일 정도 걸렸는데, 끝나고 난 뒤 앉아서 차 한 잔 마시다가 왠지 이걸 기억해야 할 것 같았다. 그 당시 사진은 잘 안 찍었다. 경찰이나 권력기관으로부터 탄압을 받을 경우 불리하게 작용하는 등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물론 사진기도 없었다. 그래서 한쪽에 쪼그리고 앉아서 (톱 손잡이에) 써놨었는데. 이게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다."

- 처음 노동법률상담소 문을 열 때 이 톱이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인데.
"저와 이재명 변호사한테는 지나서 생각했을 때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특히 저한테는 족보 같은 것이다. (누군가) 그때 뭐했냐고 물어봐도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증명서 발급도 못 한다. 그런데 이거 하나는…. 그래도 '내가 이때부터 시작했구나' 하는 증표가 되기도 하고, '이재명 변호사도 그때 같이 시작했구나' 하는 증표로 간직하고 있다."

- 톱 손잡이에 새긴 '이천상담소'에서 '노동'이라는 단어가 빠졌는데, 공안탄압을 우려해서인가?
"맞다. 그때는 '노동'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것을 두고 굉장히 민감하게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특히 이재명 변호사는 당신이 법률가로서 남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냥 노동 형제로서, 우리 사회에 어려움을 풀어줄 사람으로서, 동지로서 이해해달라고 늘 말했다."

이재명 변호사가 건넨 100만 원이 든 봉투

- 무료 법률 상담을 했다. 사무실 운영 비용은 어떻게 마련했나?
"이재명 변호사가 사무실 임대보증금을 마련했다. 당시에는 이 변호사가 아는 친구들이 많아서 (보증금을) 마련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정기적인 월세를 마련하기도 사실 쉽지 않았다. 고민하고 있던 어느 날 이 변호사가 100만 원이 넘는 돈을 월세와 활동비로 쓰라고 주더라. 첫 달이니까 이렇게 하는구나, 하고 생각을 했는데, 한 달 지나서 또 걱정하고 있으면 이 변호사가 돈을 주더라.

상담소 간사들을 성남으로 오라고 해서 삼겹살에 소주를 사주기도 했다. 지금은 소주, 삼겹살이 흔하지만, 그때만 해도 우리는 1년 내내 삼겹살 먹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거 사 먹으려면 차라리 쌀 사 먹지, 그랬다. 간사들에게 소주에 삼겹살을 사주는 것만 해도 엄청나게 힘이 됐는데, 이천으로 돌아올 때쯤 되면 봉투에 돈을 담아서 '쓰십시오' 하고 주더라. 한 달이나 하고 말겠지 했는데, 그렇게 돈을 주는 게 계속 지속했다. 그때 월세가 한 20만 원이고, 간사 3명 활동비하고 생활비까지 나눠 쓸 만큼 큰돈이었다. 간사들이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김재기(59.경기도 노인일자리지원센터 센터장)씨가 31년 전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함께 광주·이천 노동법률상담소를 운영했던 상황을 얘기하다가 눈물을 닦고 있다.
 김재기(59.경기도 노인일자리지원센터 센터장)씨가 31년 전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함께 광주·이천 노동법률상담소를 운영했던 상황을 얘기하다가 눈물을 닦고 있다.
ⓒ 경기도 권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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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파출소 앞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고.
"어느 날 건물 주인이 찾아와서 자기 아들이 사업한다고 사무실을 비워달라고 했다. 두 달 치 월세를 안 받을 테니 그 기간까지는 있으라고 했다. 두 달을 채울 무렵, 건물 주인이 또 찾아왔다. 본인도 과거에 노조 활동을 했고, 어렵기는 했지만, 뜻이 좋아서 버틸 때까지 버텨보겠다는 생각으로 사무실을 빌려줬다는 거다. 그런데 그 뒤로 아침저녁으로 (정보과 경찰들이) 찾아와서 '큰일이 날거다' 하면서... 더는 버틸 수 없어서 차마 아들 핑계를 댔다고, 양심상 이 얘기를 해야만 자기 마음이 편하고 죄를 짓지 않을 것 같다고 하더라.

그 사무실 얻기 전에 4~5곳을 갔는데 다 퇴짜를 맞았기 때문에 1년만 있었어도 매우 고마웠다. 그다음에 간 곳이 이천 분수대 로터리였다. 이천에서 가장 높은 5층 건물 중 4층이었다. 그때도 비슷하게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하고 계약을 했다. 노동상담소가 아니고 그냥 좋은 일 하려고 하는 거라고. 보증금이 지하에 있을 때보다 많이 올랐지만, 이재명 변호사가 또 마련해줬다. 곰팡이 피던 지하에서 살다가 지상으로 올라가니까 세상 부러울 게 없더라. 거기서 더 많은 활동을 하게 됐다."

- 이재명 변호사는 어떻게 돈을 마련했을까?
"이재명 변호사가 성남시장이 되고, 2014년에 재선을 위해서 개최한 북 콘서트(출판기념회)에 참석했다. 거기에서 정말 부끄러우면서도 이재명 변호사에게 크게 감동을 한 일이 있었다. 이 변호사가 인사말을 하는데, 본인이 성남에 처음 변호사 사무실을 열 때 보증금이 없어서 조영래 변호사와 검정고시학원 원장을 찾아갔더니 1천만 원씩 선뜻 주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직전에 광주·이천 노동법률상담소 사무실 보증금 2천만 원은 자기 돈으로 준 거다.

그러니까 광주·여주·이천 노동자·농민을 위해서 자기가 가진 모든 돈을 노동상담소 보증금으로 내놓고, 정작 본인 변호사 사무실 보증금은 남한테 빌려서 마련했다는 얘기다. 저는 그 얘기를 그때 처음 들었다. 그전에는 전혀 몰랐다. 이재명 변호사한테 지금까지 한 번도 고맙고, 평생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를 못 했다. 큰 빚을 지고 사는 마음을 한 번도 보이지 못했다. 오늘 이 자리를 빌려서 저뿐만 아니라 당시 같이 활동했었던 분들이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고, 감사와 죄송함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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