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2 09:10최종 업데이트 20.06.16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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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5.3인천항쟁. ⓒ 연합뉴스



인민노련을 결성하다

정치학자 김원은 인민노련(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인민노련은 1980년대 전반기부터 인천 지역에 형성되었던 정치서클들이 통합하여 노동현장에 기반을 둔 마르크스·레닌주의 정치조직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이론진영과 대중운동의 경험자들이 결합하여 조직발전을 꾀하면서 당시 인천지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또 조직원들이 인민노련에 대한 자긍심도 상대적으로 높아 조직 상·하부 간의 결합력이 강한 편이었다. 그 이유는 무리한 정치조직 결성이나 전위당 건설을 시도하지 않고 스스로 제기하듯 '실사구시'적 태도로 조직 내적 역량과 대중운동과의 결합 정도에 따라 조직운동의 단계를 발전시켰기 때문이었다."(김원, 「인민노련, 그 빛과 그림자」, 노동자역사 한내, <뉴스레터>, 58호, 2013.10.14.)


인민노련은 '인천지역노동자계급해방투쟁동맹'(1986.5.)과 '살인강간고문정권 타도를 위한 인천노동자투쟁위원회'(약칭 타투)(1987.2.5.)를 전신으로 해서 1987년 결성된다.

"1985년 인천, 주안, 부천 세 팀의 서클 대표자들이 만나서 반합법 조직을 같이 만들기로 했다. 최종목표는 비합법정당을 만드는 거였으나, 일단은 '반합법 정치노동자 조직'을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을 하고 인천에서 나름대로 영향력있는 서클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때 기준은 '하나는 반교조주의'였는데 내용적으로는 '반주사' '반CA'였다. 그 중 최봉근, 정태윤, 노회찬이 만나 삼자합의를 하면서 인민노련 조직의 태동이라고 할 수 있는 '인천지역노동자계급해방투쟁동맹'이 만들어졌다. 노동해방투쟁동맹은 '주체사상과 반미직접투쟁론에 대한 이론적 검토를 추진'하여 이를 토대로 '운동가들의 사상 이론적 줄기를 바로잡고, 노동대중과 결합하기 위한 지역의 소모임들을 구축'하는 일에 착수했다. 애초 최봉근, 정태윤이 구심이었고, 이후 노회찬, 권우철, 황광우가 결합하였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지역 민주화운동사 편찬을 위한 기초조사연구–인천>, 2005).


전두환 정권 말기인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터지자 다음날인 1월 15일 곧바로 '살인강간고문정권 타도를 위한 인천노동자투쟁위원회' 결성을 결의하고 2월 5일 결성 선언을 한다. 결성 선언문을 보면 "본 타도투위는 이러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구심 형성에 부분적으로나마 기여하면서 당면의 투쟁 속에서 노동자 계급이 나아갈 길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 위하여 결성되었다"라면서 "대중에 뿌리내린 반군사독재 민주주의연합전선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라고, 범국민적 저항운동을 광범위하게 조직하자고 주장한다.

당시 노회찬은 1986년 5.3인천항쟁을 거치면서 정권의 위기가 다가온다고 판단했다. 그는 1983년 말 이후 형성된 유화국면을 틈타 노동운동의 움직임이 다양하게 드러나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매개로 급격하게 정세가 고양되고 있다고 판단했다(유경순, '노회찬의 구술생애사', <1980년대, 변혁의 시간 전환의 기록>, 봄날의 박씨, 2015, 120쪽).
 

1987년 2월 7일 '장기집권 획책하는 살인강간고문정권 타도하자'라는 '타투'의 유인물. ⓒ 성공회대 민주자료관



1987년 2월 7일 '장기집권 획책하는 살인강간고문정권 타도하자'라는 '타투'의 유인물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 모두의 분노와 힘으로 이 야만적인 폭력 정권을 타도하는 길뿐입니다. 참지 맙시다. 일어섭시다. 그리하여 우리의 타오르는 분노를 행동으로 옮겨 살인 정권 처단의 대로로 나섭시다."

'타투'는 87년 6월민주항쟁 초기 2.7투쟁, 박종철 49제 3.3투쟁 등에 적극적으로 결합하고, 4월로 넘어가면서부터는 인천투쟁 과정에서 인천지역의 여러 소모임, 서클들과 연계해 지역의 정치조직을 준비했다. 그렇게 하여 6월민주항쟁이 한창 불붙고 있던 1987년 6월 26일 부평역에서 범시민평화대행진이 열리고 있는 와중에 인민노련 결성식을 가졌다. 당시 상황에 대해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의 '(기사연 리포트 2) 6월민주화대투쟁'(민중사, 1987, 123쪽)은 이렇게 적고 있다.

"경찰은 낮부터 대회장인 부평역 주위의 차량 통행은 완전히 통제하고, 부평전철역과 버스정류장을 모두 폐쇄 (공단입구-부평시장 부근-백운역 사이 완전 통제). 약 1만여명의 시민·노동자·학생들은 부평역-백마장 사이 부평로에서 도로를 완전 점거하고 대중집회를 갖는 등 시위를 벌였으며, 청천시장 일대에서는 27일 새벽 2시경까지 산발적인 시위가 벌여졌다.

특히 부평로의 대중집회에서는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의 창립보고대회가 개최되었으며, 22:30경 퇴근하던 노동자들이 시위에 합세하여 경찰 저지선을 뚫고 연행자들을 구출해내는 등 노동자들의 적극적 참여가 눈에 띄었다."


"20:17 부평로 시위대 8000여 명으로 증가. 이 지역 3그룹의 시위대 중 가운데 그룹에 서는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창립보고대회 개최. 창립 선언문 낭독 등으로 대회가 7~8분쯤 진행되는 도중 경찰이 페퍼포그, 최루탄 등을 발사, 공격하여 대회는 중단되고, 이후 1시간 이상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격렬한 시위"

인민노련의 출범에 대해 노회찬은 이렇게 말한다.
 

2010년 5월 01일 오후 3시 서울 여의도 문화마당. 민주노총 등 2200여개 사회시민단체로 구성된 ‘120주년 세계노동절 범국민대회 조직위원회’ 주최 ‘120주년 세계노동절 기념 범국민대회’ 연대사 장면 : “87년 전에도 노동자는 8시간 근무하는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전세계에서 최장의 노동시간과 함께 수면시간도 가장 짧은 나라에 속한다. …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이 진보연대를 외쳤다. 반드시 이뤄내겠다” ⓒ 노회찬재단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변혁 지향적 노동운동은 일종의 '장기 매복' 노선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노동자의 의식 수준, 공안 기관의 감시 등을 이유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매우 신중한 활동 노선을 맞이한 듯했으나 대개는 인맥·학맥에 따른 서클주의적 노동 운동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첫째로 가내 수공업 적으로 노동운동을 하던 분산된 서클들을 모아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노동 운동으로 새롭게 개편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둘째로 과학적인 정치 노선과 조직노선으로 노동운동을 통일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고, 셋째로 현장 노동자의 소모임 활동이나 일회적인 경제투쟁을 넘어선 공공연한 정치 선전과 선동 활동이 필요했고, 넷째로 전국적인 노동자 정치 조직을 만들기 위해 노동운동이 가장 활성화된 인천 지역에서 지역정치 조직을 먼저 만들기로 했던 것입니다."(정운영, <정운영이 만난 우리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랜덤하우스중앙, 2004, 78~79쪽)


노회찬은 초기에는 조직 담당자로, 또 이후에는 격주간 발행하는 기관지 <사회주의자> 편집위원으로 인민노련 활동을 주도한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출간한 '지역 민주화운동사 편찬을 위한 기초조사연구–인천'(2005)의 '10.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은 이 과정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인민노련은 89년 봄부터 <정세와 실천>과 <노동자의 길>을 통합하여 <노동자의 길>을 발간하면서 '과학적 사회주의'에 대한 선전을 시작하기로 했다. 또 이 과정을 거처 통일문제는 주대환, 노동조합운동은 노회찬, 사회주의 선전의 문제는 황광우 식으로 분야별 역할분담이 이루어졌다. 다른 한편 치안본부의 수사망이 좁혀오는 것을 감지하면서 '전국조직 건설'을 위한 조직 이원화가 결정되었다. 1989년 여름 주대환, 노회찬, 최봉근, 황광우 등 구 지도부가 인민노련을 나가고 오동렬, 윤철호, 정광필 등으로 신 지도부를 구성했다.

인민노련을 나간 구 지도부는 다른 그룹에서 합류한 유인렬 등과 함께 '전국적 정치신문'을 표방한 <사회주의자>를 1989년 8월 25일 창간했다. 애초에 <사회주의자>라는 제호를 정할 때 '혁명의 불꽃', '선봉' 등의 제호는 진부하다며 친근감있게 '전태일' 같은 제호로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그간 '한국의 민족민주운동에서 어떠한 이유에서건 사회주의자로 추궁당하면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다라는 선언만 있었지, 스스로 자기를 사회주의자라고 주장한 적은 없었다'며 '모든 금기를 무시하는 완전한 자유를 추구하고자 한다'며 <사회주의자>를 제호로 내세웠다. 그러나 인민노련 사건이 터지고 이어 2차 인민노련 사건으로 노회찬 등이 검거되면서 <사회주의자>는 4호로 중단되었다."

 

노회찬이 참여해 만든 '노동자의 길' '정세와 실천' '사회주의자'(왼쪽부터). ⓒ 노회찬재단



1989년 노태우 정권은 공안정국으로 회귀하며 민중운동 세력에 대한 압박에 나섰다. 청와대의 '좌경세력 대책회의'에 이어 공안당국은 '선동 배후세력 즉시 검거'를 선포한다.

인민노련 조직원들은 당시 'A급 비상경계령'을 발동하고 조직 보위에 들어갔다. 누군가 항상 미행하고 있을 거라는 전제하에, 약속 장소에 5분만 늦어도 사는 집까지 즉각 철수 하는 등 보안의 생활화를 했다. 하지만 국가 기관의 수사망을 피할 수는 없었다(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한국의 진보」 3부작 제2부 '인민노련 혁명을 꿈꾸다', 2005.5.1.).

1989년 10월 18일 치안본부는 "지난 87년 6월 사회주의 혁명노선에 따라 서울대와 고려대 운동권 출신 30여 명을 중심으로 한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을 결성해서 기관지인 <노동자의 길>과 <정세와 실천> <사회주의자> 등의 문건을 펴내며 인천·부천 등지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정치 의식화를 벌인 혐의로 중앙상임집행위원장 오동렬, 대외연락담당 노병직, 교육선전부장 윤철호, 조직1국 사상지도책 최남기 등 15명을 국가보안법 위반(이적단체 구성·가입, 이적표현물 제작·반포·소지, 반국가단체 고무 찬양)으로 구속했다"라고 밝혔다. 이어 10월 19일에 2명(최병국, 이현영), 12월 23일에 노회찬과 권우철 등 3명이 잇달아 구속된다.

"그렇소, 우리는 사회주의자요!"

구속자들은 "사회주의자임을 당당하게 인정하고 법정에서 재판부와 검찰을 상대로 사상투쟁을 벌이겠다"라는 방침을 정하고 검거된 관련자 전원에 대한 병합심리를 요구한다. 그리고는 법정에 서서 "그렇소, 우리는 사회주의자요!"라고 선언한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인민노련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기초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폭력혁명으로 전복하려 한 이적단체"로 규정한다. 이에 대해 피고인들은 "1000만 명이 넘는 이들의 이해를 대변할 정치세력이 없는 상황에서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는 당연한 일"이라고 맞선다.

'남한 사회주의자들의 법정선언'이라는 부제를 지닌 <그렇소, 우리는 사회주의자요>(일빛, 1990)는 이들의 최후진술과 항소이유서, 사건 관련 자료를 모아 엮은 책이다. 이 책에는 1980년대 최대 규모의 노동자 (비합법) 정치조직 가운데 하나였던 인민노련의 조직 사상과 전략적 목표 그리고 조직활동 등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수록되어 있다.
 

책 '그렇소, 우린 사회주의자요' 표지(왼쪽). 이 책을 다룬 '한겨레' 기사(1990.9.28.) ⓒ 일빛, 한겨레



윤철호는 법정최후진술에서 "사회주의자라는 것이 본인을 감옥에 쳐넣어야 할 이유가 된단 말입니까, 사회주의자는 인간의 건전한 상식이 선택하는 자랑스런 칭호입니다"라고 밝힌다. 노회찬은 법정투쟁기록('사멸해 가는 역사의 유물에 의해 산 인간이 심판받을 수 없다')을 통해 국가보안법과 사회주의 운동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국가보안법은 아직 법적으로 생존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의 기능이 부분적으로, 불규칙적으로 마비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비밀이 아닙니다. ... 이처럼 사멸해가는 법률에 의해 한 인간의 이상과 고뇌 그리고 수년에 걸친 노력이 심판받을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머지않아 역사의 심판대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그것의 주검이 그것의 범죄 기록과 함께 역사의 박물관으로 향하게 될 운명에 놓여 있는 국가보안법에 의해 지난 십여 년간 민주주의와 평화통일,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싸워온 한 인간의 삶을 신문지 넉 장 반 넓이의 독방에 하루 23시간 이상씩 가둬둘 수는 없습니다. 생명을 잃어가는 역사의 유물에 의해 산 인간이 심판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이진경·김진국·김학원·노회찬 외, <선진노동자의 이름으로>, 소나무, 1991, 239쪽)

"재판장님! 지금으로부터 수백만 년 전 네 발로 생활하던 인류의 조상이 두 발로 걷는 데는 수만 년이 걸렸을 것입니다. 숱한 고통과 좌절이 뒤따랐을 것이며 때로는 목숨까지 요구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두 팔이 걷는 일로부터 해방되는 순간 인류의 문명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날, 성장하는 노동운동 속에서 새롭게 발현하는 사회주의 운동은 수백만 년 전의 인간의 노력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것은 모순된 현실이 배태한 자연스런 요구이며 현실을 극복코자 하는 의지의 산물입니다. 그리고 더 나은 문명을 창조할 확신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계속 네 발로 기어다닐 것을 강요하는 어떠한 시도도 막을 수 없는 역사 발전의 필연인 것입니다."(위의 책, 245-246쪽)


인민노련에 대한 사법부 판결을 앞두고 '혁신세력인가 이적단체인가' 논란이 가열된다. 공판과정에서 핵심 쟁점으로 부각된 것은 이적성 여부였다. 즉 노동자들의 정치세력화, 나아가 노동자정당 건설을 목적으로 결성된 조직을, 반국가단체인 북한을 이롭게 하는 행위를 목적으로 한 단체로 볼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인민노련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기초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폭력혁명으로 전복,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만큼 국가보안법 7조3항에 규정된 이적단체에 해당한다고 밝힌다.

반면 피고인들은 법정에서 "해방 이후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급격한 자본주의의 발전은 오히려 노동자들에게 빈곤만 안겨주었고 이는 필연적으로 노동자들의 계급적 각성을 촉진시켰다"라면서 "1000만 명이 넘는 이들의 이해를 대변할 정치세력이 없는 상황에서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는 당연한 일이므로 이를 목적으로 활동했다는 이유만으로 이적단체로 모는 것은 노동운동에 대한 정치적 탄압"이라고 맞섰다(한겨레 1990.3.30.).
 

인민노련 이슈를 다룬 1990년 3월 30일 치 '한겨레'. ⓒ 한겨레 갈무리



노회찬에 대한 대법원 판결에서 보여지듯이 인민노련은 결국 이적단체로 규정된다(대법원 1991. 2. 8. 선고 90도2607-노회찬의 상고사건에 대한 판결, '법원공보' 제893호, 1991.4.1.).

"살피건대, 위와 같은 현실인식, 통일이념, 목적, 사업 및 조직의 인노련 활동은 대한민국의 존립과 안전을 위태롭게 하거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줄뿐만 아니라 폭력 비폭력, 합법 비합법 등 각종 투쟁형태를 적절히 배합한 반제, 반파쇼, 민주화투쟁을 전개하여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완수하여 남한 단독으로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한 다음 북한과 통일을 이룬다는 북한의 선전선동활동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어서 반국가단체인 북한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노련은 국가보안법 제7조 제3항 소정의 이적단체에 해당한다."

* 참고로 활동 초기에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은 '인노련'이라는 약칭으로 불렸는데, 양승조 등이 이끌던 과거의 '인노련'과 혼동을 주는 바람에 점차 '인민노련'으로 불리게 된다.

대법 판결이 있고 십수 년이 흐른 2004년부터 2005년 사이에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인민노련 사건 관련자들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 명예회복 판정을 내린다. 노회찬은 복권됐지만 민주화운동 유공자나 보상 신청은 하지 않았다. "내가 원해서 한 일이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이 길을 택하지 않았다면 깨닫지 못했을 것을 깨달으면서 오히려 내가 구원받았다"라며 자신은 희생한 것이 아니라 혜택받은 것이라고 겸손해했다(노회찬·구영식,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10쪽).

인민노련과 사회주의의 관계

한 조직의 성격을 파악하려면 기본적으로 강령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강령이란 조직의 이념과 정체성, 지향하는 바 등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26일 결성 이후 인민노련의 강령은 1988년 10월과 1989년 2월 20일 두 차례에 걸쳐 개정된다. 1989년 2월 20일의 개정은 부분적인 수정과 보완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개정은 한 차례였다고 볼 수 있다(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엮음, '87·88년 정치위기와 노동운동: 인노련 선집', 거름, 1989).

결성됐을 당시 인민노련은 타투와 NL이 동거하는 조직이었다. 이때 처음으로 조직노선 논쟁이 벌어졌다. NL의 '정치적 대중조직(PMO)' 노선과 타투의 '정치조직(PO)' 노선인데, 정치적 대중조직은 일종의 정치활동을 하는 단체를 지향하는 것이다. 정치조직은 '정당조직(당시는 비합법 전위정당의 의미가 컸다)'을 지향하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비판적 지지노선'과 '독자노선' 사이의 논쟁이었다(인민노련, '인노련 활동평가 보고서', <정세와 실천> 2호, 1987.10.18.).

이 두 가지 주장은 2박 3일 동안의 10월 대의원대회를 통해 '독자노선'으로 정리되었다. 정태윤, 최봉근, 황광우, 이희경, 홍승기, 김상준, 이호곤, 신정길, 고남석 등이 참석한 이날 회의에서 표결 결과 독자노선: 비판적 지지: 기타가 12:4:1로 결정됐다. 결과가 나오자 NL은 퇴장·탈퇴하였고, 인민노련은 새로운 강령을 다시 채택했다.

인민노련은 1988년 10월 수정된 강령에서 조직의 목적과 활동목표를 이렇게 설정하고 있다.

"인노련은 당면한 민족해방과 민중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 있어 인천·부천 지역의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구심이 되며,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을 발전시키고 여러 형태의 대중조직을 촉진시키며, 노동자들의 모든 투쟁을 발전시켜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는 정치부대화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또한 노동자들의 전국적인 정치적 통일과 노동자 정당의 건설을 위해 모든 힘을 다할 것이다. 한편으로, 인노련은 파쇼 정권에 반대하여 싸우는 모든 계급·계층 및 정치세력과 적극 연대할 것이며, 특히 전민중의 정치적 통일조직을 형성해 나아가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엮음, <87.88년 정치위기와 노동운동: 인노련 선집>, 거름, 1989, 37쪽)


인민노련과 사회주의의 관계에 대해 노회찬은 이렇게 회고한다(노회찬·구영식,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65~66쪽).

구영식 : "어떤 사람은 인민노련을 두고 '최초의 남한 자생적 사회주의자 조직'이라고 평가한다."
노회찬 : "최초는 아닐 거다. 이전에도 '과학적 사회주의자 동맹'처럼 크고 작은 사회주의 그룹들이 있었으니까. 다만 우리는 공공연하게 활동했고, 법정에서도 '우린 사회주의다.'라고 선언했다."
구영식 : "인민노련은 '사회주의'를 지향했던 것인가?"
노회찬 : "조직의 강령을 보면 사회주의혁명의 전 단계인 인민민주주의혁명, 반제국주의·반파쇼를 지향했다. 사회주의는 그 후의 문제였다. 물론 가치에서는 사회주의적 신념이 조직의 지배적인 분위기였다."

구영식 : "한국사회에서 사회주의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나?"
노회찬 : "인민노련은 처음부터 NL그룹과 같이했고, 그러다 보니 인민민주주의, 민중민주주의를 지향할 수밖에 없었다. 인민노련이 사회주의를 조직의 전면에 내걸지는 않았다. 물론 본격적으로 사회주의를 공공연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 우리는 대중성을 중시했다. 사회주의나 사회과학적인 인식을 분명히 갖고 있으면서도 현실을 구체적으로 다루었다. 이렇게 급진적인 단체 중에서 노동조합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룬 곳은 우리가 처음이었다. 인민노련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통해 노동운동 내부의 신뢰를 확보했고, 그것에 기초해 조직을 확대해나갈 수 있었다."

후일 노회찬은 '사회주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기도 한다.    

고 노회찬 의원. ⓒ 노회찬재단



"사회주의의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다. 영국 노동당도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북한의 사회주의, 구(舊) 소련의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게 아니다." (<헤럴드경제>, 2017.9.2.)

"현존했던 사회주의는 실패했어요. 인정합니다. 인류 역사 5000년에서 보면 자본주의 시대는 200년밖에 안 돼요. 우리가 살아왔던 체제가 자본주의였다고 해서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자본주의의 한계를 알면서도 숙명론적으로 받아들이기를 반대하는 거죠.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문제점은 인정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일도 쉽지 않다는 것도 알지만... 계속 시도해야 사회가 좋아지는 것 아닐까요?" (임지은, '[인물탐험]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노회찬-노동자들의 슈바이처, 그 사랑의 줏대', <월간중앙>, 2004년 10월호)


임지은 기자는 "'위험한 사회주의자'와 '유연한 진보주의자'라는 평가의 갈림길에 선 그가 꿈꾸는 곳"이라면서 2004년 9월 어느날에 있었던 노회찬과의 인터뷰를 이런 글귀로 마무리한다. 

"지금 읽는 책은 <광릉 숲에서 보내는 편지>. 봄이면 산에 쌓인 눈 녹이며 거장 먼저 피는 '앉은부채', 씨앗만으로는 부족해 가을날 시들어가며 잎 끝에 새끼를 낳는 '처녀치마', 꽃가루받이 곤충 위해 나선모양으로 꽃 피우는 '타레난초' 등을 담은 사진이 '너무' 좋단다. 자신을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하는 사람'이라며 시간 나면 가려고 좋은 곳 많이 알아두었다고 자랑이다.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은지 해맑은 미소가 번진다. 세상에 사랑할 것이 '너무너무' 많다면서 사랑을 아끼지 말자고 한다. 꽃·나무·풀·새·이웃·국가... 나를 둘러싼 모든 것과 사랑을 나누는 세상."
 

광릉숲 풍경. ⓒ 문화체육관광부

"2004년 들어서 가장 좋은 하루를 보냈다", 그 순간
2004년 8월 31일 <노회찬의 난중일기>의 '하루 종일 광릉 숲에서 지내다'는 이렇게 적고 있다.

"앞으로 150년은 더 살 수 있었던 전나무 열 한그루는 인간이 내뿜은 자동차 매연으로 인해 자기 수명의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생애를 마감하였다. (...) 이유미 박사가 토종 물봉선화를 가리키며 이름을 외우라고 한다. 흔히 손톱 물들이는 데 쓰는 '울 밑에 선 봉선화'는 겨우 백 년 전에 들어 온 외래종이라고 말해 준다.

나물의 제왕 곰취가 놀랍게도 아름다운 노란 꽃을 피우고 있는 모습도 가리켜 준다. 산초나무를 가리키며 추어탕 먹을 때 넣는 산초는 산초나무의 열매가 아니라 초피나무 열매란다. 우리나라 특산종인 금강초롱의 학명이 일본인 이름으로 된 사실을 들며 식물이름도 '국력'이 반영된다고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이름을 아는 식물은 더 아끼고 관심을 갖는다고 한다. 그래서 식물 이름을 알게 하는 것이 곧 자연보호의 지름길일 수 있다는 이유미 박사의 지론이다. 영어단어 2000개를 아는 것보다 나무, 풀 이름 200개를 알고 있는 것이 훨씬 값진 것이라고 맞장구쳤다. (...) 아쉬움을 묻어두고 식물의 세계를 떠나 동물의 세계로 돌아왔다.

숲은 미래다. 숲은 관념이 아니라 과학이다. 숲이 병들면 미래가 병드는 것이다. 숲에서 지낸 7시간. 2004년 들어서서 가장 좋은 하루를 보냈다."


기록연재 | 조현연 노회찬재단 특임이사

[기록으로 만나는 노회찬의 꿈과 길 ③] '정치를 만나다'(6월 16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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