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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간 집에서 초등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친 적이 있다. 어느 날, 하교하고 막 테이블에 둘러앉은 5학년 여자아이들 네 명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한 명은 분에 씩씩거리고 다른 녀석은 눈물 자국도 보인다. 나머지 한 녀석은 나에게 자초지종을 전달하기 바쁘고, 또 한 녀석은 위로인지 눈물 자국이 난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아이들이 이렇게 감정의 앙금을 한껏 쌓아 온 날엔 영어고 뭐고 가르치기가 어렵다. 선생이 필요한 때가 아니라, 아이들의 속상한 이야기를 들어주고, 편들어주고 위로해줄 성숙한 인간이 필요한 때이기 때문이다. 이런 때 아이들에게 "너희들 문제니까 너희들이 알아서 하고, 책 펴라. 수업 시작하자. 숙제는 다 했니?" 같은 말은 차마 던질 수가 없다. 

귀를 열고 아이들 마음을 정돈해주다 보면 수업 시간의 반이 훌쩍 갈 때도 있다. 부랴부랴 이제 공부 좀 해볼라치면, 어느새 마음의 구김이 펴진 아이들이 어떻게 해서든 공부 시간을 줄여보려고 다른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꺼내 놓거나 갖은 잔꾀를 부리며 수업 시간 '밀당'을 시도한다. 이럴 때, 아이들 마음을 받아주는 어른 역할로부터 단호하게 가르치는 역할로의 전환 타이밍을 제대로 잡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존중'을 실천하는 덴마크 교사들의 이야기
 
책 <삶을 위한 수업> 앞표지
 책 <삶을 위한 수업> 앞표지
ⓒ 오마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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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의 신작 <삶을 위한 수업>에는 학생들에게 주는 자유와 교사의 권위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잘 유지하는 훌륭한 덴마크 교사들 10명의 예가 나온다.

그들은 상호 배려와 협력의 교실 분위기에서 상위 10% 학생뿐 아니라 나머지 90%의 학생들도 다양한 자신감의 경험을 쌓고 성취감을 느끼도록 최선을 다한다. 그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수업 철학 중 공통적인 것 하나는, 바로 가르치기 전에 학생들과 친밀감과 신뢰감을 얻는 관계를 맺으라는 것이다. 

친밀감과 신뢰감은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다.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도록 선택권을 주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관심과 대화로 학생들을 존중할 때, 학생들도 자연스럽게 가르치는 자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진정한 배움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말로 정리하기는 쉽다. 실천이 어려울 뿐.

소개된 덴마크 선생님들은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 어려운 걸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아이들이 제출한 숙제를 언제까지 채점해서 돌려주겠다고 약속하며 교사와 학생 간의 장벽을 허물고자 노력하는 수학 선생님, 수업 시간이 두려운 학생에게 수업 전에 미리 질문할 내용을 알려주고 답변을 준비하게 해서 자신감을 쌓아가도록 도와주는 영어 선생님, 교실에서 단 한 명의 학생이라도 주눅 들지 않도록 늘 따뜻한 관심과 대화로 부모 역할까지 맡아 하는 선생님들이 존경스럽다. 

선생님들의 수업 방법도 흥미롭기 그지없다. 설명으로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고안한 보드게임은 나부터라도 당장 해보고 싶을 정도다. 정당을 나눠 각 정당의 정책토론 경쟁을 통해 시장을 배출하도록 고안된 게임이라니. 놀라운 아이디어다. 

고등학교 진학 전 1년 동안 춤, 여행, 스포츠, 게임 등 관심 있는 어떤 분야든 마음껏 탐색해 보는 인생설계학교 '에프터스콜레'도 부럽기 그지없다. 우리나라에도 다행히 로드스콜라 같은 여행 대안학교가 있고, 오연호 대표가 설립한 꿈틀리 인생학교도 있다. 이런 학교들이 다양하게 더 많아지고, 더 많은 청소년들이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시험에 대한 걱정 없이 오롯이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관심 가는 분야를 탐색하며 도전할 수 있는 시간들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학교 밖 실제 사회의 삶을 보여주는 각 분야의 전문가를 학교와 연결해준다는 덴마크 비영리단체 '학교 밖의 학교'도 정말 좋은 기관이다. 우리나라도 중학교 1학년 때 실시하는 자유학기제 프로그램 중 학생들이 관심 있는 진로 분야의 전문가들을 만나는 일정이 있다. 그때마다 늘 섭외하는 게 어려운 일인데, 그 연결을 도와주는 단체가 있다면 얼마나 편리하겠는가 말이다. 당장 도입해도 좋을 것 같은 아이디어들이 책의 이곳저곳에 넘쳐난다. 

<삶을 위한 고민>이 던지는 질문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가 집필한 덴마크 관련 책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가 집필한 덴마크 관련 책
ⓒ 오마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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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저널리스트 마르쿠스 베른센과 오연호 대표가 공동으로 기획한 이 책은 베른센 기자가 영어로 쓰고, 오연호 대표가 우리말로 옮겼다. 교육을 넘어 더 좋은 세상에서 더불어 행복하게 살고자 고민하는 오연호 대표가 덴마크와 관련해 쓴 세 번째 책이다. 

2014년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에서 행복지수가 가장 높다는 덴마크를 보며 행복의 비결은 무엇인지, 우리도 행복해지기 위해 어떤 노력들이 필요한지를 보여주었다. 2018년 <우리도 사랑할 수 있을까>에서는 나만 잘살자고 나쁜 경쟁으로 몰아대는 잘못된 교육철학을 반성하고, 스스로 더불어 행복하게 살고자 각자의 자리에서 꿈틀거리는 분들을 만나며 변화를 위한 어떤 실천들이 모색되고 있는지를 이야기했다.

이어서 신작 <삶을 위한 수업>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닮고 싶은 덴마크 교육의 수업 방법과 수업 철학을 소개하며, 실제 학교 현장에서 긍정적 변화를 위해 늘 고군분투하는 우리나라의 선생님들과 이에 공감하는 어른들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그런데, 입시 수업이 아닌 '삶을 위한 수업'에 대한 고민을 선생님에게만 부여하는 것은 사실 여러모로 무리다. 학교에서야 물론 선생님을 보고 배우겠지만, 정작 아이들의 전 생애에 걸쳐 영향을 끼치는 핵심적 존재는 바로 부모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신의 자리에서 스스로 더불어 즐겁게 살고자 의지를 가지고 실천할 때 아이들도 비로소 안심하고 원하는 일에 도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삶을 위한 수업>이 전하는 메시지는 '어른으로서의 나는 과연 스스로 더불어 즐겁게 잘살고 있는가?'에 대한 자문으로 이어지며 범상치 않은 새로운 고민을 가져다 준다. 

삶을 위한 수업 - 행복한 나라 덴마크의 교사들은 어떻게 가르치는가

마르쿠스 베른센 (지은이), 오연호 (편역), 오마이북(2020)


태그:#교육, #덴마크 ,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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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궁금한 게 많아 책에서, 사람들에게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즐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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