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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7월 당시 야당을 이끌던 김영삼과 김대중 씨가 서울 서린호텔에서 조찬회동을 하는 모습.
 1986년 7월 당시 야당을 이끌던 김영삼과 김대중 씨가 서울 서린호텔에서 조찬회동을 하는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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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작품의 배경, 거제도

지난 4월 25일 밤 10시 30분, 긴 여로 끝에 마침내 거제도 고현시외버스정류장에 닿았다. 코로나19 사태가 현재 진행형인데도 고현항은 대낮처럼 밝았다. 다른 곳과는 달리 사람들로 붐볐다.

나에게 거제도 '고현'이라는 지명은 매우 친숙하다. 장편소설 <약속>을 집필할 때 주인공 김준기라는 인물이 이곳 포로수용소에서 3년 가까이 지냈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은 작품의 주요 배경으로, 이 일대 지리와 풍물을 샅샅이 조사하고 공부했다. 그 대목을 한창 집필 중이던 2015년 여름에는 이곳에 와서 옛 포로수용소 일대를 일일이 답사했다.
 
6.25 전쟁 당시 거제포로수용소
 6.25 전쟁 당시 거제포로수용소
ⓒ NARA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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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포로수용소 일대는 초저녁부터 먹물을 뿌린 듯 컴컴했다. 그날은 유엔군 측이 부산포로수용소 포로들을 새로 지은 거제포로수용소로 이송을 막 끝낸 1951년 7월 초로, 음력 5월 그믐께였다. 포로수용소 철조망 위 감시초소 서치라이트는 밤이 깊어지자 더욱 가쁘게 좌우상하로 어둠을 갈랐다.

밤 10시 무렵 짙은 해무(海霧)가 갑자기 남해안 일대를 덮었다. 그러자 포로수용소 일대는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짙은 어둠과 묵직한 안개로 섬 전체가 마치 바다 깊숙이 가라앉은 듯했다. …

1950년 11월부터 유엔군은 거제도 고현, 수월지구 등지에 거제포로수용소를 짓기 시작했다. 거제포로수용소는 대부분 포로들이 지었다. 먼저 거제도에 도착한 포로들은 수용소 울타리 철조망 설치작업부터 했다. 그런 다음 불도저로 포로수용소 부지 정지작업을 한 뒤 감시 망루를 설치했다. 포로들은 그 부지에다가 일정한 간격으로 천막을 쳤다. 잠깐 새 거제도는 온통 천막으로 뒤덮인 섬이 되었다." - 박도 지음 <약속> 중에서


그 척박한 섬, 거제도 고현 일대가 5년 전 답사를 왔을 때는 평당 1000만 원을 호가한다는 금싸라기 땅이 됐다고 택시기사가 자랑했다. 그 뒤 조선업 불황으로 거제도에는 빈 아파트가 속출한다는 보도를 봤다. 그러더니 이번 김영삼 생가 답사로 고현 항에 도착했을 때는 조선 경기가 되살아났는지 터미널 일대는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우려와 반가움이 교차했다.
  
담 밖에서 바라본 생가 안채, 마당 한구석에는 김영삼 흉상이 세워져 있다.
 담 밖에서 바라본 생가 안채, 마당 한구석에는 김영삼 흉상이 세워져 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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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을 만나다

애초에는 거제 바닷가 한적한 곳에 숙소를 정한 뒤 파도소리를 자장가 삼아 1박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날 밤 고현항 분위기는 그게 아니었다. 그래서 늦은 시각이지만 김영삼 생가 마을까지 가고자 차편을 알아봤다. 하지만 현지인은 그 마을에는 마땅한 숙소가 없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별 수 없이 터미널 부근의 한 숙소로 갔다.

나는 그날 아침 원주 집을 출발하여 영천 → 대구 팔공산 노태우 생가 → 합천 전두환 생가를 답사한 뒤, 진주를 거쳐 거제도 고현까지 왔다. 그랬으면 됐지 게다가 뭔 욕심을 더 부리나. 교통수단이 좋고, 길을 잘 닦아놓은 덕분에 그날 하루에 강원도 원주에서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이전 같으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꿈같은 얘기다.

몸을 닦고 침대에 누웠으나 쉬 잠이 오지 않았다. 문득 김영삼과의 인연이 떠올랐다. 내가 그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최연소 국회의원이 된 1950년대였다. 그때 '인물계'라는 한 월간지 표지에 김영삼 의원 사진이 있었다. 아버지는 그분 장래의 꿈이 대통령이라는 얘기도 들려줬다. 그때 김영삼 의원은 25, 26세인데도 동안(童顔)으로 보였다.  

그 뒤 많은 세월이 흘렀다. 1980년 대 어느날 나의 넷째 고모님이 시어머니상을 당하자 곧장 내게 연락이 왔다. 바로 달려가자 2층 거실에다가 빈소를 차리면서 나에게 문상객 접대를 부탁했다. 빈소 옆에 책상에 갖다두고 조문록을 마련한 뒤 막 자리에 앉는데 첫 문상객이 도착했다.

"나 영새밉니다."

작달막한 체구에 생긋 웃으며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각종 매스컴에서 자주 봤던 탓이라 초면이지만 낯설지 않았다. 막상 김영삼 의원을 곁에서 보니까 체구가 몹시 작고 몹시 왜소해 보였다.

아마도 그 무렵은 오랜 단식 뒤라 더욱 그랬나 보다. 그분은 조문록에 서명을 한 뒤 고인의 빈소에서 기도를 드리고 상주를 위로한 뒤 빈소를 떠났다. 그 무렵 나의 고모부(남방희)는 거제도 출신으로 당시 거제향우회장을 맡고 있었다.
 
김영삼 생가 대문
 김영삼 생가 대문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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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산 김영삼

그때 나의 첫 인상은 자그마한 체구에 생글생글 웃는 부드러운 동안이었다. 그런 그가 어찌 그리 강단이 센 정치인이었던지 두고두고 그분 이미지가 인상 깊게 남아 있었다.

김영삼 – 한국현대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그의 호 거산(巨山)처럼 거대한 산이었다. 김대중과 함께.

이튿날(4월 26일) 아침, 행장을 꾸리고 숙소를 나온 뒤 가까운 밥집에서 아침밥을 야무지게 먹었다. 답사자는 여행 중 잘 자고, 잘 먹어야 한다. 곧장 고현버스터미널로 갔다. 김영삼 생가마을 도로명 주소는 경남거제시 장목면 옥포대첩로 7번지이다. 고현에서 거기로 가는 시내버스는 1시간 정도 간격으로 장목행 버스가 있다고 한다. 나는 오전 8시 2분에 출발하는 장목행 버스를 탔다.

일요일 아침 탓인지 텅 비다시피 한 버스는 바다와 산 그리고 구불구불 계곡과 산길을 마구 헤집고 달렸다. 거제도는 참 아름다운 섬이었다. '가고파'의 고향인 잔잔한 남해 바다와 야트막한 산, 그리고 바다에서 조업하는 배들과 바닷가 언덕 위의 집들이 한 폭의 그림이었다.

마침 버스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지그시 취한 채 사주를 두리번거렸다. 40분 쯤 달리자 버스 앞 차창 밖으로 '대통령의 마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는 환영아치가 보였다. 버스기사는 곧 대계마을 표지석 앞 주차장에 버스를 세웠다.
 
거제도 김영삼 생가마을인 대계마을 표지석
 거제도 김영삼 생가마을인 대계마을 표지석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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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생가마을 안내판
 김영삼 생가마을 안내판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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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생가

김영삼 생가는 주차장에서 50미터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그런데 나를 반기는 것은 '김영삼대통령기록전시관 임시휴관 안내' 펼침막이었다. 미리 알아 보지 않고 온 게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어디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 이뤄지는가. 이즈음은 코로나19 때문에 어디를 가나 문이 닫혀 있었다. 

도로에서 김영삼 생가를 바라보자 대문은 닫혀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생가 돌담은 야트막했다. 담 밖에서 카메라 앵글을 맞추기는 크게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나는 돌계단을 오른 뒤 담너머로 생가 안채 여기저기에 카메라 셔터를 부지런히 눌렀다.

'박 작가! 미안하요. 집안으로 모시지 몬(못)하고, 우째 이런 역병이...'

김영삼 대통령의 다정한 사투리 음성이 들려오는 듯했다.
 
김영삼 생가 앞 멸치 가게들
 김영삼 생가 앞 멸치 가게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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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생가 거제도 대계마을 앞바다.
 김영삼 생가 거제도 대계마을 앞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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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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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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