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6-2017 시즌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하고도 챔피언 결정전에서 IBK기업은행 알토스에게 패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는 2017년 FA시장에서 국가대표 리베로 김해란을 영입했다. 그리고 기업은행으로 이적한 김수지에 대한 보상선수로 남지연 리베로를 지명했다. V리그 초창기부터 최고 리베로 자리를 두고 다투던 라이벌이 한 팀에서 뭉치면서 본의 아니게 피해를 본 선수는 흥국생명의 기존 주전 리베로였던 한지현(기업은행)이었다.

반면에 2017년 남지연 리베로를 흥국생명에 내준 기업은행은 졸지에 리베로 자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기업은행은 2018년 흥국생명에서 자리를 잃은 한지현 리베로를 영입했지만 적응에 애를 먹고 팀을 이탈하는 어려움을 겪었고 2019-2020 시즌 리베로로 변신했던 백목화의 적응력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결국 6시즌 연속 챔프전에 진출했던 기업은행은 이후 두 시즌 연속으로 봄 배구 무대조차 밟지 못했다.

이처럼 배구에서는 세터나 리베로 같은 특수 포지션에서 여러 선수가 겹치거나 마땅한 주전 선수가 없을 경우엔 팀 전력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치곤 한다. 2019-2020 시즌이 끝난 후에도 세터들의 FA이적과 베테랑 세터의 은퇴 등으로 여러 구단에서 세터 자리에 큰 구멍이 뚫렸다. 하지만  부상 등으로 인한 추가 이탈이 발생하지 않는 한 차기 시즌 세터 부재로 고전하는 팀은 나오지 않을 전망이다.

주전 공백 속 '강제 세대교체'로 성장한 조송화와 이다영
 
 조송화는 박미희 감독 부임 후 주전 세터로 활약하며 올해 2억7000만원 규모의 대형 FA 계약까지 따냈다.

조송화는 박미희 감독 부임 후 주전 세터로 활약하며 올해 2억7000만원 규모의 대형 FA 계약까지 따냈다. ⓒ 한국배구연맹

 
리그가 지속되다 보면 기존의 주전 선수가 갑작스럽게 은퇴를 하거나 팀을 떠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주전 선수의 이탈에 미리 대비한 팀은 전력 약화를 최소화할 수 있지만 대비가 느렸던 팀은 주전 선수가 떠난 후 갑작스런 '강제 세대교체'를 해야 할 때가 있다. 2012-2013 시즌이 끝나고 아제르바이잔 리그로 진출한 김사니(기업은행 코치)의 빈자리를 메우지 못했던 흥국생명이 대표적이다.

흥국생명은 김사니가 팀을 떠난 2013-2014 시즌 백업 세터였던 우주리와 프로 3년 차의 신예 조송화 세터(기업은행)를 번갈아 투입하며 시즌을 치렀다. 하지만 주전 경험이 전무했던 두 선수는 이내 경험부족을 드러냈고 2013-2014 시즌 흥국생명은 V리그 원년 이후 9년 만에 최하위로 추락했다. 2013-2014 시즌이 끝난 후 류화석 감독이 물러난 흥국생명은 박미희 감독을 9대 사령탑으로 선임했다.

박미희 감독은 신예 조송화를 주전 세터로 낙점하며 꾸준히 기회를 줬다(사실 조송화 외에는 딱히 대안이 없기도 했다). 물론 토스워크에 기복이 있어 팬들의 질타를 받은 경우도 적지 않았지만 시즌을 거듭하면서 착실히 성장한 조송화는 2018-2019 시즌 흥국생명을 통합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지난 4월에는 기업은행과 총액 2억7000만원에 FA계약을 체결하면서 일약 고액 연봉선수 대열에 합류했다.

지금은 국가대표 주전세터로 성장한 이다영(흥국생명)도 신인 시절부터 장차 한국배구를 이끌어 갈 유망주라는 평가를 받으면서도 주전세터 염혜선(KGC인삼공사)의 존재와 잦은 부상 때문에 많은 기회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2017년 FA시장에서 염혜선이 기업은행으로 이적하면서 이다영에게 기회가 왔고 이다영은 이도희 감독의 특훈을 받으며 현대건설 힐스테이트의 풀타임 주전 세터가 됐다.

이다영의 성장 과정을 보면 체격조건이 좋은 세터 유망주에게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금방 알 수 있다. 이다영은 주전으로 도약한 후 세 시즌 동안 현대건설이 치른 87경기 중 무려 84경기에 출전했다. 물론 힘들 때도 있고 경기가 잘 풀리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이다영은 벤치로 물러나지 않고 코트 위에서 스스로 위기를 극복해 나가며 세터로서 한 뼘 성장할 수 있었다. 

주전세터 잃은 현대건설-도로공사, 내부육성 대신 트레이드 선택
 
 '이효희 후계자'로 성장하던 이원정 세터는 이효희 은퇴 후 트레이드 카드로 활용됐다.

'이효희 후계자'로 성장하던 이원정 세터는 이효희 은퇴 후 트레이드 카드로 활용됐다. ⓒ 한국배구연맹

 
이다영과 조송화의 FA이적, 그리고 '레전드' 이효희의 은퇴로 현대건설과 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는 심각한 세터고민에 빠졌다. 특히 당장 이다영을 잃은 현대건설의 경우 팀 내에서 정규리그 출전 경험이 있는 세터가 김다인 밖에 남지 않았다. 김다인은 신장 171cm로 이다영에 비하면 체격조건이 썩 좋은 편은 아니지만 작년 컵대회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을 만큼 배포가 강하고 성장속도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현대건설은 1998년생의 프로 4년 차 유망주 세터를 밀어주는 대신 조금이라도 검증된 세터를 영입하는 쪽을 선택했다. 지난 6일 기업은행과의 2:2 트레이드를 통해 조송화의 입단으로 입지가 좁아진 이나연 세터를 영입한 것이다. V리그 정규시즌을 기준으로 통산 6경기에 출전한 김다인과 185경기 출전의 이나연은 경험 면에서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다음 시즌 현대건설의 주전세터는 이나연이 될 확률이 매우 높다.

이효희가 은퇴한 도로공사는 2018-2019 시즌부터 이효희의 후계자로 낙점 받으며 꾸준히 경험을 쌓은 2000년생 유망주 이원정 세터가 자연스럽게 주전 자리를 물려 받을 것으로 전망됐다. 여기에 182cm의 좋은 신장을 가진 안예림 세터가 순조롭게 성장한다면 도로공사는 장기적으로 세터진에서 이상적인 '빅&스몰 조합'을 기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계약 마지막 해를 맞은 김종민 감독에게 여유는 없었다.

결국 도로공사는 지난 21일 GS칼텍스 KIXX와의 2:2 트레이드를 통해 GS칼텍스의 주전세터 이고은을 영입했다. 게다가 도로공사는 이 트레이드를 통해 '이효희의 후계자'였던 이원정 세터까지 GS칼텍스로 보내고 말았다. 물론 이고은 세터가 도로공사를 다음 시즌 좋은 성적으로 이끌지 말란 법은 없지만 도로공사는 당장 눈 앞에 닥친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미래의 주역이 될지 모르는 세터를 포기한 셈이다.

5월에만 세터 공백을 메우기 위한 두 건의 트레이드가 성사되면서 여자부 6개 구단은 GS칼텍스의 두 주전급 세터만 팀이 나눠졌을 뿐 각 구단의 주전 세터가 서로 바뀌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지난 시즌의 주전 세터는 다음 시즌에도 주전, 지난 시즌의 백업 세터는 다음 시즌에도 백업으로 남는다는 뜻이다. 경험이 부족한 젊은 세터들이 경험을 쌓을 기회는 다음 시즌에도 쉽지 않을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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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배구 세터 이나연 이고은 조송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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