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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는 세월호 생존자 24명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월호의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안고 매일같이 안정제와 수면제로 잠을 청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전히 배를 타고, 화물차를 끌며 제주와 육지를 오가는 이들은 오늘도 세월호의 악몽을 꾸며 살아갑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6년, 아직도 그날의 참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실어보려 합니다. [기자말]
 아내와 함께 운영하는 제주시 조천읍 공방에서 인터뷰 중인 김병규씨
 아내와 함께 운영하는 제주시 조천읍 공방에서 인터뷰 중인 김병규씨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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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규(59)씨는 세월호에서 살아남아 제주에 거주하는 몇 안 되는 일반인 생존자 가운데 한 명이다. 일반인 생존자도 화물 기사 생존자들과 다르지 않은 후유증을 안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고통은 화물 기사들이 안고 있는 고통과는 또 다르다. 인터뷰는 김씨가 아내와 함께 운영하는 제주시 조천읍의 '둘이서 공방'에서 진행했다.

- 제주 출생이 아니라고 들었어요.
"저는 육지 출신이에요. 제주에 오기 전에는 경기도 인천에 살았어요. 인천 자동차부품 관련 회사에서 직장생활을 오래 하다가 퇴사하고 개인 사업을 4년 정도 했어요. 나이가 드니 마음이라도 조금 편하게 살아보자 해서 그날, 4월 16일에 제주에 내려온 거죠."

- 왜 제주도를 선택하셨어요?
"살기 좋으니까요. 제가 강원도도 가보고 충청도도 가보고 했는데 제주도가 느낌이 좋아서 아내와 같이 제주에 정착해 노후를 보내볼까 했던 거죠."

- 그럼 당일에는 아내와 두 분이서만 배를 타셨나요?
"제주로 내려오기 전에 가족회의를 했어요. 가족회의 결과, 딸들은 인천에 남고 저와 아내 그리고 '두부'라고 불리던 애완견 이렇게 셋만 내려가기로 결정했어요. 그래서 '두부'와 함께 세월호를 탔는데 결국 '두부'는 배에서 나오지 못하고, 저와 아내만 살아 나왔어요.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딸들도 탔으면 우리도 인명피해가 있었을 거예요."

- 세월호에는 어떻게 타신 건가요?
"인천에서 이삿짐을 싣고 오는 배가 세월호밖에 없었어요. 물론 계약할 때는 세월호라는 선명은 몰랐고 화물 싣는 회사와 계약을 했는데 그 회사가 세월호에 타라고 해서 탄 거죠."

- 그럼 이삿짐도 세월호에 같이 실렸겠네요.
"그게 참, 저 같은 경우에 뭐라 표현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계약할 당시에 이삿짐은 인천에서 세월호에 싣는지 다른 배에 싣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냥 이삿짐 회사와 계약을 하면 배송은 알아서 맡기는 거더라고요. 저와 아내는 우리가 탔던 배에 이삿짐이 같이 실려 움직이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나중에 사고가 터지고 보니까 이삿짐은 인천에서 차량으로 목포인가 완도까지 이동해 거기서 배를 타고 제주로 넘어오는 거더라고요. 짐 따로 사람 따로 온 거죠. 그래서 이삿짐은 15일이 아니라 16일에 목포인가 완도에서 배를 탔고, 저희는 15일에 인천에서 탔다가 사고가 난 거고요. 사고 나고 며칠 있다 제주 집에 와 보니 짐이 도착해 있더라고요."

"그 찰나의 순간을 잊을 수가 없어요"
 
 사진 수업 받는 김병규씨.
 사진 수업 받는 김병규씨.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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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가 출항하기 전까지 기억나는 게 있으신가요?
"15일 오후에 배를 타려고 인천 연안부두에 갔는데 그날따라 안개가 많이 끼어 있었어요. 여객터미널 안에는 학생들이 꽉 차 있었어요. 안개가 너무 심해서였는지 출항 시간이 가까워졌는데도 '안개주의보'가 계속 모니터에 떠 있었어요. 안개 때문에 몇 시간 동안 출항을 못 하자 지친 아이들은 터미널에서 떠들고 놀고 정신없이 왔다 갔다 했었죠.

기다리다 지쳐 왜 출항이 안 되느냐고 직원들에게 항의했더니 선사에서 일단 사람은 승선시킨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배에 승선해서 저녁을 먹고 나니 겨우 출항을 하더라고요. 밤 10시경에 폭죽놀이 한다고 해서 갑판으로 구경하러 올라갔었죠. 그때까지 의외로 바다는 잔잔했어요. 흔들리거나 그런 건 없었습니다."

- 다음 날 아침에는 어떠셨나요?
"아침에 방송을 듣고 일어났어요. 제가 원래 여행할 때는 잠을 잘 안 자는 편이에요. 그래서 왔다 갔다 하다 설핏 잠들었는데 방송에서 아침식사 시간이 7시부터 9시까지라고 하더라고요.

그 방송을 듣고 일어나서 7시에 식당으로 가니 뷔페식이라 식권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식권을 사 가지고 왔어요. 식권을 사서 오니 승무원이 하는 말이 '학생들이 많으니 일반인은 나중에 드세요'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침을 못 먹고 다시 침대칸으로 왔어요.

그러다 재차 방송이 나왔어요. '식사 못 하신 분 지금 식사를 안 하면 식당은 문 닫습니다'는 방송을 듣고 식당에 간 것이 8시쯤이었어요. 그 방송 듣고 가서 아침을 먹었죠. 그때의 기억이 참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식당에 도착해 줄을 섰는데 앞에 줄을 선 사람이 한 서너 사람, 그리고 식탁 네 군데에 사람이 좀 있었고 학생들도 있었어요. 뷔페식이라 식판을 들고 주걱으로 밥을 푸려는데 배가 갑자기 휘청거렸어요. 두 번 정도? 그래서 아내랑 바다가 잔잔한데 배가 왜 이러지 했죠.

어쨌든 밥을 펐어요. 그리고 식탁에 앉을 무렵 배가 또 한 번 휘청해서 참 이상하다 했어요. 그래도 일단 밥은 다 먹고 식판을 반납하고 나왔는데 그 시간이 대충 30분 정도 걸렸던 것 같아요. 양치도 해야 하니까 침대칸으로 다시 들어갔다가, 같이 데려간 강아지 밥을 들고나와 카운터에 있던 승무원한테 라운지 옆에 강아지 보관하는 곳 문을 열어 달랬어요. 강아지를 따로 보관하고 있었거든요.

문을 열어 주길래 강아지에게 밥을 주는데 강아지가 먹지를 않더라고요. 이상했죠. 밤새 똥오줌도 안 싸고 힘들었나 했어요. 강아지가 먹지는 않고 계속 안기려고만 하고 안겨서는 떨어지지도 않았어요. 그러다 승무원이 문을 닫아야 한다고 해서 잠깐 갑판에서 밥을 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규정상 그럴 수 없다고 해서 불안해하는 강아지를 그냥 두고 돌아왔어요.

마음이 얼마나 안 좋았는지 몰라요. 밥도 주지 못하고... 강아지 보고 나와서 아내는 다시 침대칸 가서 양치하고 쉬겠다고 하고 저는 기왕 나온 김에 아침 바다 보면서 바람이나 쐬자고 손잡고 갑판 쪽으로 이끄는 바로 그 순간 배가 훅하고 기울더라고. 그 시간이 대략 9시 40분가량이었을 거예요.

만약에 아내를 그냥 침대칸에 보내고 나만 갑판에 바람 쐬러 나왔으면 우린 이별했을 거예요. 그 찰나의 순간을 잊을 수가 없어요."

"당시에는 죽는구나 싶었어요"
      
- 배가 기운 순간에는 어떻게 되셨나요?
"갑판에서 밖을 보니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괜히 내가 아내를 데리고 밖에 나왔나 후회했죠.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나와 있었으니 그나마 구출된 거였지만, 당시에는 그냥 안에만 있지 왜 나왔을까 후회했어요.

배가 기울어서 넘어가니 바다가 바로 우리 코앞에 있더라고요. 우리는 빠지지 않으려고 난간대를 잡고 정말 힘겹게 4층까지 올라갔어요. 그 올라가는 과정에 3층 절반쯤 위치한 난간에서 학생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게 '요셉'이었어요. 혼자 엉엉 울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 학생도 데리고 같이 올라갔어요."

- 4층까지 올라간 다음에는 어떻게 되셨나요?
"배가 기울어서 난간에 매달려 구조요청도 하고 신고도 하고 했어요(제주 해경 조사 시 자신의 통화기록은 남아 있는데 해경의 신고기록은 누락되었다는 이상한 점을 확인했다고). 어쨌든 당시에는 죽는구나 싶었어요.

그러다 헬기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조금 안심이 되었어요. 그러다 아래를 보니 123정이 다가와 사람들 싣고 가는 거예요. 123정이 우리를 발견 못 하길래 목이 찢어져라 소리쳤죠. '살려달라'고, '우리 여기 있다'고. 그렇게 해서 세 명이 조그만 보트에 옮겨 타서 123정에 올라갔죠.

팽목항에 도착해서 있다가 제주도로 다시 내려갈 수 없으니 대책본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했어요. 일단 우리를 찾으러 내려온 집안사람들과 함께 인천 아이들 집으로 가겠다고 해서 인천으로 올라갔죠."

-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셨나요?
"병원 가고 어쩌고 할 새가 없었어요. 잔금을 안 치르면 계약금도 날아갈 판이었으니까. 그거 해결한다고 정신없이 돌아다니는데 너무 고통스럽더라고요. 법무사나 부동산 쫓아다니면서 집 계약 다시 하고 집주인한테 양해 구하고 나니 일주일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제주로 내려올 수 있었어요."

- 후유증이 있었을 텐데요.
"집 문제가 정리되고 나서야 병원에 다닐 수 있었어요. 처음에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어느 병원을 가야 하는지, 가도 되는 건지, 누가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어요. 전입도 늦어져 이것도 저것도 아닌 시간을 보름 가까이 보내고 나서야 제주에 있는 생존자로 등록이 된 거죠.

엄청 힘들었어요. 저희 말고 다른 제주의 생존자분들은 여기가 고향이거나 주거지가 있는 곳이라 지인도 있고 소통도 되지만 우리는 이주민이니까 홀로 동떨어져 있었어요."

"살아남은 사람들이 겪는 고통... 본 것들이 너무 많았어요"
  
 아로마 천연향 강습을 받는 김병규씨. 이러한 강의를 통해 마음을 치유하려 노력한다.
 아로마 천연향 강습을 받는 김병규씨. 이러한 강의를 통해 마음을 치유하려 노력한다.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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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은 어떻게 하셨나요?
"처음 내려올 때 계획과 많이 달라졌죠. 사람 만나기도 어렵고 힘들어서 한동안 집 밖을 안 나갔어요. 어디 돈 벌러 나갈 상황도 아니었고 한 1년간 지금까지 모았던 돈을 쓰면서 버티고 살았죠. 나중에 연강병원이 생기고 나서야 사람들을 만나고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어려움이 많았겠어요.
"제주에 내려와서 지내는 것도 힘들었지만 같이 지내는 아내가 너무 힘들어했으니까요. 언론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 제가 아는 것과 다른 이야기가 있어도, 힘들어하는 아내 내버려 두고 가서 '이게 옳다, 저게 맞다' 이렇게 말하러 다니기가 어려웠죠.

유명을 달리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이 겪는 가시방석 같은 고통도 말로 다 할 수가 없어요. 본 것들이 너무 많았어요. 배가 넘어가면서 유리창 너머로 봤던 얼굴들이 각인 되어 있는데 그걸 가슴 안 아파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여기 살면서 제 주위에 식구, 집안사람들 외에는 친구들이나 예전 직장 동료들은 제가 죽은 줄로 알아요. 사고 나고 처음에 다들 돈 얘기밖에 안 했거든요. 아예 전화번호도 바꿔버렸어요. 그래서 이렇게 인터뷰하는 것에 대해 고민이 많았어요. 저희 아이들도 우려했어요. 그걸로 인해 누구의 딸이니 뭐니 말이 생길까 봐요. 당연히 저희가 걱정되기도 하고요.

제가 그림을 그리면 종종 이런 말을 써요. '덤으로 사는 인생이다. 새롭게 사는 인생이다' 이렇게요. 이제 남은 인생은 정말 아름답게 살아가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 많이 노력해왔고요."
      
- '제주세월호생존자와그들을지지하는모임'에 바라는 점이 있으신가요?
"우리 생존자들의 의견이 한목소리로 잘 전달됐으면 좋겠어요. 각자의 경험과 생각, 아픔이 다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참사에 대해 잘 알 수 있도록 힘이 모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예전에 다 같이 제주에 있는 생존자들이 있었을 때 한 이야기가 있어요. 기억들 하실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어쨌든 한 배에서 살아 돌아왔으니 형제다' 그 마음이에요."

덧붙이는 글 | 제주세월호생존자와그들을지지하는모임의 회원이 되어주세요. https://bit.ly/3fGn17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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