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녀 성추행 혐의를 받고 있는 우디 앨런 감독의 신작 영화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이 6일 국내 개봉했다. 최근 이렇다 할 개봉작이 없어서일까. 닷새 동안 누적 관객수 4만 6천여 명을 모으며 박스오피스 1위를 선점하고 있다.

과연 우디 앨런 감독에게 차기작을 기대할 수 있을까라는 우려가 앞섰다. 성추문도 성추문이지만 이제 2020년, 우디 앨런이 감독이 하는 이야기가 '그의 시절'을 지나고 있다는 지점에서이다. 
 
 레이니 데이 인 뉴욕

레이니 데이 인 뉴욕 ⓒ 버킷 스튜디오

 
<레이니 데이 인 뉴욕> 역시 그의 다른 영화처럼 다큐멘터리같은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개츠비(티모시 살라메 분)는 뉴욕을 떠나 지방의 작은 대학을 다니고 있다. 하지만 그는 쫓겨났다고 전해지는 이전의 대학처럼 이번 대학에도 영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그가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이유는 애리조나 지역 유지의 딸인 여자 친구 애슐리(엘르 패닝 분) 때문이다. 애슐리는 유명 감독 롤란 폴란드(리브 슈나이더 분)와의 주말 인터뷰를 앞두고 들떠있다. 개츠비는 애슐리와 함께 모처럼 뉴욕으로 돌아가 로맨틱한 데이트를 즐길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야무진 데이트 계획은 인터뷰를 하러 간 애슐리가 돌아오지 않으면서 어긋나기 시작한다. 

방황하는 개츠비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은 두 이야기의 갈래로 진행된다. 그 중 하나는 개츠비의 고생담이다. 여자 친구와 함께 뉴욕에서 주말을 보내기 위해 뉴요커인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통털어 가장 로맨틱한 일정을 짜놓는다. 하지만 비가 오기 시작한 날씨와 함께 여자 친구와의 일정은 자꾸만 어긋난다. 

이러한 풍경은 그의 삶과도 닮았다. 개츠비의 형과 친구들은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삶을 살고 있다. 그와 달리 개츠비는 스스로 삶의 여정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포커판에서 딴 돈으로 고급 호텔을 호기롭게 예약하는 개츠비는 여전히 부모님이 주신 돈으로 공부하며 여유를 누린다. 그러나 어머니의 파티에는 어떻게든 참석하지 않으려 한다. 그에게 부모님과 그 주변 사람들은 그저 지적 허영에 들뜬 졸부들일 뿐이다. 책을 읽고 전시회를 보고 피아노를 치고, 그가 누린 모든 것들은 어머니의 강요 때문이라고 여긴다. 그렇다고 애슐리의 동생 챈(셀레나 고메즈 분)의 지적처럼 울타리를 박차고 나갈 용기도 없다.

누린 것과 지향하는 것 사이의 '혼돈', 그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청년이 개츠비다. 그는 <위대한 개츠비> 속 개츠비처럼 방황하는 청춘읻. 하지만 스스로의 삶에 도박을 거는 대신 어머니의 돈으로 도박판을 다니는 청년에 불과하다. 사랑에 올인하고 싶지만 여자 친구는 그에게 시간을 주지 않고 뜻하게 않게 만나게 된 챈을 통해 '지질한' 자신을 자각하게 된다.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 방황하는 청춘의 이야기에 있어서 우디 앨런 감독은 여전히 장기를 발휘한다. 거기에 도시적 감성이 더해지며 영화는 청춘 영화 이상의 감수성을 즐길 거리로 제공한다. 개츠비가 느끼는 정체성의 혼란은 비 오는 뉴욕 명소를 통해 감각있게 드러난다.
 
 레이니 데이 인 뉴욕

레이니 데이 인 뉴욕 ⓒ 버킷 스튜디오

 
애슐리의 엇나가버린 도전 

우디 앨런 감독이 남성 청춘을 그린 것에서는 장기를 발휘했지만, 여성을 그리는 방식은 실망스럽다.  

애슐리는 학보사 기자로 유명 감독 로만 폴라드를 만난다는 기쁨에 설레한다. 은행업계 거물인 아버지를 둔 애슐리는 살면서 뉴욕은 어릴 적 겨우 두 번 와 본 게 전부다. 애리조나 출신의 이 여학생은 학보사 기자로 뉴욕 그리고 유명 감독을 만난다는 행운으로 인해 한껏 들뜬다. 출발할 때부터 개츠비는 뉴요커로서 애슐리에게 로맨틱한 데이트 코스를 제안하지만 이미 인터뷰에 들뜬 애슐리에게 들리지 않는다.

로만 폴라드 감독의 돌출 행동으로 인해 애슐리가 애인에게 돌아갈 시간은 점점 늦춰진다. 하지만 이건 애슐리의 생각이다. 천재 감독의 우울증, 각본가의 뜻하지 않은 가정사 그리고 뜻밖에 조우한 당대 스타와의 인터뷰. 애슐리가 만난 행운들은 반대로, 남자들에겐 어리고 아름다운 여성과의 작업시간일 뿐이다.

여자만 보면 그 상대방이 누구건 상관없이 '작업 정신'을 발휘하는 남성들의 조합은 우디 앨런 영화의 전통이나 마찬가지다. 지방 출신의 애슐리를 성적으로 대상화 시키는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는 관객을 씁쓸하게 만든다. 

영화에서 학보사 기자를 할 만큼의 지적 능력을 가진 여성은 뉴욕의 대감독이란 이유만으로 혹은 당대의 스타란 이유만으로 무장해제 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 장면은 실소'를 자아내게 만들 만큼 이전 세대의 관습적 장치이다. 애슐리가 매번 꺼내드는 취재 수첩이 무색하게 만들 만큼.

물론 영화에서는 애슐리와 대비되는 위치에 어머니와 챈을 등장시킨다. 어머니는 뉴욕의 상류층으로 자리매김한 자수성가의 상징이다. 그리고 챈은 개츠비에게 자신의 현실을 자각하게 만드는 존재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두 사람은 개츠비의 자각을 위한 장치로 쓰였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마돈나 아니면 마리아, 남성의 시각에서 자신을 구제할 두 여성성의 협소한 한계 속에서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는 머무르고 만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이 과거에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져 왔다. 하지만 최근 관객들은 영화 제작자들에게 젠더 감수성에 대해 좀 더 성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디 앨런 감독은 이제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
레이니 데인 인 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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