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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매일 이용하는 교통, 그리고 대중교통에 대한 최신 소식을 전합니다. 가려운 부분은 시원하게 긁어주고, 속터지는 부분은 가차없이 분노하는 칼럼도 써내려갑니다. 교통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전하는 곳, 여기는 <박장식의 환승센터>입니다. - 기자 말   
 
 서울의 주요한 교통로 중 하나인 사직터널의 전경.
 서울의 주요한 교통로 중 하나인 사직터널의 전경.
ⓒ 박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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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이나 강서 쪽에서 서울 도심 방향으로 출근하는 직장인들이라면 꼭 들르게 되는 길이 있다. 금화터널을 지난 뒤 하늘 위를 날아가는 듯한 독립문고가 위를 넘고, 그 다음으로 사직터널을 지나 서울 도심으로 들어서는 길 말이다. 

그 중 독립문에서 사직단까지 140m, 짧은 길이의 사직터널은 서울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도로 터널이다. 사직터널은 서울을 다니던 전차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도 전인 1967년 개통해, 지금까지 53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매일 고단한 출퇴근객을, 바삐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지금이야 수백 미터 구간의 터널 개통은 흔히들 있는 일인 데다 터널 개통식이 성대하게 열리는 일을 찾아보기도 어렵다. 하지만 1967년 사직터널 개통식은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이 참석하는 등 퍽 성대하게 진행됐다. 그 정도로 사직터널은 서울 도시 역사의 한 획을 그은 터널이었다.

꽉 찬 서울에, '불도저' 시장이 만든 터널
 
 서울의 첫 번째 터널인 사직터널이 공사되고 있는 모습.
 서울의 첫 번째 터널인 사직터널이 공사되고 있는 모습.
ⓒ 서울역사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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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를 거치며 점점 면적이 넓어졌다. 용산과 마포, 영등포가 개발되고, 강남 지역이 1963년 서울에 편입되는 등 서울의 면적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럼에도 서울의 인프라는 한양 도성의 안쪽을 위주로 집중적으로 마련돼 있었다.

당장 서울의 주요한 교통수단이었던 전차도 한양도성의 서쪽에서는 지금의 영천시장에서 끊겼고, 그 이북의 홍제, 갈현동으로 이어지는 도로(지금의 통일로)도 15m 안팎의 좁은 폭의 도로에 불과했다. 때문에 면적도, 인구도 가파르게 늘어 빠르게 증가하는 서울의 교통량을 좁은 도로와 서대문로터리에 맡겨야만 했다.

사직터널은 그러한 배경에서 생겨났다. 서울은 좁은 도시권에 비해 폭발적인 인구 증가로 진통을 앓고 있었고, 이호철 작가가 동아일보에 연재한 소설 <서울은 만원이다>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기도 했다. 그 당시 서울특별시장으로 임명되었던 김현옥 시장은 '불도저 시장'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서울을 대확장시켰다. 

당시 서울은 공사판이었다. 안팎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 전차의 폐지 계획이 잡혔고, 그를 대체하기 위한 여러 도로 계획이 공사로 옮겨졌기 때문이었다. 엄청난 공사에 리베이트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돌았다. 그 터널 중 첫 번째가 당시 서울 도심의 끝자락에서 뻗어나가는 사직터널이었다.

우여곡절 끝 열린 터널, 서울의 동맥이 되다
 
 1967년 사직터널이 개통했을 때의 모습.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을 비롯한 관계자와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통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1967년 사직터널이 개통했을 때의 모습.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을 비롯한 관계자와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통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 서울특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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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터널이 있던 자리에는 원래 도로가 없었다. 그래서 독립문에서 사직단을 잇는 도로를 여는 게 우선이었다. 가장 먼저 사직단 대문을 뒤로 밀고 그 다음 가옥 100여 채와 내자시장을 철거했다. 심지어 원래 계획에는 당시 고급 아파트였던 내자아파트도 철거하려다가 반발 끝에 취소되는 촌극도 벌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당시 태백선 공사를 맡았던 한강공영이 도로의 공사를 맡았다. 150m가 안 되는 쌍굴 터널을 뚫는데 당시로써는 비싼 공사비였던 9천5백만 원, 현재 물가로는 30억 원에 육박하는 비용이 들었다. 터널 바로 위에 사람이 사는 집이 있어, 가옥을 보호하면서 터널을 시공해야 하는 난공사가 이어지기도 했다.

그런 공사 끝에 1967년 1월 21일 김현옥 시장이 직접 참여한 가운데 성대한 개통식이 열렸다. 서울에서 첫 번째로 기차를 타지 않고도 지나갈 수 있는 터널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차량 통행이 많은 서대문네거리 대신 사직터널을 타면 금세 서울 광화문 앞까지 닿을 수 있게 되어 호응이 컸다.

사직터널의 성공적인 개통에 이어 서울 곳곳에는 여러 터널이 지어졌다. 서울의 복판을 관통하는 남산1호터널이 1970년 개통했고, 1971년에는 정부 요인이 참석한 가운데 북악터널이 성대하게 개통식을 열고 남산2호터널이 개통하는 등 고갯길을 넘어 터널로 이어지는 서울의 산지 극복이 본격화됐다.

사직터널의 중요성도 커졌다. 서울 서쪽의 개발이 진척되자 1979년에는 서대문구 봉원동에서 독립문으로 이어지는 금화터널이 개통되고, 금화터널과 사직터널을 하늘 위에서 잇는 독립문고가차도가 개통되며, 1980년 개통된 성산대교에서 동대문까지 이어지는 서울의 또 다른 간선로가 만들어졌다.

그러니 1967년 기준에는 '오버스펙' 이야기를 들었던 왕복 4차선의 쌍굴 터널로는 한강 너머에서 쏟아지는 막대한 교통량을 버티기 어려웠다. 그래서 독립문고가의 개통에 맞춰 기존 터널 바로 옆에 160m 길이의 새 터널을 개통했다. 터널 세 개가 한곳에 겹쳐 있는 사직터널의 이색적인 모습은 이때 만들어졌다.

터널이 남긴 60년대, 그리고 서울 개발의 흔적
 
 사직터널 입구에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음을 알리는 동판이 붙어있다.
 사직터널 입구에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음을 알리는 동판이 붙어있다.
ⓒ 박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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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의 역사와 함께해온 사직터널은 이제 문화재 역할도 하고 있다. 지난 2013년 서울특별시가 지정한 '서울미래유산'에 지정된 데 이어, 2020년에는 서울특별시의 '우수건축자산'에도 뽑혔다. 짧은 터널이 서울의 도시권역 확장 역사를 대변했음이 반영된 것이다.

반대로, 어떻게 보면 오래된 건축물만이 문화재가 아니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살아 있는 토목구조물 역시 문화재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벌써 개통 53주년을 맞이한 사직터널은 오늘도 하루 10만 대에 가까운 차량이 오가며, 지금도 서울의 중요한 교통로로 활용되고 있다.

이미 국내에서는 다른 터널들 역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동양의 첫 해저터널로 개통된 통영 해저터널과 1930년대 일제의 수탈이 깊이 밴 여수의 마래터널이 그들이다. 그러한 터널 못지않게, 서울의 폭발적인 개발상을 콘크리트로 된 반질반질한 민낯으로 보여주는 사직터널의 중요성 역시 큰 것이다.

그리고, 어찌 보면 60년대 서울 도로를 입체적으로 개발했던 마지막 흔적 중 한 곳이 되어버리기도 했다. 서울의 첫 고가차도인 아현고가차도, 서울역고가도 철거된 상황이지만, 사직터널은 얕은 터널 위로 아직도 도로가, 성곽이 지나간다. 고가차도가, 지하도가 많았던 서울의 흔적을 이제는 얕은 언덕 아래 간직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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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교통 기사도 쓰고, 스포츠와 여행까지, 쓰고 싶은 이야기도 쓰는 사람. 그러면서도 '라디오 고정 게스트'로 나서고 싶은 시민기자. 그리고 자칭 교통 칼럼니스트. - 부동산 개발을 위해 글 쓰는 사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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