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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여름, '들불야학'의 탄생

1978년 12월 28일, 연탄가스 중독으로 유명을 달리한 스물두 살 여인의 영결식이 열렸다. 김제에서 농사를 짓다 소식을 듣고 자리하게 됐다는 김민기라는 청년이 노래를 불렀다. "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니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가 끝내 이기리라." 훗날 <상록수>라는 제목이 붙여진 노래가 작곡자 스스로에 의해 처음 공연되는 순간이었다.❶ 군복바지와 낡은 티셔츠를 즐겨 입고 다녔던 걸걸한 목소리의 여학생 박기순은 그렇게 남은 이들의 흐느낌 속에서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8개월 전, 박기순은 새로운 야학을 꿈꾸던 대학생이었다. 광주 산수동 '꼬두메' 야학에 열정을 쏟아부었던 그는 노동자들의 검정고시 준비를 돕는 것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해 4월, 서울에 있던 친구 전혜경의 집에서 서울 구로공단 '겨레터 야학' 동향인들을 만난 후, 광주까지 그 인연이 이어져 함께 새로운 꿈을 꾸릴 사람과 방법을 찾고 있었다. 

광천동 성당에서 그들에게 교리실 공간을 내어주자, 스스로 교재를 만들고 아무도 모르게 리어카를 빌려 과일 행상을 하며 운영자금을 모았다. 야학의 이름도 그의 뜻을 따라 지어졌다. 동학농민운동을 다룬 유현종의 소설 <들불>과 노동운동가 스파이스(August Spies)의 최후진술❷ 속 '들불(subterranean fire)'이 품은 맥락을 하나로 엮어낸 것이었다. 말보다 행동이라고 늘 되뇌던 그의 뜻대로, 1978년 7월 23일 강학❸ 7인과 학강❹ 35인이 모여 서울 외 지역 최초의 노동자 야학 '들불야학'의 입학식이 열렸다.  

"상원 오빠는 직장(서울의 주택은행)을 때려치우고 막 내려와 아직 찍힌 인물이 아니라서 야학 참여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훗날 5.18 광주민주화항쟁 시민군 대변인이 되어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을 지켰던 윤상원을 끈질기게 설득해 들불야학의 강학으로 불러 앉힌 것도 그였다. 들불야학 1기 임낙평 강학의 증언에 의하면, 강학들끼리의 토론 끝에 박기순은 야학은 윤상원에게 맡기고 내심 학생운동으로의 복귀를 정하고 있었다고도 전해진다. 
 
전남여고 재학 시절(왼쪽)과?들불야학 강학 시절(오른쪽)의 박기순
 전남여고 재학 시절(왼쪽)과?들불야학 강학 시절(오른쪽)의 박기순
ⓒ 윤상원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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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불을 지핀 영혼, 박기순

그는 아시아자동차(현 기아자동차)에 부품을 납품하는 동신강건사에 일당 800원을 받는 조립 견습공으로 입사해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야학 강의를 하는 생활에 돌입한다. 이것은 광주 전남 지역 최초의 위장취업으로도 알려졌는데, 재작년 박기순의 40주기를 맞아 평전 <스물두 살 박기순>을 펴낸 그의 고교동창이자 루사RUSA 서클 친구였던 송경자 작가는 "기순은 위장 취업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노동자로 살고자 했다"고 덧붙이고 있다. 

같은 해 크리스마스이브, 광천동 성당에서 들불야학 팀은 박효선이 만든 노동현실 고발극 '우리들을 보라'를 공연하고 윤상원과 백재인 강학의 자취방에서 밤새 뒤풀이를 했다. 크리스마스 날 저녁까지 강의실에 쓸 땔감을 구하기 위해 박기순은 그들과 함께 광주 소년원 뒷산에서 나무와 솔방울을 모았고, 광천공단 실태조사팀을 꾸릴 궁리를 하며 자정이 다 되어서야 오빠의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틀 만에 겨우 들 수 있었던 그 단잠은 박기순의 영원한 잠이 되었다. 그를 기억하는 거의 모두가 쫓기는 삶을 살았던 탓에 기록으로 남은 그의 흔적은 인색하지만, 스스로 일기장에 남긴 기록이 남아 일부 전해진다.
 
가난한 자들이 생산한 잉여가치로
덕을 입고 있는 대학인을 비롯한 모든 지식인은
불합리하게 혜택 받고 있는
모든 것들을 되돌려 주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그들 가난한 자와 함께
진정한 역사 창조의 대열에 겸손하게
참여해야 한다
 
그의 영결식이 치러지기 전날,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9대 대통령 취임식이 있었다. 이후 많은 이들이 익히 알고 있는 바대로의 역사들이 시간을 메웠다. 1년 6개월 후에는 광주민주화운동이 있었고 그 심장이었던 전남도청의 한복판을 윤상원과 들불야학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지켰다.

그리고 <임을 위한 행진곡>

1982년 2월, 광주민주항쟁의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의 여동생이자 박기순 올케인 윤경자의 제안으로 박기순과 윤상원의 영혼결혼식이 열렸다. 이로 인해 박기순이라는 이름은 한동안 윤상원과 영혼결혼식을 한 신부의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왔다.

김상호 들불열사기념사업회 상임이사의 증언에 따르면 흔히 알려진 것처럼 박기순과 윤상원이 연인 관계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이름조차 대놓고 맘껏 불러볼 수 없었던 엄혹한 시대의 상황들,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 가족으로서의 그리움과 상실감 등이 얽혀 이 두 사람의 애달픈 삶과 죽음을 한 몸으로 엮어 전하게 했을 것이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나고, 영혼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던 황석영은 그들의 사연에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의 몇 구절을 꺼내 엮어 가사를 만들고, 야학 경험과 대학가요제 수상 경력이 있었던 작곡가 김종률이 곡을 붙여 그의 삶과 죽음을 또 하나의 노래로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임을 위한 행진곡'은 한국에서 일을 하다 귀국한 외국인 노동자들의 입으로도 전해져 태국, 캄보디아, 홍콩 등의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부르고 있다.
 
들불야학과 윤상원의 방이 있던 광천시민아파트 현관 입구. 철거 위기에 처했으나 최근 보존 논의가 진행 중이다.
 들불야학과 윤상원의 방이 있던 광천시민아파트 현관 입구. 철거 위기에 처했으나 최근 보존 논의가 진행 중이다.
ⓒ 참여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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❶  김상윤 윤상원기념사업회 이사장의 증언
❷  "It is a subterranean fire. You cannot put it out." 
불꽃은 들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누구도 이 들불을 끌 수 없으리라!
❸  가르치며 배우는 교사라는 의미로 만든 호칭
❹  배우며 가르치는 학생이라는 의미로 만든 호칭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권경원 님은 다큐멘터리 <1991, 봄> 감독입니다. 이 글은 <월간참여사회> 2020년 5월호에 실렸습니다


태그:#들불야학, #오월광주, #광주40년, #박기순, #윤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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