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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날 오전 치열하게 놀았던 총싸움의 흔적
▲ 총싸움 생일날 오전 치열하게 놀았던 총싸움의 흔적
ⓒ 박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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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연휴, 코로나19로 유치원 등원이 무한정 연기되면서 아이를 보느라 수고하신 친정엄마를 위해 연차까지 사용해 약 일주일 간의 긴 휴가를 보내게 되었다. 평소같으면 모처럼의 여유를 활용해 떠났으리라. 하지만 운전을 할 수 없어 대중교통에 의존해야 하는 나는 이 시국에 어린 아이를 데리고 여행을 떠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집콕'하며 하루하루 시간을 보냈다.

기다렸던 연휴였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았다. 하지만 집이라는 일상적 공간의 한계인가 늘 하던 활동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차려 먹고 싸움놀이를 하다가 동네 마트에 들러 장 봐서 점심 먹고 한글과 숫자 공부를 했다.

과학실험을 빙자한 만들기 놀이를 하다가 간식을 챙겨 먹고 조금 놀다가 저녁을 만들어 먹고 나면 씻고 그림책 읽고나면 하루가 끝났다. 혼자서 책 읽거나 일기 쓸 시간도 없이 24시간이 바삐 흘러갔다.  

모처럼의 연휴인데... 아쉽기도 하고 답답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던 차에 인스타그램이며 블로그 같은 SNS를 열어보면 인친들은 풍광좋은 바닷가나 계곡, 유명한 관광지에서 자신만의 세련된 라이프 스타일을 인증하며 연휴를 즐기고 있었다. 스마트폰에서 고개를 들면 먼지가 굴러다니는 거실 바닥에 널브러진 장난감과 잡동사니, 무릎이 늘어난 내복을 입고 무료함에 그림책을 팔랑팔랑 넘기는 아이의 짠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올 한해 다시 없을 황금연휴에 도대체 뭘 하느라 미리 계획 하나 제대로 세우지 못했을까? 아이에게 미안해지면서 SNS속 지인들에 대한 부러움, 스스로에 대한 못마땅함이 올라왔다.

연휴도 며칠 남았는데 지금이라도 떠나볼까 했지만 아직은 안심할 때가 아니다. 섣불리 움직였다가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속만 상했다. 맘을 긁으려는 참인지 날씨마저 화창한 매일의 연속이었다. 연휴 내내 여유로움과 즐거움 대신 비교하는 마음으로 순간순간 불만스러웠다.  

이런 마음과 연동이라도 한 듯 출근도 안 하고 집에 있는 편한 상태인데 잠이 쏟아지고 피곤해서 아이가 하자는 것도 건성건성 대하고 말았다. 아이는 엄마의 하는 둥 마는 둥한 시늉이 불만스러웠던지 놀이를 그만 두고 평소 쉬는 자리에 드러누워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답답함과 미안함이 올라왔다. 반복되는 악순환이었다.

문득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일상의 반짝거림, 소중함을 느끼면서 감사해온 나였다. 그런데 과연 진심으로 나는 나의 일상을 아끼고 사랑하고 있었던 것일까? 무언가를 해야만 모처럼의 연휴를 잘 보낼 수 있다고 아이에게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느라 정작 나의 일상을 단단하게 바치는 정성을 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나?

아이에 대한 미안함과 이런저런 생각을 블로그에 일기로 남겼다. 많은 이웃님들이 공감과 함께 댓글을 달아주셨다. 나보다 먼저 아이를 키운 육아 선배거나 동료인 이웃님들이다. 그것을 통해 놓치고 있던 것을 명확히 깨달을 수 있었다. 바로 아이는 내가 누구며 무엇을 하던지 엄마인 나를 사랑하고 믿으며 함께 하는 시간을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아이의 일곱살 생일을 맞아 조촐한 생일축하
▲ 생일축하 아이의 일곱살 생일을 맞아 조촐한 생일축하
ⓒ 박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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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이의 일곱번째 생일이다. 부처님 오신 날 하루 전 저녁, 퇴근하고 친정식구들과 조촐하게 아이 생일 파티를 미리 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본방, 진짜 생일날이다. 일찍 일어나 참기름 둘러 미역과 소고기를 다글다글 볶았다. 진하게 우린 멸치육수를 부어 보글보글 생일 미역국을 끓여냈다. 미리 재워둔 소불고기를 볶고 잡채를 데워 아이 생일상을 차려주었다. 

주말이면 챙겨보는 EBS 만화를 두 편 본 뒤, 해외근무 중인 남편에게 영상통화를 걸어 조각케이크에 일곱살 촛불을 꽂아 생일축하를 해주었다. 며칠 전 파티할 때, 큰 케이크에 소원을 빌었지만 진짜 생일날 그냥 보내긴 아쉬워서 이벤트로 따로 준비한 것이다. 케이크의 크기에 상관 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딸기가 촘촘히 박힌 것에 기뻐하는 아이를 보니 잠시 잊었던 행복의 실마리를 찾은 듯 했다.

오전에는 아이가 좋아하지만 나는 귀찮아서 잘 하지 않던 총싸움을 했다. 공기 압력으로 통 속의 스펀지 공을 내보내는 장난감인데 몇해 전 외할아버지가 아이에게 사준 장난감이다. 위험하지는 않지만 발사할 때 소리가 커서 행여나 이웃집에 피해가 될까봐 늘 자제시켰던 놀이였다. 하지만 오늘만은 특별히 시간을 정해 놓고 원없이 놀게 해 주었다. 노는 내내 흥에 겨운 함박웃음이 아이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다. 

둘이서 엊그제 끓여둔 자장에 밥 비벼 한그릇 비우고 집안 청소도 하고 아이가 좋아하는 간식도 먹었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귀한 카스테라를 한 입 나눠주는 아이가 예뻐서 꼭 안아주었다. 저녁 먹고 청소하다가 찾아낸 에릭 칼의 <팬케이크, 팬케이크>를 읽어주었다. 아침에 일어나 팬케이크가 먹고 싶어진 잭이 엄마의 부탁으로 밀을 수확해 가루를 만들고 재료를 하나씩 구해 와 맛있는 팬케이크를 만드는 과정을 그린 그림책이다.

마지막에 잭 엄마의 레시피가 나오는데 내친 김에 주방으로 달려가 똑같이 재료를 섞고 반죽을 만들어 팬케이크를 부쳐봤다. 아이가 좋아하는 블루베리도 가득 올렸더니 짙은 보라색의 팬케이크가 탄생했다. 계란지단에 밀가루를 넣은 듯한 맛이 났지만 아이는 세상 제일 맛있다며 엄지척을 날리며 엄마의 어설픈 요리를 칭찬해 주었다. 입안 가득 팬케이크를 넣으며 나를 바라보며 함박웃음을 짓는 아이를 보면서 작지만 분명한 행복을 두고 한눈을 팔았던 나를 돌아보았다.
 
그림책 팬케이크 팬케이크 읽다가 그림책에 나오는 레시피대로 팬케이크 굽기
▲ 팬케이크 만들기 그림책 팬케이크 팬케이크 읽다가 그림책에 나오는 레시피대로 팬케이크 굽기
ⓒ 박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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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알겠다. 지금의 나에게 행복한 시간이란 잭의 팬케이크 같은 것임을. 밀을 수확해 방앗간에 가서 가루로 만들고 젖을 짜고 버터를 만들고 계란을 구해 오는 모든 과정은 너무나도 일상적인 행위라 전혀 멋져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수고스럽고 지리한 과정 끝에 엄마가 자신만의 비법으로 정성스레 만들어 준 팬케이크는 세상 제일 맛있는 둘만의 행복이다. 

모처럼의 연휴에 멋진 곳에 데려가지 못해 아이가 좋은 경험을 할 기회를 놓친 것은 아닌가 전전긍긍하기 보다 할 수 있는 것을 해 주어야겠다. 따스하고 맛있는 추억을 선물하는 것이라면 지금 있는 곳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캠핑을 가지 못했지만 오늘은 거실에 놀이용 텐트를 치고 이불을 깔아서 둘이서 꼭 껴안고 잠자리에 들려 한다. 그 계획을 말하자 신이 난 아이의 얼굴이 싱글벙글이다. 그 표정을 마주한 내 얼굴에도 서서히 미소가 퍼진다. 꽤 괜찮은 연휴다.

태그:#황금연휴, #코로나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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