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우연히 보게 된 한 광고 때문에 코끝이 찡해진 적이 있다. 광고 속, 사위와 마주 앉은 장인어른은 이야기 도중 문득 생각에 잠기고, 그 순간 스무 살 시절로 돌아가 장발을 한 청년의 모습이 되어 통기타를 치며 꽃다운 처녀에게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른다. 이윽고 현실로 돌아오면, 기억 속 그 꽃다운 처녀는 이제 주름진 얼굴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늙은 아내가 되어있다. 

광고를 보는 내내 '그래, 우리 엄마 아빠도 저렇게 청춘이던 때가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문득 얼마 후 있을 어버이날에 부모님과 함께 보면 좋겠다 싶은 영화가 떠올랐다. 바로 내 부모님의 스무 살, 그 반짝이던 시절에 바치는 영화 <쎄시봉>이다.

 
영화 <쎄시봉> 포스터 60년대 말 쎄시봉을 주름잡던 청춘의 아이콘 '쎄시봉 트리오'와 그들의 영원한 뮤즈 민자영(한효주).

▲ 영화 <쎄시봉> 포스터 60년대 말 쎄시봉을 주름잡던 청춘의 아이콘 '쎄시봉 트리오'와 그들의 영원한 뮤즈 민자영(한효주). ⓒ 제이필름

 
<쎄시봉>은 1963년 서울 무교동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 감상실로 1960년대 대학가 젊은이들이 한 데 모여서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들으면서 청춘과 낭만을 만끽하던 장소다. 실내에 소극장 같은 무대가 설치되어, 대학생들이 무대에 올라 통기타를 치며 샹송, 칸 쇼네, 팝송 등을 불렀고 젊음을 대변하는 공간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가수 조영남 이장희 윤형주 김세환 등 수 많은 가수를 배출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영화는 실제 존재했던 그 쎄시봉 음악 감상실을 배경으로 이장희나 윤형주 같은 실존 인물과 함께, 가상의 인물들이 더해지며 1960년대 청춘들의 어느 한 시절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영화는 '우리도 스무 살이었던 적이 있다'라는 내래이션을 시작으로, 그 시절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펼쳐진다.

1960년대 말 쎄시봉의 주인 김 사장(권해효)은 전속 프로듀서인 이장희(진구)와 함께 쎄시봉을 끌어갈 대표 가수를 찾고 있었다. 당시 쎄시봉은 '대학생의 밤'이나 '댄스 경연 대회' 등의 이벤트를 통해 끼많은 젊은이들을 무대에 세우면서 큰 호응을 얻었다. 특히 대학생의 밤은 매주 노래에 재능있는 대학생들이 참가해서 노래를 부르고, 우승자를 가리는 토너먼트식 경합으로, 자신이 응원하는 '오빠'를 찾아온 여고생들로 북적이기도 했다.

대학생의 밤 10주 우승에 빛나는 의대생 윤형주(강하늘)는 독보적으로 많은 소녀 팬을 몰고 다닌 쎄시봉의 스타였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학업에 열중하길 바라는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더는 쎄시봉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때 혜성처럼 등장한 송창식(조복래). 창식은 성악을 전공한 음악도답게 오페라 '사랑의 묘약' 중 2막에 나오는 아리아 '남몰래 흘리는 눈물'을 부르며 형주를 꺾고 우승 타이틀을 차지한다. 결국, 창식의 노래 실력에 자극받은 형주는 창식을 견제하기 위해 쎄시봉에 다시 돌아오게 된다.

영화에서는 배우들이 실제 노래를 직접 부르는 장면이 여러 차례 나오는데, 우리 부모님 세대가 젊은 시절 즐겨 들었던 팝송과 포크송, 번안곡들이 지루할 틈 없이 이어져서 보는 내내 귀를 즐겁게 한다. 송창식 역할을 맡은 배우 조복래의 시원시원한 가창력은 말할 것도 없고, 요즘 대세라고 할 수 있는 배우 강하늘이 부르는 'My Bonnie Lies over the Ocean'을 듣고 있으면 이 배우가 원래 이렇게 노래를 잘했나 싶어서 절로 감탄이 난다.
 
김 사장과 장희(진구)는 쎄시봉을 대표할 만한 가수로 윤형주와 송창식을 점찍고 듀엣을 만들고자 했으나, 미성의 윤형주와 테너에 가까운 송창식의 목소리 사이에 완충재 역할을 해줄 만한 바리톤이나 베이스의 음성을 지닌 인물이 한 명 더 있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마침 장희는 우연히 만난 오근태(정우)에게서 재능을 발견하고, 하숙비를 벌게 해주겠다며 꼬드기는 데 성공한다. 그렇게 윤형주, 송창식, 오근태 세 사람은 '쎄시봉 트리오'라는 이름의 쎄시봉 전속 가수가 된다. 그런데 만났다 하면 티격태격하는 세 사람. 서울 뺀질이 윤형주와 자유로운 영혼 송창식, 기타 코드조차 잡을 줄 모르면서 자존심만 센 부산 촌놈 오근태는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세 사람은 쎄시봉에 나타난 아름다운 여인 민자영(한효주)에게 동시에 반하면서 달라진다. 자영이 쎄시봉의 단골인 데다가 장희의 어릴 적 친구라는 사실 때문에, 어떻게든 잘 보여서 자영의 마음을 얻고 말리라는 계획하에 그들은 노래 연습에 매진한다. 세 사람이 본격적으로 화음을 맞추면서 부르는 노래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의 경쾌한 리듬은 듣는 내내 절로 발끝을 까닥이게 만든다.

영화는 시종일관 올드 팝송은 물론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조개껍질 묶어', '담뱃가게 아가씨' 같은 주옥같은 옛 가요가 이어지면서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감수성을 자극한다. 마치 뮤지컬처럼 서사에 따라 그에 어울리는 가사의 노래가 함께 흐르는 식이라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근태가 자영에게 사랑을 고백하면서 부르는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나, 창식이 자영에게 퇴짜를 맞고 부르는 '담뱃가게 아가씨'등이 그러한데,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법한 노래들이라 반주가 나오는 순간 반가운 마음이 들 것이다.

영화는 쎄시봉 트리오'가 결성되고 해체되기까지가 과정을 그리는 한편, 자영을 향한 근태의 순정도 그 서사를 뒷받침해주는 큰 축이 된다. '쎄시봉 트리오'의 인기는 날로 높아져 마침내 방송 출연의 기회를 얻게 되지만, 자신을 배신하고 다른 사람과의 결혼을 선택한 자영 때문에 상심한 근태가 방송 당일, 노래할 이유를 잃었다는 편지를 남기고 사라진 것이다. 그 일을 계기로 세시봉 트리오는 해체되고 만다.

근태가 떠난 뒤, 트리오는 형주와 창식 두 사람만이 남아 '트윈폴리오'란 이름으로 활동하게 된다. 트윈폴리오는 '하얀 손수건-트윈 폴리오'이란 노래로 큰 인기를 끌게 되는 데, 그 가사는 근태와 자영의 이별을 담고 있다.

'헤어지자고 보내온 그녀의 편지 속에 곱게 접어 함께 부친 하얀 손수건'이란 가사는 지금의 감수성으로 보면 다소 촌스러울지 모르지만, 영화 안에서는 사랑하는 여자에게 배반당했으면서도 그녀를 원망하지 않는 근태의 지고지순함과 어우러져 더욱 아름답게 들린다. 다른 남자와의 결혼을 결심한 자영의 뒤로 흐르는 '웨딩 케이크-트윈 폴리오' 역시 자영의 집 앞에 결혼 선물로 웨딩 케이크를 놓고 돌아서는 근태의 뒷모습과 오버랩되며 보는 사람의 마음을 울컥하게 만든다.

 
극중 오근태(정우) 와 민자영(한효주)의 모습. 순박한 촌놈 근태와 쎄시봉의 뮤즈 자영의 우산신. 풋풋하고 싱그럽게 느껴진다.

▲ 극중 오근태(정우) 와 민자영(한효주)의 모습. 순박한 촌놈 근태와 쎄시봉의 뮤즈 자영의 우산신. 풋풋하고 싱그럽게 느껴진다. ⓒ 제이필름

 
"이제 밤도 깊어 고요한데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 잠 못 이루고 깨어나서 창문을 열고 내어다 보니 사람은 간 곳이 없고 외로이 남아 있는 저 웨딩 케익, 그 누가 두고 갔나 나는 아네."

영화 막바지에 이르면 분위기는 다소 어둡게 가라앉는다. 자영을 대마초 파동 연예인 명단에서 빼내기 위해, 친구들의 이름을 팔고 울먹이는 근태. 그 뒤, 근태는 친구들을 볼 낯이 없어 모든 연락을 끊고 조용히 사라진다. 그것이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자 친구들에게 속죄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

그렇게 세월은 흘러 친구들이 노년의 모습으로 마주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말없이 서로를 껴안는다. 모든 것을 용서하고, 청춘의 한 시절을 함께 견뎌낸 동지로서의 우정을 확인하는 세 사람의 모습에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 <쎄시봉>은 1960, 70년대 젊은 날을 추억하면서 즐거워하실 부모님을 떠올리면 절로 흐뭇해지는 영화이다. 내 부모님의 스무 살이 궁금하다면, 혹 내 부모님에게 그 시절의 향수를 선물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이 영화에 함께 빠져보자.
      
 
영화 '쎄시봉' 내 부모님의 스무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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