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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평등 정의'가 새겨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자유 평등 정의"가 새겨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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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범으로 지목당해 구속까지 됐던 10대들이 경찰의 불법 수사를 문제 삼아 제기한 국가배상금 청구소송에서 최종 승소했다. 하지만 이들을 대리한 박준영 변호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중학교 선후배였던 A, B, C, D군은 14~17세였던 2010년 7월, 지적장애가 있는 18세 E양을 성폭행했다는 혐의로 경찰 수사선상에 올랐다. 경찰은 이들의 진술 등을 바탕으로 2010년 10월 법원의 구속영장도 발부받았다. 하지만 주요 참고인은 물론 피해자도 말을 자꾸 바꾸자 네 사람은 20여일 만에 풀려난다. 이듬해 1월 사건 처리 결과도 '혐의 없음'이었다.

A군 등은 경찰이 부실한 기초수사를 바탕으로 미성년자인 자신들을 강압적으로 조사해 특정 답변을 요구하고, 질문과 답변을 바꿔 쓰거나 피의자에게 유리한 진술을 빠뜨리는 등 조서를 거짓으로 꾸며 구속에 이르게 했다며 2013년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보호자들도 A군 등이 구속되면서 재산적, 정신적 손해를 입었다며 소송에 동참했다.

1심 재판부(수원지방법원 민사합의10부, 재판장 설민수, 판사 최혜승 박수현)는 이 가운데 조서 부분만 국가 배상책임을 인정했다. 조사 과정을 녹화한 영상물과 경찰이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를 대조해볼 때, A군 등이 단답형으로 말한 부분의 문답 내용이 바뀌면서 마치 이들이 자발적으로 상세한 진술을 한 것처럼 조서에 쓰였다는 이유였다.

법원은 다만 경찰의 '실수'일 뿐, '조작'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또 경찰이 기초 수사를 부실하게 했고, 보호자나 변호인 등이 참여시키지 않는 등 적법절차를 지키지 않았다는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결과 A군 등에게는 각각 300만 원씩, 이들의 보호자들에게는 100만 원씩 국가배상금이 책정됐다.

이 판결은 2심(서울고법 민사5부, 재판장 배준현, 판사 이광영 유영선)에서도 유지됐고, 29일 대법원 2부(주심 박상옥 대법관)가 최종 확정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결은 사실상 최초로 수사기관의 피의자 신문조서 작성에서 직무상 의무 위반과 관련해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했다"며 "피의자가 소년 등 사회적 약자인 경우 수사과정에서 더욱 세심하게 배려할 직무상 의무가 있으며 이를 위반할 경우 국가배상책임이 발생한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고 설명했다.

박준영 변호사 "아쉽고 또 아쉽다"
 
영화 <재심>이 다룬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의 박준영 변호사.
 영화 <재심>이 다룬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의 박준영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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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박준영 변호사는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너무 아쉽다"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그는 "수사과정에서 피의자들이 받은 대우를 생각하면... 조서를 그렇게 멋대로 썼다면 다른 수사과정은 어땠겠냐?"고 반문했다.

A군 등은 조손가정이나 한부모가정이고 당시 정부가 지원하는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박 변호사는 소송에서 수사기관이 이 부분을 약한 고리로 생각하고 피의자들의 인권을 제대로 보호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박 변호사는 "경찰이 아이들이나 보호자를 대한 태도 같은 것을 언급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며 "좋지 않은 수사기법이 많이 동원된 사건인데, 경찰의 그런 태도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라고 본 1심 판결이 너무 기가 막혔다"고 했다. 이어 "항소심 때 판사에게 '본인 아들 또는 지인 아들이 그렇게 수사를 받았다면 (수사기관이) 이렇게 할 수 있었겠냐'고 했다"며 "그런 경찰의 책임까지 지적해서 항소하고 상고했는데 여러 가지로 아쉽다, 이렇게 끝낼 사건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박 변호사는 법원이 인정한 '고통의 값'도 문제라고 했다. 그는 "변호인은 잠깐 접견교통권을 침해 받아도 위자료가 200만 원"이라며 "자식이 억울한 수사로 한 달 가까이 구금돼 있었는데 보호자들이 인정받은 위자료는 100만 원이다, 어떻게 정신적 고통의 가격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냐"고 말했다. 또 "영상녹화물 등 녹취비만 500만 원 넘게 들었는데, 받은 금액은 소송비용도 못 된다"며 "대법원이 이 사건을 5년 동안 심리해서 특별한 뭔가를 해줄 줄 알았는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수사과정에서 살인자로 몰린 10대 가출청소년(수원 노숙소녀 살인사건), 지적장애인(삼례 나라슈퍼사건) 등을 변호한 경험이 있는 그는 이번 사건도 비슷한 사안으로 판단한다. 다만 박 변호사는 원인을 "제도의 문제로 보고 싶진 않다"고 말했다.

"이 사건 조사과정에서 변호인의 조력권이 없거나 영상녹화 등을 안 한 게 아니다. 제도가 형식적으로 운영되면 오히려 더 가혹할 수 있다. 수사는 피의자에 대한 이해가 우선돼야 한다. 수사 욕심 때문에 그게 막 무너질 수 있다. 죄인이라고 해도, 가정 환경에 문제가 있다고 더 과장되거나 허위자백이 안 나오게끔 살펴줘야 한다. 이 사건처럼 오해와 예단, 편견으로 수사했더라도 좀더 적극적으로 살펴보면 바로잡을 수 있다. 근데 어쨌든 많이 아쉽다."

태그:#법원, #박준영 변호사, #허위자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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