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 이야기는 전통적으로 한국 드라마에서 가장 인기있는 흥행 공식 중 하나로 꼽혀왔다. 불륜은 법의 영역을 떠난 지금도 여전히 도덕적 잣대에서는 한 가정을 파탄으로 몰아가는 사회적 금기로 여겨진다. 불륜남녀는 명백한 악역이라는 공론화가 가능해 시청자들을 하나로 뭉치게 만드는 효과가 있기에 주인공의 입장에 감정이입도 용이하다.

<아내의 유혹>, <밀회>, <아내의 자격>, < VIP >, <부부의 세계>등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세대를 아우르는 불륜 이야기의 매력은, 그 통속성을 넘어서 인간 본연의 내밀한 욕망과 이중성의 모순을 가장 입체적이고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소재라는데 있다. 연기하는 배우들에게 있어서도 감정의 진폭이 큰 불륜극 캐릭터를 소화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도전이다.

히어로물에는 흔히 빌런(villain·악당 혹은 괴짜라는 뜻)이라고 하는 악역 캐릭터가 등장한다. 보통 주인공과는 대립각을 이루면서 정반대의 가치를 지향하고 자신의 본능과 욕망에 더 충실한 빌런은 극을 이끌어가는 또다른 중심축이다. 어떤 면에서는 빌런이 히어로보다 훨씬 더 큰 존재감을 드러내는 작품도 많다.

불륜극에도 대부분 빌런이 필수적으로 존재한다. 1996년작 <애인>이나 2019년 <평일오후 세시의 연인>처럼 아예 주인공 자체를 불륜남녀로 설정하고 이들의 불륜을 아름다운 사랑 혹은 어쩔 수 없는 선택처럼 포장한 일부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작품에서 불륜남녀는 갈등을 유발하는 악역에 가까운 캐릭터다.
 
 JTBC 금토드라마 <부부의 세계>의 한 장면

JTBC 금토드라마 <부부의 세계>의 한 장면 ⓒ JTBC

 
어쩌면 불륜극에서 선한 주인공보다도 더 주인공같은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이러한 '불륜 빌런'들이다. 배우자를 배신하고 불륜을 저지르고도 오히려 당당한 뻔뻔함, 끊임없이 나쁜 계략을 써서 주인공을 궁지로 몰아넣는 교활함, 한편으로 자신이 남의 것을 먼저 빼앗은 원죄가 있기에 내 것도 언제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감 등 끊임없이 시청자들의 분노를 유발하고 궁금증을 자극해야하는 불륜 빌런들에 대한 몰입도가 곧 작품의 인기와도 바로 직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빌런들의 악한 행위나 행태가 시청자들에게 최소한의 개연성을 가지고 진정성 있게 전달되기 위해선 배우들의 상당한 연기력 또한 필수다. 

불륜극이 배출한 악역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를 만한 인물은 역시 2008년 SBS <아내의 유혹>에서 김서형을 스타덤에 올린 '신애리'다. 현모양처 구은재(장서희)의 남편 정교빈(변우민)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 살인교사, 절도, 협박공갈 등에 이르기까지 선을 넘은 신애리의 행각은 한국드라마에서 이전까지 보기 힘들었던 파격적인 '막장 불륜녀' 캐릭터의 표본을 정립했다.

매 에피소드마다 "민소희~~!"을 외쳐대며 성대결절이 걱정될 정도로 사자후를 뿜어내던 김서형 특유의 분노 연기는 지금까지도 종종 회자될 정도다. 이러한 신애리의 극악무도한 악행은 훗날 불륜녀에 똑같은 방식으로 되갚아주는 복수극을 더욱 통쾌하게 만들어주는 배경이 됐다.

캐릭터 자체가 지나치게 극단적이기는 했지만 신애리는 개인의 정체성 확인과 욕망실현을 위하여 사회적 신분상승에 집착하는 권력지향형 여성을 대변하는 캐릭터였다. 역대 한국드라마를 통틀어 여성 악역이 보여줄 수 있는 표현 수위와 고정관념을 뛰어넘었다는 점에서 단지 막장화된 악역으로만 정의할 수 없는 파격적인 캐릭터였음은 분명하다.

2007년 방송됐던 SBS <내 남자의 여자>에서는 김희애가 특유의 지적이고 우아한 이미지를 벗고 친구의 남자를 유혹하는 불륜녀 이화영 역으로 파격 변신하여 화제가 됐다. 정작 이화영에게 남편을 빼앗기는 천사표 아내 김지수 역은 당당하고 도도한 도시여성의 이미지가 강했던 배종옥이 맡으며 캐스팅이 뒤바뀐 게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

김수현 작가는 불륜을 미화하거나 자극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권선징악에 충실한 전개를 보여줬다. 남편의 외도에 상처를 받았던 지수가 아픔을 딛고 차츰 독립된 여성으로서의 자아를 찾아가며 홀로서기에 성공한 반면, 아내를 배신했던 홍준표(김상중)와 이화영은 가족과 사회의 냉대를 받으며 점점 고립되고 무너져가는 모습이 대조를 이뤘다. 당시 섹시한 화장과 헤어스타일로 무장하고 독설과 몸싸움도 마다하지않던 뻔뻔한 불륜녀를 연기했던 김희애가 13년 뒤 <부부의 세계>에서는 오히려 남편의 불륜에 복수를 결심하는 엘리트 여성 지선우 역할로 돌아온 것도 드라마 팬들에게는 재미있는 비교대상이 되고 있다.

최근에는 불륜 빌런의 캐릭터도 시대변화에 맞춰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단순히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구도를 벗어나 인물이 그렇게 '흑화'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나 캐릭터의 개연성에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다. 2019년 방송된 < VIP >의 경우, 주인공 나정선(장나라)이 남편이자 직장동료인 박성준(이상윤)의 내연녀가 회사 내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뒤 그 정체를 추적하는 미스터리극의 형식을 취했다.
 
 SBS 드라마 < VIP >의 한 장면

SBS 드라마 < VIP >의 한 장면 ⓒ SBS

 
극 초반에 여러 인물들이 의심을 받지만 불륜녀의 진짜 정체는 낙하산으로 들어온 신입사원 온유리(표예진)였다. 주인공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악역이라는 점이나 권선징악적 결말은 비슷하지만, 이전의 전형적인 불륜남녀 캐릭터들과는 결이 다른 묘사가 돋보였다. 아내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남편이나, 뻔뻔하고 세련되기보다 어딘가 어수룩한 불륜녀의 캐릭터는, 오히려 '악의 평범성'이라는 측면에서 시청자들에게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다는 평가도 있다.

심지어 JTBC <부부의 세계>에서는 불륜이 아예 개인이나 가정의 문제를 넘어서 가부장제나 사회 계급이라는 구조적인 문제와도 언제든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중심에는 주인공 지선우(김희애)의 남편인 이태오(박해준)가 있다.

한소희가 연기하는 여다경이 뻔뻔하고 당당한 불륜녀 캐릭터의 전형이라면, 이태오는 이른바 자기 모순에 익숙해진 위선자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바람둥이고 아내를 배신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라고 항변하는 이태오는 자기합리화에 빠진 것이 틀림없다. 불륜을 저질렀어도 최소한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내연녀에게 수동적으로 끌려가던 이전의 불륜남과는 결이 다르다,

이태오는 불륜을 포기하기보다 아내만 너그럽게 이해해주고 넘어가면 앞으로도 모두가 문제 없이 행복할 것이라고 착각하는 철저한 이기주의자다. 이처럼 겉보기에 부드럽고 젠틀한 매너 뒤에 감춰진 이태오의 한없는 이중성과 잔혹함이야말로, 오히려 불륜 그 자체보다 지선우의 트라우마와 복수극에 당위성을 불어넣는 강력한 연료로 작용한다.

굳이 물리적인 폭력이나 난폭하고 가시 돋친 대사가 없더라도 몇 마디의 함축적인 표현과 표정만으로 이태오가 얼마나 역대급 불륜 빌런인지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그만큼 김희애라는 베테랑을 상대로도 밀리지 않았던 배우 박해준의 연기 내공 덕분일 것이다. 달라진 시대 변화에 걸맞게 이에 맞서는 지선우도 복수의 수단으로 친구의 배우자와 맞바람을 피운다거나 병상의 시어머니에게 독설을 날리는 등 마냥 선한 인물로만 보기 어려운 안티 히로인에 가깝다.

악역은 단순히 '나쁜 사람'이 아니라 드라마에선 내러티브를 전개하는 갈등의 중심이자, 주인공과 대립적인 위치에서 자신만의 가치관과 명분을 지닌 인물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의 욕망과 신념을 지키기 위하여 벌이는 행동들이 설득력 있는 개연성을 가질 때 이야기가 주는 몰입도도 극대화된다. 가정, 직장, 사회 등 각 분야에서 현대인들의 숨겨진 욕망과 이중성을 대변하고 있는 불륜 빌런들이 유독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이유다.
불륜드라마 부부의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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