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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글은 읽을 때마다 열패감을 안긴다. 나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의 책 읽기와 글쓰기이기에. 하지만 그의 글만큼 내 읽기와 쓰기를 고양시키는 것도 없다. 그의 책을 모조리 읽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의 새 책 두 권이 동시에 나왔다.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와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독후감이다. 내가 아는 한 가장 독보적인 '독후감'이다.

 
정희진 지음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정희진 지음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 교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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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책 중 어떤 걸 먼저 시작할까 망설이다,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를 집어 들었다. 그렇게 결정한 것은 표지 때문이었는데,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쪽이 더 끌렸다. 이 표지의 여성이 더 고단해 보여서였을까. 두 책의 표지는, 이 책들이 여성의 글쓰기임을 전달하려는 의도를 충실히 달성하고 있다. 표지는 모두 여성이 글 쓰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엔 중년의 '백인' 여성이 모자를 쓰고 둥근 차탁에서 연필로 글을 쓰고 있다. 잠깐 짬을 낸 듯, 밖으로 나가려다 찰나의 영감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시간 빈곤자의 조급한 글쓰기일까. 긴박함이 배어 있다. 이렇게라도 기록해놓지 않으면 다시 쓸 수 없을지도, 어쩌면 이렇게 쪼개 쓰는 글이 그의 글쓰기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는 '백인' 소녀가 거의 몸을 엎드린 듯 차탁에 숙이고 잉크로 글을 쓰고 있다. 저렇게 불편해 보이는 자세로 쓸 수밖에 없는 것은 코르셋으로 조여졌을 그녀의 허리 때문일 터, 안쓰럽다. 그래도 쓴다. 어둑한 실내는 그의 일터일까. 일을 하다 혹은 마치고 짬을 내 펜을 들었을까.

아니면 모두 잠든 밤, 겨우 얻은 자기만의 고요를 틈 타 쓰고 있는 것일까. 시공을 가로지르며 몰입의 글쓰기를 하고 있는 두 여성, 그런데 모두 '백인'이다. '흑인' 여성에겐 이조차도 허용되지 않았을 박탈. 어떤 피부색을 가졌든, 어느 나이, 계급에 걸쳐있든, 오늘도 저들처럼 필사적으로 글을 쓰고 있을 여성들에게 뜨거운 응원을 보낸다.

촌철살인. 그의 글을 대신할 수 있는 말. 강자에게 칼끝을 겨눌 수 없는 약자의 유일한 무기는 글밖에 없기에, 그는 글로 강자의 허약하기 그지없는 허위라는 급소를 찌른다. 글쓰기의 고수를 천의무봉이라 하지만 정희진을 그렇게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그의 글쓰기는 글 한 편 한 편 문단 하나하나가, 얼마나 지독하고 치열하게 사유하는지를 통감하지 않을 수 없게 하기에, 그의 글을 속세를 떠난 신선의 유유자적한 그것으로 비유하는 것은 오히려 무례다.

진정한 글쓰기는 굽어보며 쓰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펼쳐지고 있는 파란만장한 차이의 정치학에 자신의 몸을 던져 싸우는 것, 더없는 노력이며 용기이기 때문이다.

"살아내는 대로 쓴다."

그의 이 말은, 글을 쓸 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관계의 역학이 몸의 현상과 감정들로 나타나 결국 글에 드러나지 않을 수 없음을 전달한다. 글쓴이와의 대화인 독서를 통해 끊임없이 속닥이며 공감하며 때론 경합하는 논점들은, 글을 읽거나 쓸 때의 나와 긴밀히 연동한다. 이를테면, 장애를 다룬 글을 읽어낼 때는 상상으로라도 장애라는 위치에 철저히 이입한다. 온갖 상상력이 동원된다.

애쓰지 않아도 글쓴이의 글에 이입되면, 연관된 상상은 영화 만화 등의 장면을 줄줄이 사탕처럼 엮어 내는데, 이때 읽는 이의 머릿속은 일대 광풍에 휩싸이는 형국이다. 그리고 책을 마치고 광풍이 잦아들면, 내 위치로 돌아온 나는, 내가 엮어낸 온갖 생각이 이들의 위치(정체성)에 얼마나 다가섰는가를 돌아보게 된다. 부끄럽게. 부끄러움을 포장하지 않는 용기만이 '입장의 동일함'에 겨우 다가선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글쓰기는 사회적 약자의 자기 재현이다."
 
"글쓰기와 여성학의 인식론, 방법론은 거의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문학은 언어의 역사이고, 여성주의는 언어의 역사가 형성된 과정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자명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개입된 권력관계를 질문한다면, 기존 여성주의를 포함해 세상의 모든 언어는 상대화의 붕괴(의미의 다변화)의 운명을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여성주의와 글쓰기 공부는 별개의 실천이 될 수 없다."(15,6)

몇 년 전 그의 글쓰기를 흠모하던 나는 그의 강의를 쫓아갔다. 시간이 나서 간 것이 아니라, 정말 쫓듯이 갔다. 놓칠까 봐. 강의는 충격적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많은 것을 알고 풀어낼 수 있단 말인가. 강의의 빼어남은 그의 언설이 현란해서가 아니라, 대상화하지 않는 언어, 직면하는 자아에 있었다.

저명하다는 인사들의 강의를 듣고 나올 때마다 왜 그렇게 갈급이 났는지 그때 깨달았다. 그들의 강의는, 자기는 누락시킨 채 딴 사람 끌어들이기, 즉 박제된 타인의 삶을 자기 것처럼 제시하고 있었다.

물 없는 급유기로 물 대는 시늉을 하는 무의미하고 무책임한 말잔치였다. 자기를 숨기는 비겁하고 박제된 언어의 장에서는 공명이 생길 수 없다. 정희진의 언어가 공명하는 까닭은 세상이라는 울림통으로 자신을 기꺼이 통과시키기 때문이다.

그는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에서 페미니즘과 당파성이 자신의 글쓰기의 핵심이라고 전한다. 강의에서도 같은 말을 했다. 위선과 허위가 성공하는 세간에선 거리껴할 페미니즘과 당파성. 페미니즘을 장착하지 않았다면 남성의 언어로 쓰여진 그 숱한 책들의 역사에 어떻게 다른 질문을 던질 수 있겠는가. 여성을 지배해온 은폐된 남성 권력에 대해 당돌히 질문하지 않는다면, 글쓰기와 읽기는 그대로 받아쓰기, 재생산에 그치고 만다. "글은 아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버리는 과정이다."

"누구나 지니고 있지만 드러내지 않거나 부정되는 당파성."

말 그대로 부분성인 당파성은 누구나 탑재하고 있다지만, 인식의 부재는 우리를 언제나 보편적인 존재로 환원시킨다. 그냥 여성, 그냥 청년, 그냥 노동자라고 퉁치지만, 그 내부엔 수많은 차이와 부분이 존재한다.

여성, 청년, 노동자는 절대 하나의 여성, 청년, 노동자가 될 수 없다. 이것을 지우려 할 때, 혹은 하나로 통합하려 들 때, 폭력과 부정의가 발생한다. 그래서 당파성을 드러내는 글쓰기는 고도로 정치적이며 윤리적인 글쓰기일 수밖에 없다.

그의 강의를 들을 때쯤 나는, 악전고투로 글쓰기를 본격화하던 때라, 그의 조언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내가 왜 글을 쓰려고 했는지도 그리고 어떤 태도로 글을 써야 하는지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는 나에게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스승이다.

페미니즘을 공부하지 않았더라면, 사회가 주조한 온갖 이데올로기와 규범을 숨 막히는지도 모르고 수행하다 순직했을 것이다. "내게 '여성'은 고통이자 자원이다"라는 말의 의미와 가치가 죽비처럼 각인된다. 가부장의 늪에서 건져 올려준 그에게, 페미니즘에 감사한다. 내게 질문할 수 있는 힘과 글 쓰는 힘을 주었다.

그는 머리말에서 글을 팔아 생계를 이었던 메리 울스턴 크래프트를 환기한다. 시간에 쫓겨 더 나은 글을 쓰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 그를 자신과 동일시하며, 매문(賣文)으로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집필 노동자의 고뇌도 숨기지 않는다.

매번 시간 부족으로 더 정교한 글을 쓰지 못하는 자신을 채찍질하는 모습에서 그가 철저한 노동자임을 알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 독립 연구자'로서 매문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나는 매일매일 글의 수위를 놓고 나 자신과 사회와 협상을 거듭한다."

그의 글쓰기가 넓고 깊은 독서와 동일 선상에 있다는 것은, <나를 알기 위해 쓴다>에서 그가 읽은 책 목록을 보면 알 수 있다. 목록 중 어떤 책은 읽다 해독할 수 없어 고이 접은 것도 있다. 다시 읽을 생각은 없다. 다시 읽는다 해도 '정희진처럼 읽기'는 되지 않기에. 목록 중 내가 읽은 것은 불과 몇 권인데, 같은 책을 읽고 사유의 폭과 깊이와 결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것에 또 충격이고 감동이다. 읽기와 쓰기에 더 정진할 연료를 얻는다.

그의 목록 중 가장 흥미로웠던 책은(책이 흥미로운 게 아니라 그의 선택이 흥미로웠다) <복기>였다. 이창호가 쓴 바둑책이다. 바둑을 하나도 모르면서 바둑책을 읽는 그가 흥미롭다. 전혀 모르는 분야의 독서에 자신을 이입시키는 과정과 글쓴이의 당파성을 움켜쥐는 능력이 바로, 그의 책 읽기와 글쓰기의 진수다.

복기의 과정을 "유일하게 패자가 승자보다 더 많은 것을 거둘 수 있는 시간"이라 인용하며, "호모 파베르의 가장 '우수한 인성'이라 정의할 수 있는 그의 탁월함이 사무치게 부럽다. 보다 나은 인간이 되려는 모든 노력이 '복기'의 과정이며, '우수한 인성'에 도달할 수 있는 통로임을 깨우친다.

책을 마치고 독후감 책 목록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책을 골랐을 그의 일관성을 감지한다. 주류의 생각과 관성적인 삶에 돌직구를 던지는 책들. 책의 질문을 온 몸으로 받아내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다. 책을 제대로 껴안으면, 필연적으로 상처받고 고통당한다. 하지만 그 고통을 통과하면 예리한 위로가 깃든다.

위로는 누가 주는 것이 아니다. 깨닫는 것이다. 정희진이 한 말이다. 나는 잠언처럼 새기고 있다. 깨달음을 미루면 삶은 쉽게 익숙해진다. 안락함 속으로 번득임이 들이닥칠 수는 없다. 인생이 권태롭다면, 이 때문이다.
 
정희진 책,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전 2권.
 정희진 책,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전 2권.
ⓒ 교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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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 게시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정희진 (지은이), 교양인(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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