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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핀란드 대사로 재직 당시 김평일의 모습.
 1994년 핀란드 대사로 재직 당시 김평일의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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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혈통이 외국에 나갔다는 건 버려진 것을 의미한다. 지금 김평일이 북한에 돌아간다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김평일은) 북한에 가서도 제한된 구역에서 제한된 사람들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평양고위급 간부 출신 이탈주민 A씨

'백두혈통 곁가지'는 왜 귀국해야 했을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숙부인 김평일 전 체코대사와 고모부인 김광섭 오스트리아 대사를 교체하고 북한으로 소환했다. 북한의 로열패밀리를 모두 북한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이들은 북한의 '백두혈통'이면서도 '곁가지'로 분류되는 인물이었다.

북한 외무상은 14일 2015년부터 체코 대사를 맡았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이복동생 김평일의 후임으로 외무성 '유럽통'인 주원철을 임명한 사실을 공식 확인했다. 2019년 11월 국가정보원이 파악한 김 전 대사의 평양복귀설이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어머니의 권력이 사라지자...

김평일 전 대사는 한때 김일성 주석의 후계자 후보로 점쳐졌던 인물이다. 하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1988년 이후 헝가리·불가리아·핀란드·폴란드·체코 대사로 떠돌았다. 지난해 북한으로 귀국했으니 30여 년 해외를 전전한 셈이다.

한때 '후계자'로 꼽혔던 그는 왜 북한을 떠나야 했을까? 그의 행로는 김일성 주석의 아내이자 김 전 대사의 어머니인 김성애와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김성애는 1952년부터 김일성의 공식적 아내 역할을 했다. 앞서 1949년 사망한 김정일 위원장의 어머니인 김정숙 이후 김일성 주석이 맞이한 두 번째 부인이다. 1963년 식을 올리고 자기 아들인 김평일 전 대사가 후계자가 되도록 노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성애 역시 권력을 누렸다. 그는 1970년 조선민주여성동맹(아래 여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에 올랐다. 여맹은 북한의 대표적 여성단체로 여성해방이라는 명분 아래 만들어진 사회단체다. 노동당의 외곽단체로서 주로 직장생활을 하지 않는 전업주부들을 가입 대상으로 삼았다.

김성애가 여맹 위원장에 올랐을 당시 김일성 주석도 그에게 힘을 실어준 것으로 보인다. 당시 북한에서 '김성애 녀사(여사)를 따라 배우자'라는 운동이 있었다는 말도 나왔다. 이상근 국가안보전략연구원(전략연) 연구위원은 "김일성이 김성애 말을 내 말처럼 여기라고 했다, 그건 엄청난 권력"이라고 말했다.

김성애의 힘은 그의 호칭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북한 매체는 1974년 김성애를 '존경하는 여사'라고 칭했다. 북한에서 지도자의 아내에게 이 호칭을 붙인 것은 김성애가 처음이었다. 이후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아내 리설주 여사는 김성애 이후 40여 년 만인 2018년 이 호칭이 붙었다.

김성애의 남동생 김성갑의 위세도 대단했다. 그는 평양시 당 책임비서(우리로 치면 평양시장)이었다. 북한의 수도이자 권력과 부의 상징인 평양에서 전권을 누린 셈이다.

김평일 전 대사가 후계자에 이름을 올린 것도 이때다. 게다가 그는 김일성 주석과 풍채·인상이 비슷해 김 주석을 떠올리게 한다는 평이 많았다. 이상근 연구위원은 "김평일이 군에 있던 모양인데 성격도 모질지 않고 품성이 괜찮아 이미지가 나쁘지 않다고 들었다"라며 "무엇보다 김일성을 쏙 빼닮았으니 북한사람들에게는 호감이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북한으로 귀국, 큰 의미 없어"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29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가 진행됐다"면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사진을 1면에 게재했다. 신문은 "정치국 확대회의에서는 세계적으로 급속히 전파되고 있는 비루스(바이러스) 전염병을 막기 위한 국가적인 초특급 방역조치들을 더욱 철저히 취하고 엄격히 실시하는데서 나서는 문제들에 대한 토의가 진행되었다"고 밝혔다.
▲ 북 김정은, 정치국 획대회의 참석... "코로나19" 논의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29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가 진행됐다"면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사진을 1면에 게재했다. 신문은 "정치국 확대회의에서는 세계적으로 급속히 전파되고 있는 비루스(바이러스) 전염병을 막기 위한 국가적인 초특급 방역조치들을 더욱 철저히 취하고 엄격히 실시하는데서 나서는 문제들에 대한 토의가 진행되었다"고 밝혔다.
ⓒ 평양 노동신문=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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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김평일의 후계자설은 '찰나'에 그치고 말았다. 김성애의 동생 김성갑의 비리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김일성 주석은 김성애와 측근들의 비위 사실을 보고받았다고 전해진다.

김성갑은 그의 측근과 함께 숙청당했다. 김성애 역시 대외 행사에 나오지 못하는 근신 처분을 받았다. 이후 1974년 2월, 김정일 위원장이 노동당 중앙위 정치위원에 올랐다. 김정일 위원장에게 '친애하는 동지' '당 중앙'이라는 호칭이 붙었다. 후계자가 된 것이다.

김성애의 권위는 사라졌다. 북한 매체에서도 김성애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김평일 전 대사의 해외유랑이 시작됐다. 어머니와 삼촌이 받은 처분이 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북한 이탈주민들은 김평일 전 대사가 "권력에서 밀려난 후 외국으로 쫓겨났다"라며 "북한에서는 당연한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북한 고위급간부 출신의 A씨는 "김일성의 직계후손인 그가 북한에 있으면 어떤 직책을 맡아야 한다, 낮은 직책을 맡을 수는 없지 않겠느냐"라며 "그렇게 되면 인맥이 생기고 파워가 생긴다, 김정일은 그걸 견제하는 것"이라고 짚었다. 결국, 해외로 보내서 북한주민들에게 '잊힌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1970, 1980년대 생 북한 이탈주민들은 '김평일이 알려진 사람이 아니다'라고 입을 모았다. 1970년대 생으로 평양에서 탈북한 B씨는 "김평일은 보통 사람들은 잘 모르는 존재"라면서 "아는 사람이 있어도 김평일이 쫓겨나 안타깝게 생각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관심이 없는 존재"라고 말했다.

김형덕 한반도평화번영 연구소 소장은 "북한에서 70대 이상이 돼야 김평일의 존재를 알 것"이라며 "해외에서 30년을 보냈다는 건 북한에 뿌리가 없다는 것과 같다"라고 설명했다.

이는 김평일 전 대사의 귀국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분석으로 이어진다. 김평일 전 대사가 30여 년 해외생활로 인해 북한의 인적·물적 자원 없이 혈통만 있는 '허수아비'라는 주장이다.

이상근 전략연 연구위원은 "김평일은 지금 북한에서 아무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다, 김일성 아들인데 외국에서 죽게둘 수는 없으니까 북한에 불러들인 것"이라고 봤다. 이어 "김평일 전 대사가 설사 북한에서 공식 직책을 맡는다고 하더라도 큰 의미가 없다"라고 부연했다.

태그:#김평일, #김정은,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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