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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봄에 움을 틔우기 위해 기다리는 초목의 살갗위에 3월의 비가 촉촉하게 내렸다.
비내리는 날 서울 금천구에 있는 호압사를 찾았다. 호압사 입구에서부터 길이 매우 가팔라 숨이 턱에 찼다. 경사진 길을 따라 좀 더 올라가니 길이 끝나는 지점에 아담한 절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가 호랑이 꼬리인가 보구나.

전통사찰 제15-1호로 등록된 호압사는 비보(裨補)사찰로서 조선건국시기에 (1393년(조선태조 2년)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압사에 관한 자료에 의하면, 호압사가 창건된 배경에 대한 두 가지의 유래가 전해지고 있다.

그 하나는<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금천조에 지금의 시흥군 현감을 지냈다는 윤자(尹滋)의 이야기다. 이 기록에 "금천의 동쪽에 있는 산의 우뚝한 형세가 범이 걸어가는 것과 같고, 그런 중에 험하고 위태한 바위가 있는 까닭에 범바위(虎巖)라 부른다. 술사가 이를 보고 바위 북쪽에다 절을 세워 호갑(虎岬)이라 하였다"라고 하고 있다.

 
 호압사약사전(사진=CPN문화재TV심연홍기자)
 호압사약사전(사진=CPN문화재TV심연홍기자)
ⓒ 심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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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이야기는 1394년을 전후하여 이태조가 무학대사의 조언으로 조선의 도읍을 서울로 정한 후 궁궐을 짓는 과정에서 일어난 내용을 전하고 있다. 태조가 궁궐을 지을 때 일이 진척됨이 없고 밤이 되면 무너지기를 반복하였다.

어느 날 밤 태조의 꿈속에서 반은 호랑이고 반은 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괴물이 나타나더니 눈에서 불을 내뿜으며 지어놓은 건물을 들이받으려고 하였다. 괴물을 향해 화살을 빗발같이 쏘아댔으나 괴물은 아랑곳 하지 않고 궁궐을 무너뜨리고는 사라졌다.

태조가 침통한 심정으로 침실에 들었을 때,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한양은 비할 데 없이 좋은 도읍지로다" 라며 손가락으로 멀리 한강 남쪽의 한 산봉우리를 가리켰다. 노인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호랑이 머리를 한 산봉우리가 한양을 굽어보고 있었다.

노인이 방도를 알려주기를 "호랑이란 꼬리를 밟히면 꼼짝 못하는 짐승이니 호랑이 형상을 한 산봉우리의 꼬리부분에 절을 지으면 만사가 순조로울 것입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태조는 무학대사의 도움을 얻어 이곳에 절을 지었고 이름을 호압사(虎壓寺)라고 하였다.

호랑이는 거대하고 꼬리는 길었다. 사찰 아래로 구불구불 호랑이꼬리(길)가 길게 이어졌다. 호랑이 머리 방향에 해당하는 사찰 위쪽 산 역시 상당히 높아보였다. 호압사는 풍수지리와 비보사찰을 목적으로 창건되었음이 이해가 되었다.

 
 약사전(사진=CPN문화재TV심연홍기자)
 약사전(사진=CPN문화재TV심연홍기자)
ⓒ 심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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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호랑이는 영험한 동물로 받아들여 산령(山靈), 산군자(山君子) 등으로 숭배되었고 민간에서는 잡귀를 물리치고 액운을 막아주는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한 국가를 세우는데 있어 호랑이의 용맹한 기운은 방해로 작용되었던 듯하다.

약사전 앞에 수령 500년인 거대한 두 그루의 느티나무가 호압사의 역사를 묵묵히 전해준다.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는 몸체의 반 정도를 시멘트로 덧대고 있어 세월의 무거움이 절로 느껴졌다. 호압사를 찾아 험한 길을 힘겹게 올라왔을 서민들에게 시원한 바람과 그늘을 선사했을 두 그루의 보호수가 오래도록 건강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호압사 약사전에는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된 석불좌상(약사불) (石佛坐像(藥師佛))이 있다. 양 손을 앞으로 모아 붉은색의 약그릇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약사여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약사여래불은 과거세에 약왕(藥王)이라는 이름의 보살이었다.

중생의 아픔과 고통을 소멸시키기 위한 12가지 대원(大願)을 세우고 수행하여 부처가 되었다. 약사여래불은 아픈 이들이 특히 즐겨 찾는 부처이다. 중생들의 질병을 치료하고 재난을 소멸시키며 수명을 연장하는 것은 물론 음식, 의복 등을 충족하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석약사불좌상(사진=CPN문화재TV심연홍기자)
 석약사불좌상(사진=CPN문화재TV심연홍기자)
ⓒ 심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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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불좌상(약사불)의 왼팔 옷 주름, 가슴의 띠 매듭, 체구의 표현 등으로 봐서 조선 전기 불상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조성연대를 16세기로 추정한다. 사찰 관계자인 김혜나 씨는"호압사 창건은 14세기로 석불좌상 조성연대와 차이가 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다만 어느 시기인가 잃어버렸던 석불좌상을 찾아서 다시 모셨다는 얘기를 노보살님들로부터 들었다" 고 전했다.

14세기이든 16세기이든, 조선시대에도 전염병 등 기타질병으로 많은 사람이 어려움을 겪었을 터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전염병 관련기사는 1455건이나 되며, 1392년부터 1917년까지 발생 횟수가 연평균 2.73회나 된다는 연구가 있다고 한다.

질병과 재난이 닥칠 때 사람들은 약사여래불을 찾아 기도를 올리며 몸과 마음을 치유했을 터이다. 치료약을 구하기 어려운 서민들에게 약사여래불은 특히 구원의 상징이 아니었을까.
 
 산수유가지에빗방울이 영롱하다(사진=CPN문화재TV심연홍기자)
 산수유가지에빗방울이 영롱하다(사진=CPN문화재TV심연홍기자)
ⓒ 심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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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전에서 나오니 자작자작 내리던 비가 방금 걷힌듯했다. 노란 산수유가지 끝에 걸린 작은 빗방울들이 투명하고 예쁘다.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물방울들이 약사불의 묘약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본다.

온 세계가 코로나19로 비상이다. 시민들의 일상이 사라졌다. 가족을 만나는 것도 경계해야 하고 만나더라도 마스크를 착용하고 사회적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대충교통 이용도 불안하며, 지인과 함께 카페에 들러 소소한 대화를 즐기는 여유도 사라졌다. 일상의 소소함이 사실은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던가를 절실히 깨닫는 요즘이다.

산수유가 더 활짝 피기 전, 호압사 약사여래불이 코로나19를 말끔히 거두어가 주셨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며 호압사를 나왔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CPN문화재TV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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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N문화재TV 심연홍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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