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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방학에는 뭘 하고 놀까?'

매번 어린이집 방학 때마다 아이들이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아무 생각 없이 어영부영 보냈었다. 하지만 이제 아이들도 자라서 올해로 큰 애가 6살, 작은 애가 5살이 됐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조금만 걸어도 힘들다고 안아 달라 칭얼대던 아이들이 이제는 제법 다리에 힘이 생겼는지 내 손을 잡고 신나게 잘 걸어 다닌다.

이번 방학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가까운 곳부터 천천히 다녀보면 좋겠다 싶어, 방학 열흘 전부터 부지런히 계획을 세웠다. 아이들과 함께 가기 좋은 도서관과 근처 놀이터, 맘껏 뛰어놀 수 있는 넓고 쾌적한 공원까지 직접 돌아다녀 보며 동선까지 꼼꼼히 메모해 두었다.

횟집 앞을 지날 때마다 수족관 속 물고기들을 한참 동안 넋 놓고 바라보던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라, 집 근처 어시장에 아이들과 구경 가는 것도 목록에 추가했다. 그동안 아이들이 너무 어려서 하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씩 시도해 보고 싶었다. 이번 방학을 앞두고는 어쩌면 아이들보다 내가 더 설렜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의 방학 하루 전부터 코로나19의 확산 속도가 심상치 않았다. 아이들이 방학하는 금요일(2월 21일)에는 경남 지방에 확진자가 나왔다는 기사가 떴다. 그러더니 다음날(2월 22일)에는 내가 사는 창원에도 확진자가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날 오후 '코로나19 발생으로 창원시의 모든 도서관이 임시 휴관한다'는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하루아침에 물거품
 
2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개학이 연기된 서울 서대문구 한 유치원에 내걸린 입학 축하 메시지가 눈에 띈다. (해당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며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사진입니다.)
 2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개학이 연기된 서울 서대문구 한 유치원에 내걸린 입학 축하 메시지가 눈에 띈다. (해당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며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사진입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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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계획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휴대폰으로 확인하던 날씨 대신 코로나19 소식을 제일 먼저 검색하게 됐다. 날씨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확진자 수는 매일 수백 명씩 늘어났고, 이제 대한민국에서 코로나19로부터 안전한 지역은 사실상 단 한 군데도 없게 됐다. 스마트폰은 하루에도 여러 차례 긴급재난문자 알림이 울려댔다.

창원시 성산구에 사는 친구에게 카카오톡 메시지가 왔다. '아침에 간단히 장을 보러 집 앞 슈퍼마켓에 갔더니 쌀이며 달걀이며 뭐 하나 남아 있는 게 없더라'고. 주문하면 다음 날 집 앞으로 배송된다는 온라인 마켓도 오후 2~3시경에 대부분의 물건이 품절됐다. 아직 우리 집 앞 슈퍼마켓에는 필요한 식료품들이 꽤 남아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이들 방학 기간에는 냉장고를 가득 채워 놓아도 하루가 다르게 텅텅 비곤 하는데, 이번에는 장도 마음 편히 볼 수 없으니 걱정이었다. 외식도 배달음식도 꺼려졌다. 삼시 세끼 아이들 밥을 해 먹이느라 하루가 다 갔다. 식사 준비를 하고, 먹이고, 치우고, 간식을 내어주고, 또 다음 끼니를 걱정하고, 어제와 오늘이 똑같고, 내일도 오늘과 똑같겠지.

2월 25일 화요일, 창원시 유치원 방학 기간이 일주일 더 연장됐다는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방학하고 사나흘 동안은 아이들도 집 안에서 잘 놀았다. 낮잠도 안 자고, 집에 있는 온갖 장난감들을 다 쏟아서 놀고, 주방까지 침범해 밥그릇이며 국자며 잔뜩 꺼내 소꿉놀이를 하고, 이불을 끌며 온 방 안을 누비며 노느라 지루할 틈도 없어 보였다. 아이들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어질러진 집안을 치우느라 나만 진이 빠졌다.

닷새쯤 지나니까 아이들도 이제 집에서 노는 것이 지겨워진 눈치다. 왜 아니겠는가. 어른인 나도 이렇게 답답한데, 한창 뛰어놀 나이인 아이들은 얼마나 답답할까. 결국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마스크를 착용하고 놀이터로 나갔다. 놀이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놀이터를 보고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도 "우와! 아무도 없어요! 우리 마음대로 놀 수 있겠다!" 하며 신나게 그네도 타고, 미끄럼틀도 타며 놀았다.

그런데 이제 그마저도 못하게 됐다. 오늘(3월 2일)도 날씨가 화창해서 아이들과 놀이터에 갔더니 놀이터 주위에 '접근 금지' 테이프가 둘러져 있었고, '코로나19 감염병 예방 위해 놀이터 운동장 등을 임시 폐쇄합니다'라는 안내문과 함께 있었다.

놀이터 간다고 신나서 뛰어가던 아이들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놀이터에도 못 간다니… 정말 너무해! 나 화가 나려고 해! 정말 억울해! 코로나 바이러스 정말 나빠!"  

내일은 모두가 조금씩 더 나아지기를
   
하루 종일 아이들과 집에 콕 박혀 지내면서 밥해 먹이랴, 청소하랴, 뒤치다꺼리하랴, 혼이 나갈 지경이지만 지금 이 시간이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이들과 며칠 붙어 지냈더니 그새 딸들과 부쩍 친해진 것 같은 기분이다. 온종일 지지고 볶고 투덕거리고 끌어안고 지내다 보니 서로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나 보다.

매일 한 가지씩 아이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가르치고 있다. 하루는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먹는 법을 가르치고, 또 하루는 식사 후 빈 그릇을 싱크대에 가져다 놓는 법을 가르친다. 어제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본 후에 뒤처리하는 법을 알려주었고, 오늘은 백 다음의 숫자 세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내가 그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그런 사소한 것들뿐이지만, 딸들은 나에게 더 위대한 것들을 가르쳐준다. 사소한 것에 기뻐하기, 작은 일에도 고마워하기, 숨 쉬듯 사랑한다 말하기, 싸우고 나서도 금세 화해하기, 의심하지 않기, 좋으면 안아주기, 넘어져도 씩씩하게 다시 일어서기 같은 것들. 나는 딸들에게서 인생을 다시 배우는 중이다.

여전히 하루에도 수백 명씩 확진자가 늘고 있고, 아직까지는 상황이 종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러다가 방학이 더 연장되는 건 아닐까, 걱정하던 중에 들려오는 새로운 소식 하나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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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늘어나는 확진자 수만큼 고맙고 따뜻한 마음들도 늘어나고 있음을 알기에 이 상황이 그리 절망적이지는 않다.

당연했던 일상이 고작 바이러스 하나로 쉽게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 모두의 하루가 무사해야 나의 하루도 무사할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이 어려운 시기를 무사히 살아내면 내 마음도 조금은 더 단단해질까. 작고 소중한 것들을 더 아끼고 보살피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오늘도 내 이웃의 고군분투를 염려하고 또 응원하며 내일은 모두가 조금씩 더 나아지기를 염원해 본다.  

놀이터로 뛰어가는 아이들 뒤로 나무들은 성실하게 봄을 준비한다.
 놀이터로 뛰어가는 아이들 뒤로 나무들은 성실하게 봄을 준비한다.
ⓒ 박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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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코로나19, #달라진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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