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3 15:47최종 업데이트 20.03.03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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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질병이라는 우울증. 그만큼 우리는 우울감이 보편화된 시대에 산다. 어느 시대든 인간이 우울하지 않았겠느냐만, 누구나 자기 발톱에 박힌 가시가 제일 아프기 마련이다. 우울증이 현대인의 전유물이라는 얘기는 그런 맥락에서 착각일지도 모른다. 설사 그렇더라도 어쩌겠는가. 지금 이 순간 내가 제일 우울한 것을.

"네가 만약...... 괴...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 줄게......"


2011년 MBC <나는 가수다>에서 임재범은 이 노래로 전 국민의 마음을 적셔주었다. 외부로부터의 감각 자극이 크나큰 위로가 될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라 하겠다.

임재범의 노래가 청각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보듬어줬다면, 술은 후각과 미각을 통해 우리를 달랜다. 이래저래 괴로운 날. 포장마차에서 닭똥집 한 접시 시켜놓고 빈속에 들이키는 쓰디쓴 소주 한 잔은 퇴근길 직장인에게 큰 위로이자 안식이다.

반면 와인의 이미지는 그동안 사뭇 달랐다. 그윽한 조명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잘 차려입은 전문직 종사자가 누군가를 기다리며 테이블에 앉아 있다. 곧 도착할 지인, 그리고 서빙될 코스 요리에 대한 기대감에 젖어 글라스 와인의 향을 천천히 음미한다. 뭐 대충 이런 이미지? 사회 구성원의 다수에게는 이래저래 낯설고 부담스러운 장면인데, 거기서 '위로'라는 보편적이고 통속적인 키워드를 발견하기는 어려웠을 테다.

하지만 2019년 이마트 주류 매출에서 와인이 국산맥주, 수입맥주, 소주를 누르고 1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사회 분위기가 바뀌었다. 와인은 더이상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상류층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바에서 혹은 집에서 혼와인을 즐기는 인구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술을 통해 위로를 받으려 할 때 꼭 '포장마차에 소주'라는 전형적인 형식을 띨 이유는 없어졌다. 내장기관을 훑어내리는 쓰디쓴 소주가 친한 벗의 격려성 등짝 스매싱 같은 것이라면, 와인은 잠자코 내 하소연을 들어주는 심리상담사의 진중한 침묵과 같달까.

말 잘 들어주고 가성비까지 좋은 심리상담사 셋을 소개한다. 선정 기준은 오롯이 내 후각과 미각이다. 협찬 전혀 없이 직접 구입해서 사 마셨다. 가장 주관적인 것이 가장 객관적일 수 있음을 믿으며 주저함 없이 추천한다.

카스텔포르테 발폴리첼라 리파소(Castelforte Valpolicella Ripasso)

우울할 땐 칩거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냉동실에 꽝꽝 얼어 있는 만두를 꺼내 끼니를 때우기 마련이다. 그때 필요한 와인이 카스텔포르테 발폴리첼라 리파소다. 냉동 만두와의 궁합이 기가 막히기 때문이다.
 

카스텔포르테 발폴리첼라 리파소(Castelforte Valpolicella Ripasso) ⓒ 고정미

 

카스텔포르테 발폴리첼라 리파소 냉동 만두와의 궁합이 기가 막히다. ⓒ 임승수

   
카스텔포르테Castelforte는 와인 회사명, 발폴리첼라Valpolicella는 이탈리아의 와인 생산지, 리파소Ripasso는 고급 와인인 아마로네Amarone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를 재탕해 만든 와인이다. 그래서 빈자의 아마로네라고 불리기도 한다. 세상 우울한 찌꺼기인 나(우리)에게 딱 맞지 아니한가. 마트에서 할인가 2만 원 내외로 구입 가능하다.

적당히 달궈진 프라이팬에 샛노란 아보카도 오일을 두른다. 얇게 도포된 진득한 기름 위에 (개인적으로 최고의 냉동 만두라 생각하는) 납작지짐만두를 올려놓는다. 이쪽저쪽 뒤집으며 적당히 그을어지면 만두피가 찢어지지 않게 접시 위로 살포시 옮긴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납작지짐만두를 한 입 베어 문 후 리파소를 한 모금 들이키자. 기름진 만두와 적당하게 신맛 나는 와인의 어우러짐에 긴급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행색은 초라하나 뛰어난 연주를 들려주는 버스킹 느낌이랄까.

맛의 이중주를 음미하다 보면, 우울한 냉동만두도 특정 와인과 조우했을 경우 나에게 큰 위로가 됨을 깨닫는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유지태가 최민식에게 군만두뿐만 아니라 리파소까지 넣어줬다면 영화는 희극으로 끝났으리라.

포제리노 키안티 클라시코(Poggerino Chianti Classico)

우울한 음식이라면 배달 피자를 빼놓을 수 없다. 무력감에 꼼짝도 하기 싫은 날. 어김없이 배달 피자를 주문하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익숙한가. 여느 때처럼 피자만 우걱우걱 씹어대면 우울감은 더욱 깊어질 뿐이다. 이때 거짓말처럼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와인이 포제리노 키안티 클라시코다.

 

포제리노 키안티 클라시코(Poggerino Chianti Classico) ⓒ 고정미

포제리노 키안티 클라시코 피자와의 궁합이 예술이다. ⓒ 임승수


   
포제리노Poggerino는 와인 회사명, 키안티 클라시코Chianti Classico는 이탈리아 키안티 지역의 산지오베제 품종으로 만든 괜찮은 품질의 와인을 일컫는다. 마트에서 2만 원대의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다. 이 와인은 <와인 스펙테이터>가 선정한 2013년 가성비 와인 TOP100 중 당당히 18위를 차지했다.

이마트 영등포점 매장 직원의 추천으로 구매했지만, 처음에는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산지오베제 품종 와인은 신맛이 튀어 내 취향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 키안티 특유의 신맛을 '앙상한 신맛'이라고 부른다. 여타 풍미가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아내는 나와 달리 키안티 와인의 신맛을 즐긴다).

그런데 포제리노 키안티 클라시코는 내 예상과 달리 꽤 살집이 있는 신맛을 보여주었다. 무엇보다도 피자와 너무 잘 어울리는 것 아닌가. 느끼한 치즈가 올라탄 텁텁한 피자 빵이 이 와인과 만나 들려주는 하모니는 놀라웠다.

간만에 대한민국에서 모국(이탈리아) 친구를 상봉하고 반가움에 못 이겨 함께 부르는 칸초네 같다면 호들갑이려나? 배달 피자의 격을 이렇게나 끌어올리는 와인의 힘이 새삼 놀랍다. 구강 속에서 흘러나오는 유쾌한 칸초네 덕에 우울감은 급속히 사라진다.

도멘 생 미셸 브뤼(Domaine Ste. Michelle Brut)

극도로 우울할 때는 먹는 것도 귀찮아진다. 그저 손에 잡히는 대로 팝콘이나 감자칩, 크래커 등을 우적우적 씹으며 멍한 얼굴로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이 지경으로 입맛이 떨어졌다면 미국산 스파클링 와인인 도멘 생 미셸 브뤼를 추천한다. 도멘 생 미셸Domaine Ste. Michelle은 와인 회사명, Brut는 달지 않은 스파클링 와인이라는 의미다. 마트에서 할인가 2만 원 정도의 가격으로 구매 가능하다.

 

도멘 생 미셸 브뤼(Domaine Ste. Michelle Brut) ⓒ 고정미

 

도멘 생 미셸 브뤼 팝콘, 스시롤, 생선회, 그러니까 아무거나 잘 어울리는 와인이다. ⓒ 임승수

   
이 와인을 인터넷에 검색하면 가성비 깡패라는 평가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마셔본 나 역시 그러한 평가에 완벽하게 동의한다. 제조사 홈페이지에는 팝콘, 크래커, 감자칩 등과도 잘 어울리며 스시롤이나 생선회와도 궁합이 좋다고 나온다. 무슨 와인이 팝콘과 곁들여도 맛있고, 생선회와 곁들여도 좋다니! 한마디로 아무 거나 잘 어울린다는 얘기 아니겠는가.

기다란 샴페인 전용 플루트 잔에 따라서 뽀글뽀글 올라오는 기포를 감상하며 주전부리를 씹다가 뭔가 허전해질 즈음 와인 한 모금을 털어 넣는다. 여전히 잔 속에서 올라오는 기포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아이폰의 음성 메모 앱을 열고 드라마 <트윈픽스>의 데일 쿠퍼 수사관처럼 우울한 넋두리를 가감 없이 녹음한다. 녹음을 마치고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다음과 같이 읊조린다.

"내가 만약 외로울 때면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바로 도멘 생 미셸 브뤼."

코로나 19로 지친 마음이 세 와인으로 조금이나마 덜어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우리 모두 힘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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