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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개남 장군
 김개남 장군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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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성 공격에서 패배한 김개남은 적잖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였다.

11월 13일 밤에는 진감으로 패퇴하고, 여기서는 민보군의 공격에 밀려 다시 연산으로 후퇴하였다.

승리의 기세를 몰아 청주를 공략했으나 미리 대비하고 있던 청주 병영병과 일본군에 의해 패한 김개남 부대는 진격해왔던 행로를 따라 후퇴하기에 이르렀다. 13일 밤 그들은 진잠으로 쫓겨 내려왔다. 그러나 진잠에서도 역시 민보군에게 밀려 연산으로 패퇴할 수 밖에 없게 됐으며 연산의 상황도 이들에게는 어렵기만 했다.

당시 안성군수의 보고에 의하면 "18일에 은진에 이른즉 일본 대대장이 연산에서 적을 깨뜨린 후 추격하여 머문 지 3일이 되었다 하고, 비류의 종적은 막연하여 듣지 못했다"고 하였다. 15일에 연산에 도착한 김개남 부대는 이곳에서도 밀리는 전세를 회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주석 1)

 
안내목 이곳이 동학농민 봉기때 김개남의 부대가 주둔했던 곳임을 알리고 있다
▲ 안내목 이곳이 동학농민 봉기때 김개남의 부대가 주둔했던 곳임을 알리고 있다
ⓒ 하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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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동학농민혁명을 연구해온 분들은 대부분 전봉준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김개남의 활약은 소홀히 하거나 묻혀지는 경우가 많았다. 다행히 근년에 들어 지방사를 연구하는 분들이 있어서 김개남의 활약상이 조금씩 조명되고 있다.

김개남은 11월 13일 청주성 공격에 실패한 후 진잠을 거쳐 14일 연산(連山)에서 다시 집결하여 오전 11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오후 4시쯤 노성과 논산 쪽으로 후퇴하였다.

김개남은 14일 밤 전봉준과 논산에서 합류하였다. 15일에는 논산 대촌 후원의 소토산에 있는 봉우리에 진을 치고 있던 전봉준과 김개남의 농민군은 추격해온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을 받고 오후 3시 30분 쯤 은진의 황화대로 후퇴하였다.

황화대에서 일본군과 통위영병은 동쪽에서 자위영병 1소대는 북쪽에서 장위영병 나머지 부대는 동남쪽에서 공격하자 이곳에서 크게 패전한 후 오후 4시경 전주쪽으로 퇴각하였다. (주석 2)

  
박봉양 토비 사적비 김개남이 이끄는 동학농민군과 맞서 싸워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로, 오른편 위 모서리가 떨어져나간 것은 동학농민전쟁이 역사적 정당성을 얻게 되면서 한때 수난을 당한 흔적입니다.
▲ 박봉양 토비 사적비 김개남이 이끄는 동학농민군과 맞서 싸워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로, 오른편 위 모서리가 떨어져나간 것은 동학농민전쟁이 역사적 정당성을 얻게 되면서 한때 수난을 당한 흔적입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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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 부대만 패전을 거듭한 것이 아니었다.

전봉준 부대와 북접의 손병희 부대도 마찬가지였다. 관군을 앞세운 일본군의 화력과 곳곳에 풀어 논 첩자들이 동학농민군의 이동 행로를 샅샅이 보고하여 취득한 정보력 앞에 동학군은 속수무책이었다.

김개남은 11월 23일 전주에서 남원방면으로 퇴각하면서 그와 기개를 같이하는 순천의 김인배와 함께 영남으로 진출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운봉현감 이의정과 참모관 박봉양은 영남으로부터 300정의 무기와 화약을 지원받아 전투력을 강화시킨 후였다. 김개남은 산동방 부동의 방아재에서 운봉 박봉양과 접전하여 패전하는 것을 시작으로 11월 23일에는 완전히 패전하고… (주석 3)


일본군이 들어오면서 남접의 전봉준이나 김개남이나, 북접의 최시형이나 손병희를 막론하고 동학농민군의 목표는 반봉건에서 일본군을 몰아내자는 '척왜'로 바뀌었다. 폐정개혁에서 반외세투쟁으로 전환된 것이다.
  
동학혁명 전봉준과 동학농민운동군.
▲ 동학혁명 전봉준과 동학농민운동군.
ⓒ 홈페이지 동학농민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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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접이나 북접을 막론하고 동학군은 평범한 농민들이었다. 동학도인들이 많았다. 이렇다 할 무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관군에서 노획한 소량의 낡은 화승총이거나 죽창ㆍ농기구가 전부였다. 전투훈련도 받지 못한 그야말로 오합지졸이었다.

초기에는 관의 탐학에, 이제는 일본군의 침략에 맞서 일어난 의군(義軍)일 뿐이다. 하나같이 정신력은 강했지만, 전투력은 약했다.


주석
1> 박맹수, 앞의 책, 21쪽.
2> 위의환 역저, 『장흥동학농민혁명 사료총서 2』, 279~280쪽, 천도교장흥교구ㆍ장흥군, 2009.
3> 위의환, 앞의 책, 280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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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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