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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은 개인적 차원에서 그리고 국가적 차원에서 두려움의 대상이다. 전염은 '나'의 존재론적 기반인 몸을 '오염'시키며 피해를 주고, 다시 나를 새로운 '가해자'로 만든다는 점에서 특수성을 지닌다.

흡혈귀나 좀비가 주는 두려움이 단순한 '죽음의 공포'뿐만 아니라 내가 또 다른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동질화의 공포'에서 출발하듯, 전염의 공포 또한 내 몸이 혐오스럽게 변하고 나라는 존재가 다시 가해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두려움과 죄의식에 의해 증폭된다.
 
구성원 대부분을 감염시키며 기존의 믿음체계를 뒤흔들 수 있다는 점에서 전염병은 집단적·정치적 차원에서도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14세기 유럽의 흑사병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 전근대 사회에서 전염병은 종교적 믿음을 전복시키고 권력구조를 재편하였다. 개개인의 건강을 국가의 통치 속에 놓기 시작한 근대국가에서는 전염병의 창궐이 노동력의 손실임과 동시에 국가권력의 무능을 나타내는 위기 징표로 작용해 왔다.
 
따라서 개인과 집단 모두는 각자의 두려움을 해소할 대상을 찾아야만 했다. 스스로가 부정(不淨)한 존재가 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 결코 '나'의 책임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서라도, 전염병이 지배층의 잘못 때문이 아님을 가시적으로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전염병의 책임 제공자를 설정하는 것은 불가피했다. 이에 따라 역사 속 전염병의 창궐은 늘 '희생양(Scapegoat)'을 동반해 왔다.
 
[14세기 흑사병] 전염병에 대한 '종교적' 해석과 희생양 담론
   
흑사병이 창궐한 시대, 유대인, 집시, 정신장애인과 같은 소수자는 '희생양'이 되었다.
 흑사병이 창궐한 시대, 유대인, 집시, 정신장애인과 같은 소수자는 "희생양"이 되었다.
ⓒ 작자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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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병(Black death)은 1347년부터 1350년 동안 유럽 전인구의 1/3을 사망케 하며 유럽 전 사회에 거대한 재앙이 되었다. 14세기는 세균설은 물론 르네상스 시기의 해부학의 성립과 발전 이전의, 전통적 질병관이 지배하는 시대였다. 의학은 질병의 근본적 원인에 대해 답할 수 없었고, 따라서 흑사병이라는 거대한 재앙은 당시 중세인들에게 '타락한 인류에 대한 신의 분노'로 해석되었고, 그 해결은 오로지 '속죄(贖罪)' 뿐이었다.
 
그러나 '속죄'라는 단어의 의미처럼, 그 죗값을 치를 눈에 보이는 '부정한 존재'의 희생이 필요했다. 초기 성모 마리아상을 마을의 중심으로 옮겨오고, 스스로의 고행을 통해 속죄하던 사람들은 흑사병이 창궐하자 유대인, 집시, 매춘부 등 '부정하다'고 여겨지던 경계집단(Marginal group)들을 잡아들여 학살하고 화형에 처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희생양 : 유대인
 
유대인들은 14세기에도 여전히 '갈보리 언덕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은 사람들의 후손'이자 신의 뜻을 거스르는 이교도 집단으로 여겨졌다. 더욱이 농부가 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많은 유대인은 도시에 거주하며 고리대금업과 의업에 종사했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은 흑사병 창궐 속 유대인들을 '타락한 고리대금업자'이자 '부정한 의사'로 낙인찍었고, 신의 분노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촉매제가 된다(Ziegler, 2004:124-6).

또한 당시 유대인들은 지속적인 차별 속에서 대중과 구별되는 옷차림을 하도록 강요받았고, 눈에 띄는 복장은 그들을 손쉽게 희생양으로 만들었다(Watts, 2009:35-36).
 
뿌리 깊은 차별의 역사 속에서 중세 유럽인들은 유대인들의 존재 자체가 기독교 사회를 오염시켰고 그들이 신을 모독했기 때문에 인류가 '흑사병'이라는 형태로 죗값을 치르는 것으로 생각한다.

유대인 대학살은 1348년 봄, 프랑스 남부지방에서 시작돼 5월에는 프로방스에서 대학살이 일어났다(Ziegler, 2004:130). 1348년 9월에는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고문에 의한 거짓 자백이 이루어져 광기의 대학살에 불을 지피게 된다. 심지어 1349년 2월 14일 스트라스부르에서는 전염병이 발생하지도 않았음에도 '예방적 조치'로써 900명의 유대인이 산 채로 불태워졌고, 이후 유럽 각지에서는 무수한 유대인들이 '속죄의 희생양'으로서 학살당하게 된다.
 
또 다른 희생양 : 나병환자, 매춘부, 집시
 
19세기 후반 세균병인론이 정립되기 전까지, 나병은 '어둡고 은밀한 생각이나 말 또는 행위에 대한 신의 처벌'이며 '역겨운 섹스의 형태와 결부되어 있다'고 믿어져 왔다.

나병환자에 대한 낙인의 기원은 기원전 3세기, 성직자들이 레위기에 서술된 '도덕적 불결함(zara'at)'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를 '나병(lepra)'이라는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것에서 출발한다(Watts, 2009:87,96).

'추상적 관념'인 도덕적 불결함에 대해 서술되어 있는 문구들은 모두 '신체적 질병'인 나병환자에 대한 서술로 대체되었고, 이러한 낙인의 역사 속에서 중세 나병 환자들은 나병으로 진단받은 후에 인간 사회에서 추방·격리되고 시민권이 박탈되는 차별을 겪게 된다.

나병의 흉측한 외관이 '신의 형벌'이자 ''부정함에 대한 도덕적 처벌'이라 믿어지는 상황 속에서, 흑사병의 창궐은 그들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대속시키려는 대중의 광기를 만들어 낸다(Ziegler, 2004:124). 부정한 섹스를 직업으로 삼아 신의 분노를 자아낸 존재인 '매춘부'와 이도교 집단이자 병을 퍼뜨리고 다닌다고 믿어진 '집시' 또한 마찬가지였다.
 
유대인, 나병환자, 매춘부, 집시에게 덧씌워진 희생양 담론은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닌다. 그들은 흑사병 이전부터 '기독교적 사회'에서 '내부자'로도, 뚜렷한 '외부자'로도 설정되지 않는 경계적(marginal) 존재였다. 이러한 경계성(marginality)에 의해 기독교 사회의 순수성을 해치는 '부정한(impurity) 존재'로 차별받아왔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한 존재들'은 인류학자 메리 더글라스가 <순수와 위험>에서 지적하듯, '위험(danger)'한 존재이자 성스러움(sacredness)을 회복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전락하게 된다.
 
실체론적 질병관과 세균설(germ theory)이 받아들여지기 이전의 14세기 유럽에서는 이러한 희생양 만들기의 과정이 '종교적 믿음체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비이성의 세기', '암흑의 세기'인 중세를 지나 근대적 의학관이 정립된 19세기 말 이후에도 '희생양 만들기'는 없어지지 않았다.
 
희생양을 생성시키는 믿음체계는 '종교'에서 '과학'으로 넘어갔지만, 더글라스가 지적한 순수(purity)와 부정(impurity) 사이의 배타적 경계가 존재하는 한, 희생양은 '과학적 믿음체계' 속에서도 끊임없이 재현되었다.
 
[19C말~20C 초 일본제국과 조선] 식민지적 근대와 '과학적' 희생양의 탄생
 
근일에 독일(德國) 의사 한 명이 호열자 세균 한 개를 착득(捉得)하여 유리병 내에 놓았는데 아주 작아 눈으로 보기 어려워서(微細難見) 4000배 되는 현미경을 착안으로 관찰한 결과, 그 벌레(虫)의 형상이 머리는 검고 몸은 붉으며(頭黑身紅) 검은 털이 몸에 나 있었는데  (중략) 친한 사람을 불러 병균이 발생하는 원인과 없애는(除殺) 방법을 설명하였다더라. - 황성신문, 1902년 10월 28일자.
   
1882년과 1883년, 독일의 세균학자 로버트 코흐(Robert Koch) 박사는 결핵균과 콜레라균을 현미경으로 직접 관찰함으로써 그동안 '신의 징벌' 혹은 '부도덕한 개인의 책임'으로 여겨졌던 전염병의 환상을 완전히 종식시켰다(김옥주, 2015).
 
불분명했던 전염병의 원인이 미세한 균(細菌)이라는 것은 '가시적으로' 보이는 세균의 모습에서 더 반박할 수 없는 진리로 믿어졌고, 우두법(천연두 예방접종)과 함께 계몽을 위한 박람회 등에서 '세균을 직접 보여주는' 행위는 현대 서양의학에 대한 대중들의 믿음을 굳건히 하는 데에 이용되었다. 전염병 또한 세균에 의한 것이라는 인식이 머나먼 조선 땅까지 알려져, 세균설(Germ theory)은 1902년 황성신문 기사와 같이 대중에게 각인되게 된다.

그러나 '근대화'와 '과학화'를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세균설은 식민지 조선에서 단순한 '계몽'의 역할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었다. 조선에 대한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여야 했던 일제로서는, '미개한' 조선과 '계몽된(과학화된)' 일본제국이라는 구도를 형성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조선이 전통적 믿음과 관습을 폐기시키고 일본을 따라 '진보'하여야 한다는 식민자의 주장은, 바로 현미경 속 꿈틀거리는 세균에서 가시적 근거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세균설이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고 사회가 이른바 '과학화' '근대화' 되어감에도 전염병에 대한 지배계층의 두려움과 희생양 찾기는 줄어들지 않는다. 전염병의 원인을 모르는 채로 '광기'에 휩싸여버린 14세기의 경우와는 달리 '이성적인 판단' 속에서 희생양은 더 발생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과학'이라는 새로운 믿음체계 속에서 새로운 방식의 희생양 설정은 계속되어갔다.
 
그리고 그 희생양 설정 방식은 위에서 논의한 세균성과 식민지적 근대화 사이의 은밀한 거래와 무관하지 않았다. '근대적·과학적 의학' 담론 속에서 정당성을 획득한 위생담론은 식민지를 경영하는 제국의 정치적 목적과 만나 새로운 희생양을 설정했던 것이다.
 
만주에서 폐(肺)페스트가 발생한 것이 보고된 1911년 1월, 조선총독부는 만주와 교류가 많은 인천항과 신의주의 방역에 총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그 '단속'의 중심에는 중국인이라는 '위험집단'이 있었다.
 
경무총감부는 "인천과 같은 다수의 청국인이 거주하고 있는 곳에서는 페스트 방역에 한층 주의를 요한다"는 명목하에 조선 내 거주하는 중국인의 옷에 증명서 번호를 가시적으로 부착할 것을 강제했다. 나아가 '풍기위생을 문란케 하는' 중국인 노동자를 강제추방했다. 그러나 이러한 통제와 추방의 이면에는, 조선을 병합한 지 얼마 안 되는 중국을 향한 일본제국의 경계가 담겨있었다.
  
"압록강 왼쪽 강변 백오십리에 일본인, 조선인의 힘을 부식해서 중국인의 힘을 빼앗아 이를 회복하고, 나아가 그 여력을 강의 건너편(対岸)까지 미치게 하는 것은 조선경영의 사명이자, 책임입니다. 지금은 실로 천재일우의 기회입니다."
 
위의 아카시 모토지로 헌병대사령관의 페스트 대책에 대한 보고문서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제국은 조선에의 패권을 다투는 중국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재조(在朝) 중국인이 보균자(Vector)라는 인식을 의도적으로 확대·재생산하였다. 그들에 대한 공포를 형성하고 전염병의 책임을 물음으로써, 일본제국은 불안한 방역상황을 외부의 적으로 돌림과 동시에 조선인에 대한 통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그리고 이러한 '위생 이데올로기'는 다시 독립을 외치는 조선인들에 대한 물리력 행사의 근거로 사용되었다. 1919년 3·1운동의 폭력진압 직후 발표된 <오사카조일신문> (大阪朝日新聞) 1919년 3월 8일 자 '조선 소요 - 조선인은 민족 영원의 행복을 고찰할 것을 요한다'에서는 다음과 같이 3·1운동의 주동자들의 시대착오성에 대해 말하며, 폭력진압의 불가피성을 설파한다.
 
조선에서의 제반 시설의 개선은 (그 진위를) 다투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의 사실이며, 십 오년 전의 경성은 하다못해 단순한 위생설비조차도 베풀어지지 못한 채, 지독한 역병(悪疫)과 재난(悪事)는 수백 년 동안 유행해 왔고... 
이처럼 제국과 식민지 관계 속에서 전염병의 책임은 빈민, 정치적 위협 요소인 중국인, 위생에 대한 교육수준이 낮고 빈곤한 일본 내 조선인 이주노동자,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는 조선인과 같은 '경계적 존재'인 '위험한 존재'에게 전가되었다. 그 과정에서 제국은 통치적 정당성을 확보함과 동시에 제국의 질서 밖에 있는 존재들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추방·배제하는 효과를 동시에 얻을 수 있었다.
  
'세균설'이 받아들여지고 '현대과학'이 수용된 근대 이후에도, 14세기의 '종교적·주술적 믿음'을 '과학적 믿음'으로 대체해 또 다른 양상의 희생양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여전히 체제의 경계에 있는 약자였다.
  
[이념적 경계성에서 희생양으로] 냉전시대 한국의 전염병에 대한 '이념적' 희생양 만들기
 
공산주의는 인간사회에 대한 역병이다. 공산당은 간단(間斷)없이 대한민국 내 무정부상태와 혼란을 야기시키려하고 있다. (중략) (역병의) 만연을 조지(阻止)하기 위한 충분한 방책 없이는 동서양의 민주주의는 파괴적 결과에 당면하게 될 것이다.
- 경향신문 <공산주의는 역병 - 장면 대사, '워싱톤'에서 강조' > 1949년 11월 11일자.
 
1945년 해방 이후, 1948년 남한 단독정부의 출범은 그 시작부터 미소 냉전체제 하의 반공국가(反共國家)를 전제하는 것이었다.

정당성이 부족했던 이승만 정부는 국가의 체제를 확고히 다지기 위해 가시적인 적(適)을 설정할 필요가 있었고, 눈에 보이지 않는 38선 너머의 자민족을 '적'으로 대중에게 각인시키기 위해서는 다양한 은유가 필요했다. 그 대표적 수사가 바로 공산주의와 빨갱이에 대한 '역병'의 은유였다. 이러한 반공국가의 체제 불안요소로서의 '빨갱이'는 단순한 은유적 차원에서 역병과 얽히는 것을 넘어, 실제로 현대사 속에서 역병의 '희생양'으로 설정되기도 한다.
 
1969년 9월에 발생한 신종 콜레라 대유행은 발생 47일 만에 1356명의 감염자, 123명의 사망자를 낳았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알 수 없는 병이 번져가는 것에 대해 병원균도 제대로 밝히지 못한 채 우왕좌왕했고, 발생 15일이 지난 9월 9일에서야 전염병의 균주가 신종 콜레라임을 밝히고 방역에 착수하였다.
 
괴질이 발생한 후 병원체도 제대로 발견하지 못한 채 "의사 뇌염이다, 장염 비브리오다." 갈팡질팡하던 보사부는 발생 15일째인 9일 오후에야 신종 콜레라라고 발표, 일반을 놀라게 하고 있다. (중략) 그러나 환자는 심한 때는 80명씩 급증하여 400여 명의 환자가 발생하고 사망자도 30명에 가까워 오는데 (중략) 당국은 형식적인 대책을 세우고 있었다.
  
- 동아일보  <우물쭈물 15일, 전국이 놀란 '신종 콜레라>  1969년 9월 9일자.

1969년 7월 미국 대통령 닉슨 독트린이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후 미군철군 등이 논의되자, 박정희 정부는 안보적으로 큰 위기감을 느꼈다. 당시 국내에서는 신종 콜레라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고 장기집권에 대한 정당성이 의심받기 시작한 시점인 1970년 정부는 신종 콜레라는 '북괴의 소행'이었다고 발표한다. 
 
보사부 방역당국자는 작년에 오염된 콜레라가 북괴로부터 인공적으로 침입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는데, 그 이유로 첫째 작년의 콜레라균이 지금까지 있었던 콜레라균과 다르며 그 다른 점이 인공적으로 변용시킨듯하다는 점, 둘째 … (후략)
- 동아일보 <작년 콜레라 북괴서 투입한 듯>  1970년 2월 4일자.
 
이러한 세균전의 의심은 WHO의 조사에 의해 인위적 전파 증거는 없다고 밝혀졌지만, 정부는 이후에도 "(사살된) 간첩의 휴대품 속에 독물"과 같은 기사를 통해 "북괴가 한국에서 생화학전을 시도하고 있음이 분명"하기에 "전 국민의 대공전선에 있어서 적극적 협조가 필요함"을 지속적으로 환기하였다.
 
'세균전'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간첩에 대한 주의를 환기함과 동시에 콜레라로 인한 대중의 사회적 불안감을 전염병을 창궐시킨 '빨갱이'에 대한 분노로 전환시키기에 충분했다. 전국에서 세균전 규탄 궐기대회로 수십만 명의 시민이 동원되었고, 일본에서는 민단계열의 재일교포들이 '북괴 콜레라균 밀수규탄 전국 민중대회'를 열고 조총련계 교포들의 각성과 전향을 촉구하는 호소문을 낭독하기도 하였다.

반공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독재정권 시기에 '전염병'의 창궐에 대한 사회적 책임은 방역 대책에 미비했던 정부가 아닌, 적국인 북한과 국내의 '빨갱이'들(반독재 투쟁에 참여한 민중들과 민간인 학살 유족, 고문피해자 등을 포함)에게 돌아갔다. 그 과정에서 정부의 책임과 방역 대책의 강구를 촉구하는 목소리는 '북괴의 세균전 책략에 동조하는' 움직임으로 낙인찍히고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반공국가'라는 통치 정당성은 이데올로기적 순수성에서 기인하는 것이었고, 국가 내의 '오염'으로 여겨졌던 '빨갱이' 집단들은 부정(不淨, impurity)할 뿐 아니라 위험한 존재였다. 그들은 은유의 차원을 넘어 실제로 전염병과 세균전의 책략에 동참했다는 의심을 받으며 사회적 매장을 당해야만 했다. 이념의 시대였던 냉전기, 한국의 전염병의 희생양 담론 또한 이념적으로 구성되고 증폭됐던 것이다.
 
역사를 통해 성찰하는 오늘날의 희생양
  
중국인 입국 금지 청와대 청원글 서명인이 59만명을 넘어섰다.
 중국인 입국 금지 청와대 청원글 서명인이 59만명을 넘어섰다.
ⓒ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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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흑사병,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식민지 조선에서의 폐(肺)페스트, 독재시대의 신종 콜레라의 사례를 분석하며 '희생양' 담론이 각 종교·계몽·이념으로 대표되는 각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변화하고 재구성되는지를 살펴보았다.
 
14세기 흑사병이 창궐한 유럽에서는 유대인과 나병환자, 매춘부와 집시와 같은 '부정한 존재들'이, 식민지 조선에서는 빈민·제국 내 중국인·조선인 이주노동자·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는 자와 같은 '계몽되지 못한 존재들'이, 그리고 독재시대에는 반독재를 외치는 민중과 '빨갱이'로 낙인찍힌 사람들과 같은 '이념적 불순분자들'이 각각 전염병에 대한 책임을 지고 희생양으로 구성되었다.
  
이처럼 희생양 담론은 과거 14세기 의학이 '종교적 믿음'에 기반하고 있었기에 생긴 '무지의 산물'이 아니었다. 본문에서 더글라스의 '순수와 위험' 논의를 빌려 언급한 것처럼, 하나의 믿음을 맹신하는 집단이 있고 그 집단의 배타적 테두리가 존재하는 한, 테두리 위의 '경계적 존재'에 대한 '희생양 만들기'는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의 담임교사가 아버지가 한국인이고, 어머니가 태국인인 학생의 가정에 전화해 개학하는 날 등교를 만류한 사례가 있었다. 담임교사는 태국인 어머니 때문에 다른 학부모들이 신종플루에 자녀들이 감염될까 우려하니 자녀를 등교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설명했다. 이 태국인 어머니는 이미 한국에 거주한 지 10년 이상 되는 사람이다. 자녀 역시 어머니가 태국인이라는 이유로 신종플루 환자로 의심받은 셈이다.

- <내일신문>  '신종플루에 두 번 우는 다문화가정'  2009년 9월 14일자.
  
세균설이 상식이 되고 과학적 세계관이 전 구성원에게 받아들여진, '이성적 개인의 세기'인 오늘날 한국에서도 이는 다르지 않아 보인다. 2003년 사스(SARS)유행 당시 "조선족 그 도둑놈들 밀입국해서 사스 퍼뜨릴 텐데 강제추방하자"던 한 네티즌의 모습에서도, 2009년 신종플루(H1N1) 유행 당시 "학부모들이 신종플루에 자녀들이 걸릴까 우려하니 자녀를 등교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던 한 담임교사의 이주여성을 향한 전화에서도, 2014년 에볼라(Ebola virus) 유행 시 "에볼라 바이러스 때문에 아프리카인은 출입을 금한다"면서도 남아공 출신 백인은 받아들인 한 이태원 펍에서도 희생양 만들기는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이처럼 전염병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력이 향상해왔음에도 그 형태를 바꿔 '희생양 만들기'가 발생해온 원인에는 결국, 집단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배타성이 자리 잡고 있는 듯이 보인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희생양 만들기'의 근거는 종교에서 계몽으로, 계몽에서 과학으로 바뀌어 왔지만, 이러한 믿음 체계 모두가 순수와 부정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경계적 존재를 희생양으로 연결시켰다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같은 양상을 보였다. 인류는 끊임없이 '안'과 '밖', '우리'와 '그들'을 배타적으로 나누고 그 위에 '순수'와 '오염', '옳음'과 '그름'이라는 딱지를 붙이며 그 균열 속 희생양을 만들어왔다.

오늘날을 몇십 년, 몇백 년 후에 돌아보면 지난 14세기, 일제 강점기, 냉전시기의 잘못된 희생양 만들기를 단지 '다른 패러다임 버전'으로 반복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한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 너무나 익숙해져, 늘 일어나는 희생양 만들기를 알아채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갇혀있는 '안'과 '밖'의 배타성
그 너머에서 스스로를 성찰하고, 일상을 '낯설게' 볼 수 있는 역사적 안목이 필요한 시점이다.

태그:#우한폐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전염병, #중국인, #희생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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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장애인야학 교사이자, 의학과 인류학, 법학을 공부하는 의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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