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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9년은 3.1혁명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의미 있는 해를 맞아 많은 시민들이 임시정부가 걸었던 '임정로드'를 따라 걸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1주년, 102주년에도 그 발걸음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자 역시 지난 1월 9일부터 5박 6일 동안 청년백범 14기 답사단의 일원으로 중국 광저우~충칭에 이르는 임정로드를 탐방하고 돌아왔습니다. 길 위에서 보고 들으며 느꼈던 경험을 독자들께 공유하고자 <오마이뉴스>에 답사기를 연재합니다. - 기자 말


<임정로드 4000km> 기획자, 임정로드로 떠나다

2019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였다. 당시 작은 출판사에 다니고 있던 나는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오마이뉴스> 김종훈 기자와 함께 국내 최초 임시정부 여행 가이드북 <임정로드 4000km> 출간을 주도한 바 있다. 그리고 이 책의 기획자로서 당연히 임정로드 순례에 동참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을 늘 느끼고 있었다.
 
 국내 최초 대한민국 임시정부 여행 가이드북 <임정로드 4000km>
 국내 최초 대한민국 임시정부 여행 가이드북 <임정로드 4000km>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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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회사에 얽매여 있는 상황에서 해외여행은 언감생심이었다. 남들에게는 "일생에 한 번 백범의 계단에 서라"고 그렇게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정작 나는 가지도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임시정부 100주년을 그냥 보내고 말았다.

그 사이에 나는 퇴사를 하고 대학원 진학을 앞두게 됐다. 잠깐의 여유가 생긴 상황에서, 때마침 '청년백범'이라는 단체에서 중국 광저우~충칭 코스로 임정로드 답사단을 꾸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물론 아주 잠깐이지만 망설임의 시간도 있었다. 바로 비용 때문이었다. 이제 더는 고정적인 수입이 없는 백수라는 신분 때문에 160만 원이라는 참가비가 내겐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그동안 얼마 되지 않는 월급을 차곡차곡 모아 목돈을 만들어놨는데, 대학원 등록금과 생활비로만 쓰기에도 빠듯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나의 마음은 계속 떠나라고 말하고 있었다. 160만 원이 결코 적은 돈은 아니지만, 이 5박 6일간의 여행이 가져다줄 가치에 비하면 결코 비싸다고도 할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청년백범 14기 답사단의 일원으로 임정로드 순례길에 오르게 되었다.

마침내 출발일인 1월 9일 새벽이 밝았다. 서울·남양주·광주·부산 등 전국 방방곡곡에서 출발해 인천국제공항에 모인 33명의 답사단원들은 지역만큼이나 나이와 신분도 천차만별이었다.

엄마 손 잡고 따라온 초등학생부터 대학 혹은 대학원 입학을 앞둔 예비 새내기들, 현직 역사교사, 이번 여행이 은퇴 기념 여행인 중년의 신사까지. 무엇 하나 접점이 없는 이들이 5박 6일 동안 함께 걸으며 어떻게 융화하게 될지 기대가 됐다. 이것이 단체여행의 묘미이리라.

답사단이 3시간여를 날아 도착한 곳은 중국 광둥성의 성도인 '광저우(廣州)'.

광저우의 첫인상은 그닥 반갑지만은 않았다. 너무 더운 날씨 탓이다. 영하를 오르락 내리락하는 한국과 달리 광저우 현지의 날씨는 20도가 넘었다. 추운 곳에 있다가 갑자기 따뜻한 곳으로 오니 다들 입고 있던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버스의 에어컨이 약하다고 궁시렁거리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광저우에 잠든 두 한국인, 김근제·안태
 
 1928년, 장제스에 의해 조성된 황포군관학교 생도들의 무덤 '동정진망열사묘원(東征陳亡烈士墓園)'
 1928년, 장제스에 의해 조성된 황포군관학교 생도들의 무덤 "동정진망열사묘원(東征陳亡烈士墓園)"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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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저우에 도착한 답사단이 처음으로 들른 곳은 '동정진망열사묘원(東征陳亡烈士墓園)'이라는 곳이었다. 1928년, 장제스에 의해 조성된 동정진망열사묘원은 동정(東征) 당시 희생된 황포군관학교 생도들의 공동묘지다.

동정이란 1925년 9월, 광저우 동강(東江) 지역을 세력권으로 하는 광둥 지역의 군벌 천중밍(陳炯明: 1878~1933)이 쑨원의 북벌 정책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장제스가 이를 토벌하기 위해 벌인 전투를 말한다. 장제스는 이 전투에 황포군관학교 생도들을 동원했는데, 신식 군사기술을 배운 이들의 활약이 대단했다고 전한다.

한국인인 우리가 왜 굳이 이곳을 찾았을까? 바로 이 묘역에 황포군교 6기에 입교한 한국인 생도 김근제(金瑾濟)와 안태(安台)가 나란히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이 정확히 어떤 삶을 살다가, 어떻게 죽어갔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독립기념관 국외독립운동사적지 사이트에 등재된 설명에 따르면 "김근제와 안태의 묘비가 비록 동정진망열사묘원 내에 있기는 하지만 이들이 동정전쟁에서 희생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 황포군교 제6기생이 1926년 10월에 입학을 했는데, 그때는 이미 동정이 끝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독립기념관은 "이들의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지만 군사교육을 받는 도중 당시 발생한 크고 작은 전쟁이나 시위에 동원되어 희생된 것으로 추측된다"고 조심스레 설명하고 있다.
 '한국인(韓國人) 김근제지묘(金瑾濟之墓)'라 적힌 묘비
 "한국인(韓國人) 김근제지묘(金瑾濟之墓)"라 적힌 묘비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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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태 동지(安台 同志)라 적힌 묘비
 안태 동지(安台 同志)라 적힌 묘비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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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이 적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비석 뒷면은 1984년에 묘지를 정비하면서 시멘트로 발라버리는 바람에 영영 확인할 수 없게 됐다고 한다.

천만다행으로 김근제의 경우 한국에 사는 후손을 찾을 수 있었고, 매년 후손이 이곳을 찾아 무덤 앞에 제를 올린다고 한다. 하지만 함께 있는 안태의 경우는 아직까지 후손은커녕 정확한 신원조차 파악이 안 된 상태라고 한다.

다만 비석에 '한국 괴산(韓國 槐山)'이라고 되어 있고, '민국 16년 11월 9일(民國十六年十一月九日)'이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충북 괴산 출신으로 1927년 11월 9일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할 따름이다. (<백범의 길> 중 심지연 선생의 글 참조)

그런데 안태의 사망일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도 존재한다. 독립기념관은 "안태는 사망일이 1927년 10월이므로 광주 코민 발생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하여 안태의 사망일을 10월로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안태가 사망한 달이 10월인지, 11월인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마다 견해 차가 존재하는 듯하다. 여전히 이들에 대한 연구가 미진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조국의 독립을 보지도 못한 채, 먼 이국 땅에서 잠들었어야 할 젊은 넋을 기리기 위해서라도 이 두 분의 삶에 대한 연구자들의 후속 연구를 기대해 본다.

참고로 동정진망열사묘원에 한국인 생도 두 명이 묻혀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지난 2010년의 일이다. 광저우 총영사관에 근무하던 강정애 박사 부부가 황포군관학교 뒷산을 답사하던 중 우연히 발견하면서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고 한다. 우리가 임정로드를 계속 걸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언제 어디서 새로운 흔적이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동정진망열사묘원에 잠든 한국인 생도 두 명의 영전에 술을 올리는 청년백범 14기 답사단
 동정진망열사묘원에 잠든 한국인 생도 두 명의 영전에 술을 올리는 청년백범 14기 답사단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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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백범 답사단은 먼 이국 땅에 잠든 젊은 넋들 앞에 술 한 잔 붓고 큰 절을 올렸다. 그래도 후손이 찾아와 제를 올리는 김근제와 달리 안태는 후손을 찾을 길이 없으니 더 애처로운 마음이었다.

문득 '왜 이 두 분을 한국으로 모셔가지 않는 것일까' 의문이 들었다. 이 묘역의 존재가 알려진 것이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 정부에서 이 두 분의 유해 봉환을 추진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바 없다.

해외에 잠든 독립운동가들의 유해를 고국으로 봉환하는 것은 마땅히 정부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이다. 이들은 중국 혁명의 와중에 스러졌지만, 목표는 조선의 독립이었다. 이들이 죽어서라도 잠들고 싶었던 곳은 해방된 조국 땅이었을 것이다.

이제라도 이 두 분이 해방된 조국 땅에서 영면할 수 있도록 서둘러 유해 봉환을 추진해야 하지 않을까? 정부의 적극적인 조치를 고대한다.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길러낸 요람 '황포군관학교'

먹먹한 마음으로 동정진망열사묘원을 나와 향한 곳은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였다. 황포군관학교는 동정진망열사묘원에서 버스로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1924년 6월 6일, 제1차 국공합작의 산실로 설립된 황포군관학교(아래 황포군교)는 소련의 자금과 무기를 지원받아 설립한 소련식 사관학교다. 정식 명칭은 '중국 국민당 육군군관학교'이지만 황포 장주도(長州島)에 위치해서 일반적으로 황포군교로 불린다.
 
 황포군관학교 정문
 황포군관학교 정문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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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봉춘 교수가 공개한 약산 김원봉의 황포군관학교 시절 모습. 현장에서 공개한 사진을 카메라에 담았다.
 최봉춘 교수가 공개한 약산 김원봉의 황포군관학교 시절 모습. 현장에서 공개한 사진을 카메라에 담았다.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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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포군교는 우리 독립운동가들과도 인연이 깊다. 황포군교 교장이었던 장제스가 피압박민족을 후원한다며 한인들을 대거 받아들인 덕분에, 신식 군사기술을 배우고자 많은 한인 청년들이 몰려든 것이다. 그 유명한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 역시 의열단원들을 이끌고 황포군교 제4기생으로 입교했다.

"입학 당시 약산은 '최림'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1926년 3월 8일 4기생으로 입교해 6개월 동안 박효삼, 박건웅, 전의창, 이우각, 이기환, 권준 등 24명 동지들과 함께 군사훈련을 받았다." - 김종훈 저, <약산로드 7000km>

황포군교를 거쳐간 한인들은 확인된 인원만 73명이라고 하는데, 우한(武漢) 분교를 비롯한 여러 분교에 재학한 청년들까지 포함하면 그 수가 200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들은 졸업 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해 군사 간부 양성에 힘썼고, 마침내 1938년 10월 10일, 꿈에도 그리던 한인 정규부대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창설한다. 결과적으로 황포군교는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길러낸 요람이었던 셈이다.

황포군교는 1930년에 난징으로 이전하고 건물은 1938년 일본군의 폭격으로 전소됐다고 하는데, 지금 기념관으로 활용되는 건물들은 1965년에 복원한 것이라 한다. 복원 후 기념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황포군교는 교무실, 식당, 생활관(내무반) 등을 당시 모습 그대로 재현해 놨다. 우리는 이곳에서 먹고 자고 훈련을 받으며 조선의 독립을 꿈꾸었을 독립운동가들을 생각했다.
 
 황포군교 생도들이 생활했던 내무반(생활관)
 황포군교 생도들이 생활했던 내무반(생활관)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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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포군교 생도들의 군복과 군모
 황포군교 생도들의 군복과 군모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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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나는 기념관에 전시된 생도들의 창술(槍術) 대련 영상과 사진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개인적으로 우리 독립군이 익혔던 무예(武藝)에 대해 일찍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엄혹한 시절에 우리 독립운동가들도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최소한의 무예나 호신술을 익혔을 터인데, 그에 대해서는 역사학계에서 진지한 연구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다.   중국 쪽 문헌에 따르면 중국무술의 일종인 형의권(形意拳)과 팔괘장(八卦掌)의 달인이었던 한모협(韓慕俠, 1877~1947)이란 이가 황포군교의 국술교관이었다고 하는데, 혹여 약산을 비롯한 의열단원들도 그에게 무예를 배우지는 않았을까?

이런 추측을 하다 보니 우리 독립군이 익혔을 기예의 형태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언젠가 우리 독립군이 익혔던 호신술도 무예사의 관점에서 진지하게 다뤄지길 고대해 본다.

대륙에서 발견한 약산과 의열단의 흔적

<오마이뉴스>의 김종훈 기자와 함께 <임정로드 4000km>를 편집할 당시만 해도 황포군교에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이 없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임시정부 및 의열단 100주년을 맞아 많은 한국인들이 황포군교를 방문하면서, 눈 밝은 관람객들에 의해 조금씩 그 흔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황포군교 입구 광장에는 2011년에 조성된 가로로 기다란 비석이 있는데, 황포군교를 거쳐간 이들의 명단을 기수별로 정리한 것이다. 바로 이 비석에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이 있다.
 
 황포군교 입구 비석에서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찾는 답사단원들
 황포군교 입구 비석에서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찾는 답사단원들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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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포군교 입구 비석에 새겨진 '김약산(金若山: 김원봉)'의 이름. 조선의용대 뱃지를 나란히 놓고 인증샷을 찍었다.
 황포군교 입구 비석에 새겨진 "김약산(金若山: 김원봉)"의 이름. 조선의용대 뱃지를 나란히 놓고 인증샷을 찍었다.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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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포군교 제4기 생도들의 명부가 새겨진 칸에 김원봉이 '김약산(金若山)'이라는 이름으로 새겨져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이름도 있는지는 확인해 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답사단은 동행한 민족문제연구소 광둥지부 박호균 사무국장의 도움으로 김원봉뿐만 아니라 오성륜(吳成崙, 의열단원), 박효삼(朴孝三, 조선의용대원) , 박건웅(朴建雄, 의열단원), 양도부(梁道夫, 김산과 광저우봉기 참여) 등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혹여라도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찾아 황포군교를 방문할 독자들을 위해 여기 그 명단을 공유한다. 황포군교에 가실 분들은, 미리 시간을 길게 빼서 관람하는 걸 추천한다. 첨부한 명단을 토대로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머나먼 대륙에서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발견하는 감격! 직접 느껴보지 않으면 모른다. (2부로 이어집니다)
 
 황포군교 입구 비석에 새겨진 한국인 생도 및 교관들의 명단 (제공: 민족문제연구소 광둥지부 박호균 사무국장)
 황포군교 입구 비석에 새겨진 한국인 생도 및 교관들의 명단 (제공: 민족문제연구소 광둥지부 박호균 사무국장)
ⓒ 박호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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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포군관학교 정문 앞에 선 청년백범 14기 답사단
 황포군관학교 정문 앞에 선 청년백범 14기 답사단
ⓒ 변량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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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선열을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고자 하는 역사학도 / 以茶靜心 以武健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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