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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곤 전 쌍용그룹 회장
 김성곤 전 쌍용그룹 회장
ⓒ 고려대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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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급 가문이 정치에 직접 가담하는 일은 고려왕조 멸망과 함께 한국사에서 원칙상 사라졌다. 고려 때까지만 해도 노비 및 토지를 대거 보유한 대지주 가문들이 정치를 주도했지만, 고려 말기 공민왕 때 중소 지주계급인 신진사대부가 집권하고 이들이 조선왕조를 세우면서부터 사정이 바뀌었다. 이 뒤로는 재벌급의 정치 참여에 대한 거부감이 서서히 확산됐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경제적 최상류층이 정치에 직접 나서지 않고 일반 상류층이 국정을 운영하는 현상이 보편화됐다. 정조 임금이 사망한 1800년부터 63년간 안동 김씨 같은 세도가문들이 재벌급 재산을 보유하기는 했지만, 이들은 정권을 잡은 뒤에 그 정도의 재산을 증식했다. 처음부터 경제력을 배경으로 정권을 잡은 게 아니었다.

합격자 평균 연령이 36.7세(조선시대)라서 장기간의 수험 생활을 요하는 과거시험제도는, 시험공부를 할 경제력은 있지만 학습 의욕이 끈질기지 않은 '최상류층'과 학습 의욕은 있지만 경제력이 약한 '서민층'이 관직 획득 경쟁에서 각자의 핸디캡을 갖도록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정치에 직접 발 담그지 않았던 조선시대 재벌급 가문

과거에 급제해 관직에 진출한 선비들은 대부분 중소 지주 출신이었다. 재벌급인 최상류층 자제들은 원칙상 3년에 33명만 뽑는 과거시험에 목숨을 걸지 않았다. 이들은 굳이 관직을 갖지 않더라도 다양한 방법으로 사회적 지위를 획득했다. 임금은 이들이 납부하는 세금에 의존했고, 지방 출신 공직자들도 한양에 근무하려면 이들의 부동산에 세를 들어야 했다.

최상류층이 정치에서 배제되는 현상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국회 공직자윤리위원회가 2019년 3월 27일 공개한 '2018년 국회의원 재산변동 신고 내역'에 따르면, 신고 총액이 500억원 이상인 김병관·김세연·박덕흠 의원을 제외한 나머지 286명의 평균 재산은 23억9767만원이었다. 일반 국민들보다는 부유하지만, 최상층부 재벌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재벌급 재산을 보유한 이들이 정치에 직접 가담하는 사례가 전혀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런 사례가 이따금 발생하고 있다. 대한민국 시대에 들어서는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이 1992년에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대선에 도전했고, 그의 6남인 정몽준이 7선 국회의원을 지내고 한나라당(자유한국당 전신) 대표를 역임했다.

정주영처럼 당을 만들거나 대권에 도전한 것은 아니지만, 대한민국 시대에 그 이상으로 정치에 깊이 개입한 재벌이 있다. 쌍용그룹 창업자 김성곤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옆으로 길게 뻗은 카이저 수염이 인상적인 그는 재벌의 정치 참여에 대한 뿌리 깊은 거부감 속에서도 이승만 및 박정희 정권에 참여해 영향력을 늘렸다. 한국 현대사에서 꽤 이례적인 행보를 남긴 재벌이다.

김성곤은 일제강점 3년 뒤인 1913년 8월 15일(음력 7월 14일) 경북 달성군 현풍면에서 출생했다. 이 집안에는 일정 규모의 토지가 있었다. 기업사 전문가인 조경식이 1987년 <경영계> 제112권에 기고한 '산업보국 이념의 실천: 쌍용그룹 창업자 김성곤 회장'에 따르면, 1921년 아버지 김광도가 별세한 뒤 어머니 김봉옥은 농토를 조금씩 정리하다가 1925년 대구에서 조양여관을 개업했다.

김성곤은 서당을 거쳐 현풍보통학교(초등학교)에 입학했다가 달성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하고, 휘문고등보통학교(중학교)에 입학했다가 대구고등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이후 보성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하고, 뒤이어 보성전문학교(특수고등학교)를 마쳤다. 집안에 경제력이 없었다면, 이런 이력을 남길 수 없었을 것이다.

전문학교 졸업 뒤 대구부청 재무과 및 대구상공은행에 근무한 김성곤은 1939년에 최재영·이종건과 함께 '삼공유지'라는 비누 제조업체를 차렸다. 셋이 함께 경영한다 해서 삼공(三共)이었다.

정치권력 등에 업고 비누 제조에서 방직업까지 사세 확장

삼공유지를 기반으로 재산을 불려나간 김성곤은 금성방직에 이어 쌍용양회를 차리면서 사세를 확장해나갔다. 쌍용이란 회사명은 쌍용양회 영월공장이 세워진 강원도 영월군 서면 쌍용리에서 따왔다. 그가 작고한 지 12년 뒤인 1987년, 쌍용그룹은 재계 5위였다.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쌍용양회만 남고 쌍용건설, 쌍용정유(에쓰오일), 쌍용중공업(STX 그룹)이 분리되기 전까지 김성곤 일가는 재벌 지위를 유지했다.

김성곤은 대인관계가 활발했다. 시대 흐름과 돈의 흐름도 잘 읽었다. 다방면에 대한 자신감도 왕성했다. 사업뿐 아니라 축구·유도·씨름 등에도 재능을 보였다. 대구고등보통학교 때는 축구선수였고, 보성전문 때는 유도·축구·럭비선수였다. 훗날 사업과 정치를 병행한 것도 다방면에 대한 자신감을 반영한다.

그런 점들이 사업적 성공에 밑바탕이 됐겠지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또 다른 요인이 있다. 정치권력과의 협력이 바로 그것이다. 소비자에게 어필하는 것 이상으로 정치권력에 어필하는 것으로써 사세 확장을 도모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차린 삼공유지는 꽤 잘나갔다. 삼공이란 두 글자가 새겨진 비누가 충북과 경북의 경계인 추풍령 이남에서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그가 대기업 경영자가 되고 재벌 총수가 된 것은 1945년 해방 이후에 벌어진 일련의 정치적 변화 때문이다. 이런 흐름에 대처하는 방법으로 그는 부를 늘려 나갔다.

전 <한겨레> 회장인 송건호의 <한국 민족주의의 탐구>에 따르면, 해방 당시 한국 총 자산의 약 80%, 산업자본의 98%가 일본인 소유였다. 해방 뒤 '국민의 것'이 됐어야 할 이 재산들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 의해 소수 기업인들에게 사실상 공짜로 불하됐다. 적산 혹은 귀속재산이라 불린 이 재산은 시중 가격 10분의 1로, 그것도 15년 할부로 거래됐다.

2007년에 <경영컨설팅연구> 제7권 제1호에 실린 오병석 협성대 교수의 '일제식민경제의 유산과 한국 무역'은 해방 직후의 경제를 설명하면서 "통화는 팽창되고 인플레이션은 앙진되어 미군정 3년간에 통화량은 6배 이상, 물가는 8배로 상승했다"고 말한다. 어제의 돈이 그 돈이 아닌 세상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물가가 치솟던 시절이었다. 이런 시기에 15년 할부로 '국민의 것'을 매입했으니, 사실상 공짜 매입이나 다름없었다.
 
 1975년 3월 1일, 국민대학 구내에 각계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불교의식으로 엄수된 고 김성곤 회장 영결식.
 1975년 3월 1일, 국민대학 구내에 각계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불교의식으로 엄수된 고 김성곤 회장 영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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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력의 기반이 된 '적산'... 정치권력까지 탐하다

그런 식으로 적산을 매입한 기업인들이 오늘날 한국의 재벌을 형성하고 있다. 김성곤도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한국 재벌의 탄생 비화를 다룬 이동형의 <툭 까놓고 재벌>은 그가 금성방직을 설립하는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시작은 당연히 적산 불하였다. 일제가 조선직물과 경기염직에 옮겨 설치해놓고 간, 포장도 뜯지 않은 방적기 2000추를 싼값에 불하받아 금성방직을 설립한 것이다."

이 금성방직을 매개로 김성곤은 유엔한국부흥위원단(UNKRA) 원조자금까지 받았다. 방적기 1만8480추를 도입할 수 있는 거액이었다. 적산 불하가 한번의 행운으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행운으로 이어진 것이다. 미군정 및 이승만 정권과 적대적이었다면, 혹은 무관했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김성곤은 정치적 혜택을 입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정권에 뛰어들었다. 이승만 정권 2인자 이기붕의 권유로 자유당에 입당해 재정부장까지 지냈다. 1958년에는 제4대 민의원 의원에도 당선됐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그도 위기에 봉착했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난다. 동향 출신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것이 그의 행로에 반전이 됐다. 김성곤은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와 친했다. 김성곤 역시 박정희처럼 해방 직후에는 사회주의자였다. 박정희와 연결될 만한 끈들이 있었던 것이다.

5·16 쿠데타 뒤 김성곤은 다시 국회의원이 되고 국회 재정경제위원장이 되고 민주공화당 재정위원장 및 당무위원이 됐다. 이런 배경에 힘입어 그의 사업과 정치권력은 계속 팽창해갔다. 해방 전에 세운 삼공(三共)유지라는 회사명처럼, 3공 정권에서 그는 승승장구해갔다.

박정희 정권 때 김성곤은 4선 의원이 됐다. 1967년 시점에는 길재호·백남억·김진만과 함께 공화당 4인방을 형성했다. 박정희가 쿠데타 동지 김종필을 견제할 목적으로 김성곤과 3인을 지원한 결과였다.

김성곤은 박정희의 의중을 잘 관철시켰다. 도널드 프레이저가 위원장인 미국 하원 국제기구소위원회가 1978년 발간한 <한미관계 보고서>, 일명 <프레이저 보고서>에 따르면, 김성곤은 김종필을 외유 명목으로 해외로 추방하는 데도 개입했다. 그런 방식으로 박정희의 신임을 얻고 정권 내 입지를 공고히 했다. 지방과 경찰서 등에 그의 사람들이 생겨날 정도였다.

무엇보다 그는 박 정권의 정치자금을 잘 관리했다. 미국 정부의 원조자금과 미·일 기업의 뇌물로 박 정권의 정치자금을 만들었다. <프레이저 보고서>는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증언을 인용해 "박 대통령과 박의 부인, 정일권, 이후락, 박종규 등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비슷하게 제공된 자금들도 김성곤이 보관했다고 증언했다"고 보고한다.

그는 박정희의 지갑만 두둑히 해준 게 아니다. 자신의 곳간도 가득 채웠다. <프레이저 보고서>에 따르면, 1970년경 그의 재산은 무려 1억 달러였다. 지금의 1억 달러(1159억)와는 비교도 안 되는 거액이었다. 1970년 한국 수출액이 8억3000만 달러였다. 사업과 정치 양쪽에서 얼마나 많은 돈을 축적했는지 알 수 있다.

지나친 욕망, 그를 나락으로 빠뜨리다

정치는 김성곤에게 돈과 권력을 모을 기회를 제공했다. 소비자에 대한 어필보다 정치권력에 대한 어필로 보다 쉽게 사세를 키울 기회를 제공했다. 하지만, 결국 이것이 종말을 재촉했다. 과도한 욕망이 그를 불구덩이로 몰아넣었다.

김종필을 견제하라고 내세운 4인방이 너무 세지자, 박정희는 1971년 6월 4일 개각을 단행하면서 김종필을 총리로, 오치성을 내무부장관으로 기용했다. 김종필을 견제하라고 4인방을 만들어놓고, 그 4인방을 견제하려고 김종필을 총리로 등용한 것이다. 오치성을 기용한 것은 4인방의 정부 내 인맥을 물갈이하기 위해서였다. 오치성이 '윗선'으로부터 받은 밀명은 지방 관청과 경찰서 내의 4인방 인맥을 제거하라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김성곤이 코너에 몰린 상황에서, 야당이 실미도 사건(북한침투부대의 반란) 등을 이유로 오치성 해임건의안을 제출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김성곤은 박정희의 지시를 거역하고 야당과 합세해 해임 건의안을 통과시켰다. 오치성이 장관이 된 지 4개월 만의 일이다(10·2 항명 파동).

김성곤은 박정희가 자신을 어쩌지 못할 거라 계산했다. 박정희가 자신을 신임해온 데다가 자신이 박정희의 약점을 많이 알고 있다는 자신감에서였다. 그것은 착각이었다. 김성곤은 서울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지독한 고문을 받았다. 트레이드 마크인 카이저 수염도 이때 뽑혔다. 나이 어린 정보부 요원이 수염을 반쪽만 뜯어냈다. 그 뒤 고문 후유증을 겪다가 1975년 63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성곤은 조선 건국 이후로 웬만해선 정치권에 발을 담그지 않는 이 땅 재벌들의 금기 사항을 지키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에 이어 박정희 정권에까지 깊숙이 발을 담그며 물질과 권력을 추구해나갔다. 결국 콧수염이 뽑히는 치욕을 당하며 재벌 정치가 김성곤은 무대에서 퇴장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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