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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10월 19일 평양 미래과학자거리 뒤로 노을이 지고 있다.
 2019년 10월 19일 평양 미래과학자거리 뒤로 노을이 지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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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생활할 때 이틀에 한 번 꼴로 집 근처에 있는 한증탕에 가서 두세 시간씩 놀다 왔어요. 사람들이 많지 않을 때 탕 속에 앉아서, 사우나실에서 땀을 내면서 같이 얘기를 하는데, 주로 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교환했어요.

정치 얘기는 일절 안 해요. 어느 집 교쥬(일본식 만두)가 맛있다, 어떤 미안사(맛사지사)가 안마를 잘한다, 어떤 (방문) 장사꾼이 질 좋은 옷을 갖고 다닌다, 애들 대학 보내는 데 돈이 얼마가 든다, 어떻게 공부시켜야 종합대학을 보낼 수 있다, 어떤 개인교사가 실력이 좋다 같은 얘기들이 한증탕 모임에서 나오는 정보예요." 


북한 평양에서 부유층 전업주부로 살았던 30대 탈북여성 A씨의 말이다. 지난 2015년에 탈북해 남한에 입국한 그는 "쌀값 얘기나 하지 고급정보는 얻을 수 없는 인민반 회의에는 잘 참가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이런 진술은 북한의 시장 활성화와 이에 따른 사회 변화가 '사적 담론'이 형성될 수 있는 공간을 창출했음을 보여준다. 시장화라는 큰 변화가 오기 전에 북한 주민들은 공적 영역으로부터 벗어나 개인적 삶을 살 수 있는 공간이 매우 협소했다. A씨의 진술은 또 경제적 여유가 있는 계층의 생활 및 관심사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조정아·최은영 박사의 <평양과 혜산, 두 도시 이야기: 북한 주민의 삶의 공간>(통일연구원, 2017)은 A씨의 대면 인터뷰를 포함해 복수의 탈북민 인터뷰를 인용·소개하며 "최근 북한 주민의 삶의 공간에 나타난 변화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탈중심화·탈국가화된 다양한 공간의 출현·확대·분화라고 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해당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이런 시설들의 이용요금은 2~5달러 이상이며 단골들은 어느 정도 경제적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다. 부유층 여성들은 이런 공간에서 소위 '외화 목욕'을 하며, 자녀들의 사교육 정보나 미용서비스, 배달음식 등에 관한 '고급정보'를 교환한다. 한국의 사우나와 달리 1인실·2인실·가족실이 따로 있고, 음식도 제공받을 수 있다. 그래서 한증탕은 친구·지인 등 속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들의 소모임 장소로도 인기다. 
   
앞서의 A씨는 가사노동을 도와주는 가사도우미도 고용했다. 가난한 이웃에게 살림살이를 도움받고 고기·기름 같은 식료품을 주거나, 물품에 약간의 금전을 얹어줬다고 전했다.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북한에서 사적 고용은 '비사회주의적 행위'라고 해서 단속 및 처벌대상이 된다. 개인적으로 타인의 노동력을 사고파는 것을 '착취'로 보고 금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A씨는 국가기관 간부였던 남편에겐 가사도우미 고용을 비밀로 했다. 남편은 "어떻게 살게 된 평양인데 당신 때문에 떨려 나는 일이 없게 해줘"라고 당부하곤 했다. 그럼에도 앞서 보고서에 따르면, 2000년대 이후 시장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사적 고용은 가사노동 부문까지 확대됐다.

최근 북한에선 가사도우미와 보모가 등장했고, 음식 배달, 장보기 배달, 세탁업 배달 등 다양한 서비스업이 등장하고 있다. 가사노동과 관련된 이런 신종 서비스업종의 창출을 두고 평양 출신 50대 여성 B씨는 "자기 특기를 살리면서 살 수 있는 자기 공간이 생긴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다양한 직업이 생겼지. 돈 잘 버는 사람 밑에서 벌어먹고 살 수 있는 거지. 같이 가는 거죠. 잘사는 사람이랑 못사는 사람이. 예전엔 이렇게 다른 사람을 도우미로 쓰는 걸 착취라 해서 활성화가 안 됐어요. 내가 요리했잖아요? 집에 들어왔잖아요?(입주 가사도우미를 의미) 잘사는 사람한테 요리해주면서 사는 거지. 다 있지. 보모도 있고. 모든 분야, 자기가 종사한 직업, 자기가 잘하는 것 한 가지로 돈 버는 거지. 여기보다 더 자본주의지."

배달 음식에 빨래 대행까지... 번지는 서비스 산업
 
 북한 선전매체 '서광'은 북한 주민 사이에서도 가공 음식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2019년 12월 27일 전했다. 평양의 대형마트 '광복지구상업중심'은 직장 일로 바쁜 여성들을 위해 '아침저녁 매대 봉사'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은 가공 음식을 고르고 있는 북한 여성들의 모습.
 북한 선전매체 "서광"은 북한 주민 사이에서도 가공 음식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2019년 12월 27일 전했다. 평양의 대형마트 "광복지구상업중심"은 직장 일로 바쁜 여성들을 위해 "아침저녁 매대 봉사"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은 가공 음식을 고르고 있는 북한 여성들의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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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주문 서비스의 경우 부유층 사이에선 예전부터 존재했지만, 시장화가 진행되면서 더욱 활성화됐다. 최근엔 음식을 만드는 사람과 배달해주는 사람이 구분돼 있을 정도로 서비스 분화가 이뤄졌다. 탈북여성 B씨의 말이다. 

"동태국이나 먹고 싶은 걸 전화하면 요리사가 요리하고 배달해주죠. 요리랑 배달해주는 사람이 달라요. 김정일 시대에는 체계가 없다가 김정은 시대에는 체계가 잡혔죠. 여기 오기 전까지 김치를 담가본 적이 없어요."

앞서 보고서는 평양에서 가정주부였던 면담자들의 말을 인용해 "부유층의 젊은 가정주부들은 명절이나 남편 생일날에 집에서 요리를 하지 않고 주문음식으로 한상을 차리기도 한다"고 소개했다. 햄버거스테이크·고로케·돈까스·김밥·회·만두 등 배달음식의 품목은 상당히 다양하다. 모든 음식은 전화로 주문 가능하고, 밤이든 새벽이든 원하는 시간에 배달 가능하다. 부유층 주부들은 수첩에 음식을 맛있게 잘하는 가게의 전화번호를 적어 뒀다가 지인끼리 공유한다. 

음식뿐 아니라 빨래도 전문적인 가사노동 서비스의 대상이 된다. A씨는 집에 세탁기가 있었지만, 물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빨래는 '빨래장사꾼'에게 맡겼다고 한다. 빨래장사꾼은 빨래를 수거해 가서 세탁은 물론 표백과 다림질까지 해서 집으로 배달한다. 

A씨는 "1kg에 1.5달러씩 받는다. 10kg이면 15달러"라며 "세제는 안 줘도 되지만 원하는 냄새가 있지 않나. 내가 세제를 사서 주면 3일에 한 번, 일주일에 한 번 와서 걷어간다"고 설명했다.  

북한에서 이런 다양한 공간과 서비스 업종의 출현을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는 곳은 단연 평양직할시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보고서는 평양을 '맨해튼'에 비유해 압축적으로 표현한 B씨의 구술을 인용·소개했다. 지난 2016년 5월 <워싱턴포스트>는 평양 부유층의 삶과 소비 경향을 '평해튼'이라는 신조어로 설명한 바 있다.    

"평양 사람들은 안정적인 삶을 살아요. 전철·호텔·식당·수영장도 있고. 평양시민권이면 전국 각지, 외국도 갈 수 있어요. 자식을 좋은 데서 공부시킬 수 있고. (중략) 평양은 내가 보기에는 아름다운 도시. 공기가 좋고, 경쟁이 없고, 서로 막 치열하게 잘살려고, 돈 벌려고 하지 않으니까.

평양은 맨해튼이에요. 아름다운 도시. 공기가 좋잖아요, 평양이? 사람이 많지 않지, 물놀이장 있지, 승마장 있지, 평양에. (중략) 평양은 들어오기 힘든 곳이고, 누구나가 살 수 있는 서울이 아니지. 특혜가 있는 사람들이 사는데, 애를 써도 안되는 게."


앞서 보고서는 "시장화가 진행되면서 부유층과 일반 주민들 간의 경제적 차이는 급격히 벌어졌고, 이는 집의 형태뿐 아니라 살림 규모와 살림 사는 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서 "북한에서 사적 고용은 공식적으로 허가되지 않는 '비사회주의적 행위'이지만, 경제적 여유가 있는 계층을 중심으로 암암리에 확산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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