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따따(프랑스에서 '이모'를 부르는 애칭)가 원래 오늘 벨기에로 돌아갔어야 했는데, 예약했던 기차가 취소돼서 결국 하루 더 부모님 댁에 있을 거래."

남편이 이야기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왔고, 나와 함께 한국에 살고 있다. 연애 때부터 프랑스의 철도 파업과 그 불편에 대해 여러 번 들어왔고, 그들의 파업 수준에 비하면 한국의 그것은 마치 초등학생 수준에 불과한 것 같아 '역시 이런 게 국왕의 목도 베어버리는 강한 민중의 유전자인가'라는 우스운 생각도 했다.

어쨌거나 우린 프랑스에서 살지 않으며, 시부모님도 이미 은퇴하셨고 주로 개인 자동차로 움직이시니 그쪽이 파업을 한다고 해서 딱히 걱정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2019년 말부터 다시 한번 철도 파업 소식이 들려왔는데, 우리가 올 1월 초 프랑스를 방문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파리에서 행진하는 '연금개편 저지' 시위대 프랑스 파리에서 정부의 연금 개편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이날 프랑스 전역에서 정부의 퇴직연금체제 개편에 반대하는 제3차 총파업 대회가 진행됐다.
▲ 파리에서 행진하는 "연금개편 저지" 시위대 지난 2019년 12월 18일 프랑스 파리에서 정부의 연금 개편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이날 프랑스 전역에서 정부의 퇴직연금체제 개편에 반대하는 제3차 총파업 대회가 진행됐다.
ⓒ 연합뉴스/AP

관련사진보기

다시 따따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벨기에에서 혼자 지내는 그녀는 1년에 한두 번 시부모님댁에 방문해 10일 정도 머물면서 TGV(프랑스 고속철)를 타고 여행도 다니신다. 지난 12월에 또 한 번 들르셨는데, 이번에는 철도 파업 때문에 프랑스에 발이 묶인 것이다. 여행이고 뭐고 제대로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예상했던 날짜에 벨기에로 돌아갈 수 없었다.

돌아가는 기차를 타려면 파리 북역(Gare du nord)까지 움직여야 하는데, 기차역으로 갈 방법도 없으니 시부모님이 차로 데려다줬다. 그나마 시부모님 댁이 파리 근교인 게 다행이었는데, 원래 한 시간 반이면 도착하는 거리를 세 시간 넘게 운전해서 가셨다고 한다. 기차와 지하철을 이용하지 못하게 된 모든 사람이 차를 가지고 나오니 안 그래도 밀리는 파리 교통이 더욱 꽉 막혔다.

파리에서 갓 대학을 졸업한, 남편의 사촌 한 명은 이 시기에 바다 미생물을 연구하는 인턴십에 참여하게 되어  남부 바닷가 지역인 바눌 쉬르 메르(Banyuls sur mer)에 머무르고 있었다. 남쪽에 간 김에 모처럼 칸(Cannes)에 살고 있는, 평소 자주 보지 못하는 친척 집에 가기로 했는데, 일반 기차로 7시간이면 갈 거리를 파업 때문에 시티버스 및 (아주 드물게 운행하는) 기차를 몇 번씩 오르고 내리며 고생하다 결국 12시간이 걸려 도착했다고 한다. 프랑스 철도 파업은 이렇게 전국적으로 강도 높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누구든 프랑스 여행을 계획할 때에는 날씨, 안전 등의 요소도 고려해야 하겠지만 그보다 먼저 훑어봐야 할 것은 이곳의 철도 파업 계획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대개 기차뿐 아니라 지하철 파업까지 포함되기 때문에 이 경우 파리 여행은 계획대로 되기 힘들다.)

파업이 좀처럼 잦아들지 않자 우리의 프랑스 방문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1월 초, 시아버지의 칠순을 기념해 우리는 시어머니와의 비밀 논의를 거쳐 시아버지 몰래 '서프라이즈 방문'을 기획했는데, 우리가 공항에 도착한다 한들 댁으로 가는 기차를 탈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는 것이었다. 우버나 택시라는 값비싼 선택지도 있었지만, 고맙게도 파리에 거주 중인 남편의 고모께서 샤를드골 공항으로 픽업을 나오겠다고 하셔서 문제는 해결되었다. 예상대로 우리가 도착했던 1월 4일까지 철도 파업은 이어졌고, 탁월한 선택이었다.

길어진 철도 파업 때문에 웃은 '카풀 앱' 

차 안에서 남편에게 통역을 부탁해 철도 파업에 대한 고모의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당시 철도 파업은 한 달째 지속되고 있었고 파업 42일째인 1월 16일 기준, 정부가 일부 양보 의사를 내놓으며 철도 운영은 90% 정도 정상화되었다고 한다). 고모를 포함한 주변 모든 사람들이 아침에 자차를 몰고 출근하다 보니 교통 체증은 물론이거니와 유류비도 많이 든다고 했다. 출근 시간이 최소 두 시간 당겨진 것은 덤. 철도 파업에 이골이 난 이곳 시민들은 카풀 서비스 앱을 대대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프랑스의 창조경제, 이름하여 '블라블라 카(BlablaCar)'.

사실 블라블라 카는 2006년 창립된 카풀 서비스 업체이고 그간 경영실적도 양호했는데, 이번을 포함해 최근 몇 년간 간헐적으로 지속되어온 철도 파업과 함께 프랑스에서의 성장률이 어마어마하다. 마침 고모도 자신의 차로 블라블라 카를 운영하며 방향이 맞는 동네 사람을 태워 출근하는데, 이 일로만 한 달에 200유로(한화 약 25만 원) 이상 벌고 계시며, 유류비를 제하더라도 수익이 난다고 한다. 잦은 철도 파업 덕분에 프랑스 땅에서는 보통 사람들이 이렇게 출근 플랜B 하나 정도 갖고 있을 지경이다.

물론 고모는 파업이 빨리 끝나서 이전처럼 편하게 출근하고 싶다고 덧붙이셨다. 내게는 '혁명의 역사를 지닌 프랑스 시민이니까 파업 주체인 노동자를 공감하고 이해해주지 않을까'라는 일차원적인 기대도 있었지만, 답은 그렇지 않았다. 파업이 짧게 끝나면 몰라도 지금은 많은 사람이 철도 파업으로 일상 생활에 불편을 겪고 있으며, 지친다는 게 일반적인 의견이었다. 그리고 노동자라고 다 같은 노동자가 아니기도 했다. 단정 짓기 조심스럽긴 하지만 철도 노동자는 공공부문 근로자로, 대부분의 사기업 노동자보다 나은 조건에서 일하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

이번 철도 파업의 가장 주된 이유는 마크롱 대통령이 제시한 연금 개혁안이다. 연금 개혁안의 내용은 철도 노동자에게만 해당하는 사항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에 반대하는 노동자 수십만 명이 12월 내내, 크리스마스까지도 파리 이곳저곳에서 시위를 진행한 바 있다. 개혁안에 반대하는 대부분의 직업군이 철도노조를 비롯해 교사, 병원 등 공공부문 종사자라는 점이 특징이었다. 

마크롱 대통령은 직종 및 직능별로 42개에 이르는 복잡한 퇴직연금 체제를 단일 연금 체제로 통합하고, 기존 연금수령 연령 62세를 사실상 64세로 상향하는 개편안을 발표한 바 있다. 공공부문 종사자가 가장 뿔이 난 이유는 아무래도 그들에게 적용되어오던 연금 체제가 개편안보다 훨씬 나으니, 본인의 연금이 줄어들 것이란 예측 때문이다. 한국으로 따지면 공무원 연금과 국민연금을 단일 체제로 통합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일까?

또 기존에는 62세까지 일하면 연금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이번 개혁안에 따르면 64세까지 일해야 기대하는 수준의 연금을 보장받을 수 있고, 62세에 퇴직을 원한다면 해도 되지만 이 경우 본인이 취득한 점수에 따라 감산된 금액의 연금을 적용받게 된다고 한다.

남편의 설명을 듣고, 여러 가지 외신도 읽어봤다. 한국에서 일하는, 공공기관 종사자가 아닌, 그리고 국민연금에 대해 크게 기대하지 않고 살아가는 30대인 나의 첫 번째 질문은 "2년 더 일하면 더 좋지 않아? 어차피 62살이면 요즘엔 젊은 나이인데? 월급도 다 주는데?"였다.

사실 프랑스에도 나와 비슷한 생각하는 사람이 있긴 했다. 차를 태워준 고모의 아들, 25세 다비드였다. 프랑스에서 연금 개혁안에 대한 가장 큰 거부감을 느끼는 세대는 20~30대 젊은층이란 보도가 있었던 반면, 그는 시위에 나가지 않을 계획이라고 이야기했다. 일단 공공기관에 취직할 계획이 없고, 본인이 나이 든 시점에는 재정도 충분하지 않을 것이며, 인구 고령화 등으로 어차피 국민연금에 크게 기댈 수 없을 것 같다는 이유였다. 결국 한국의 일반적인 직장인과 비슷한 생각이었다. 시스템에 대한 불신과 자포자기로 인한 이러한 선택은, 프랑스에서 연금 혜택을 가장 누리지 못하는 직업군인 농민이 막상 이번 시위에 참여하지 않는 현실과 부분적으로 맞닿아 있었다. 

한편, 남편의 설명에 따르면, 공공부문 노동자의 경우 (개인마다 차이는 있겠으나) 63세부터 64세까지 2년 더 일하며 받을 월급의 70% 이상을 퇴직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나이 들어서 그 30%의 돈 때문에 힘들게 일하려 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허나 어쨌든 파리 시민 대다수가 공공부문 노동자가 아니니 결국 이번 개혁안이 통과되지 않겠냐고 물었지만 경험적으로 보면 힘들다는 답이 돌아왔다. 프랑스노동총연맹인 CGT의 파워가 엄청나기 때문에 지금껏 시라크, 사르코지 등 몇 명의 대통령이 시도했지만 처참하게 실패한 전력이 있다고 한다(사르코지는 은퇴 연령을 연장하는 데는 일부 성공했다). 
 
 2020년 1월9일 오후 파리에서 시위에 참여중인 프랑스노동총동맹CGT
 2020년 1월9일 오후 파리에서 시위에 참여중인 프랑스노동총동맹CGT
ⓒ 김혜민

관련사진보기

양가적 감정이 든다. 인구 고령화와 경제성장률 둔화는 전 지구적 추세이니, 연금제도의 대수술은 프랑스를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가 갖고 있는 숙제일 것이다. 당장 한국도 마찬가지다. 나라에 돈이 부족해서 연금을 보장해줄 수 없게 되었는데, 국민 전체에 적용되지도 않는 이 시스템을 지속하는 것이 무조건 맞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허나 한편으로, 공공 부문 종사자가 직업을 선택할 때 안정적인 연금제도를 중요하게 고려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거리로 나오는 걸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시부모님 댁에 도착했다. 사실 시부모님 또한 두 분 모두 철도회사에서 은퇴한 분들이라, 이미 좋은 연금제도의 보호를 받고 계신다. 예쁜 집에서 부지런히 정원을 관리하며, 1년에 한두 번 정도는 친구나 가족과 해외여행도 다니고, 지인들을 식사에 초대하며 돈 걱정 없이 즐겁게 지내시는 데에는 연금의 힘이 적지 않을 것이다. 분명 더 많은 노인이 이렇게 살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할 텐데, 지금의 상황을 봐서는 쉽지 않을 듯하다. 

어쨌든 우리는 시아버지의 70주년 생일파티에 잠입하기 위해 고모 차에서 내리지 않고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동네 친구분들이 집에 초대되었고, 시어머니는 '손님 맞히기 게임'을 한다며 시아버지를 방에 데려가 기다란 천으로 그의 눈을 가린 채 데리고 나오셨다. 우리는 고모의 메시지를 받은 뒤 정원과 연결된 테라스로 살금살금 들어갔다.

시아버지는 일단 나의 어깨와 팔, 머리 등을 몇 번이고 '수색'하며 고개를 갸우뚱하시더니 다른 손님의 이름을 대셨다. 남편 차례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남편은 시아버지의 귀에 대고 "Joyeux anniversaire(생일 축하합니다)"라고 속삭였고, 깜짝 놀란 시아버지는 안대를 푼 뒤 곧바로 눈물을 쏟으시며 몇 번이고 고맙다고 하셨다.

그렇게 가까이 사는 가족과 친구들을 포함해 14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하면서도 행복한 칠순 잔치의 밤이 지나갔다. 시부모님은 며칠간 준비한 14인분 코스 요리를 하나씩 내오셨고(시어머니가 몰래몰래 2인분을 더 만드셨다), 우리는 한국에서 더 저렴하게 구입한 인공지능 스피커를 시아버지 선물로 드렸다. 이따금 지직거리는 라디오 주파수를 맞춰서 뉴스를 듣는 시부모님께 딱 맞는 선물이었다.  

파리의 시위를 눈앞에서 본다니
  
 시부모님께서 직접 만들어 출력하신 칠순잔치 코스 요리 소개글
 시부모님께서 직접 만들어 출력하신 칠순잔치 코스 요리 소개글
ⓒ 김혜민

관련사진보기

며칠 뒤 아침, 시부모님의 새로운 라디오 플레이어에서 1월 9일 파리에서 또 한 번 대규모 시위가 열린다는 뉴스가 또렷하게 흘러나왔다. 40만 명이 운집할 예정이라고 했다. 남편과 나는 연애 시절 광화문 촛불시위에 함께 참여한 적이 있는데, 당시 무대에 선 가수 이승환씨의 노래를 신나게 따라부르던 내게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공연장에 온 건지 시위하러 온 건지 모르겠다, 이게 무슨 시위냐..."

사실 그는 굉장히 용감한 편이었다. 듣기로는 외국인이 한국에서 반정부 시위에 참여할 경우 정부 차원에서 불이익을 주는, 혹시 모를 가능성 때문에 그런 곳에는 가고 싶어도 안 가고 몸을 '사리는' 재한 외국인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나와 함께 갔다(결국 크게 실망한 채로 돌아왔지만...).

어쨌든 이번엔 내 차례였다. 그가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던 프랑스의 시위 현장에 가고 싶었다. 그는 안전에 대해 조금 걱정하더니 일단 가보자고 말하며 여러 가지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지역별, 날짜별 시위 일정이 정리된 웹페이지에 접속해 당일의 대오를 파악하고, 파리를 오가는 기차 시간을 정확히 알아보고, 당일 운영하지 않는 지하철 라인, 닫힐 예정인 지하철역 등의 정보를 고려해 몇 시 차를 타고 어느 역에 내려 어떤 시위 그룹에 끼어 들어갈 것인지, 소박하면서도 밀도 있는 작전을 세웠다.  

우리의 파리 방문 루트에는 이렇게 에펠탑도, 개선문도, 박물관도, 쇼핑도 없었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도시' 파리의 대규모 시위를 눈앞에서 경험한다는 건 내게 무엇보다 특별했다.  

[다음 기사] "얼마 안 쓴 젊은 대통령 중고로 팝니다" (http://omn.kr/1mbzf)
 
 2020년 1월9일 연금개혁안 반대시위 루트, 파리에서 시위는 항상 프랑스 민주주의의 상징적 장소와도 같은 Republique 광장에서 시작되곤 한다.
https://paris.demosphere.net/rv/76110
 2020년 1월9일 연금개혁안 반대시위 루트, 파리에서 시위는 항상 프랑스 민주주의의 상징적 장소와도 같은 Republique 광장에서 시작되곤 한다. https://paris.demosphere.net/rv/76110
ⓒ paris.demosphere.net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도 중복 게재할 예정입니다.


댓글6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음악 만들기와 글 쓰기를 좋아하는 여행 가이드. 포토그래퍼 남편과 함께 온 세계를 다니며 사진 찍고, 음악 만들고, 글 써서 먹고 사는 게 평생의 꿈.


연도별 콘텐츠 보기